시작은 술을 마시면 호기로워지는 나의 불순한 습관 탓이었다. 엄마를 집에 불렀고, 배달 음식을 시켰고, 와인을 꺼냈고, TV로 유튜브 계정을 연결했던 어느 토요일 저녁.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튼 아무 영상이 파리 여행 브이로그였다. 파리는 내 첫 유럽 여행지이자 가장 많이 다녀온 유럽 여행지이기도 하면서 친구랑도, 여동생이랑도, 혼자도 다녀왔던 곳이며, 약간의 썸이 있기도 했다가 스스로 생일을 기념하기도 했던 도시다. 유독 마른 몸을 한 엄마가 상체를 구부려 식사하는 모습과 TV 화면을 번갈아 보다 와인을 마시던 때.
“엄마 나랑 파리 한번 갈까?”
보통의 엄마였다면 됐다며 고개를 저을 타이밍인데 갑작스러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들었다. “…가면 좋지.”란 승낙을. 휴일 없이 일하는 자영업자인 엄마가 연달아 쉴 수 있는 날은 고작 명절 연휴. 달력을 확인하니 올해 추석 연휴가 제법 길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를 결정.
“파리만 보기에 5일은 짧을 수 있는데…, 그래도 추석 때 가자! 파리.”
* * *
여행에 적당한 날짜란 있을 수 없다. 여행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는 정복. 파리가 일주일이면 충분할지, 한 달이면 충분할지, 일 년이면 충분할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파리에 고작 나흘 있는 것일 수도, 나흘이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일단 머무는 동안 마음껏 즐기기가 목표. 파리에 도착한 첫날은 밤이라 바로 잠에 들었고, 다음 날 일찍 일정을 시작했다. 오전 7시 30분.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에 옷깃을 여미며 호텔을 떠났다.
파리의 새벽
2023년 9월부터 종이 절약과 환경 보호를 위해 종이 승차권 판매가 중단된 파리. 오페라역에서 아주 친절한 역무원을 만나 충전식 교통카드인 나비고 이지 2장을 구입했다. 변화에 시큰둥한 파리도 바뀌어 간다.
버스를 타고 생제르맹 데 프레의 카페 드 플로르에 도착했다.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 등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의 아지트였던 유서 깊은 곳으로 파리만의 카페 문화를 즐기기에 딱 좋은 곳일 듯해서다. 입구에 서서 점원의 안내를 받은 뒤 좌석에 앉았다. 바게트와 크루아상, 커피를 시키고 둘러보니 이른 시간인데도 거의 만석이다.
카페 드 플로르 ⓒCheng-en Cheng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옆자리에 한국인 모녀가 앉았다. 좁은 테이블 거리, 엄마를 거리가 보이는 안쪽으로, 딸은 그 반대 방향으로 앉은 똑같은 구도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어느 기점이 지나면 모녀의 위치 전환이 일어난다. 엄마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딸이 된다.
분명 점심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동영상을 찍으며 좋아하던 엄마였는데, 티켓을 예약해 놓은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향하려고 하자 어디 눕고만 싶으시단다. 미술관은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호텔로 돌아가 쉬었다가 나오면 되지 않겠냐고 명확하게 말해주면 좋으련만 근처 정류장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리는 엄마의 몸짓에 짜증이 울컥. 볕이 은은하게 내린 오랑주리 미술관의 오후의 수련만큼은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내가 왜 주기적으로 미술관에 가고 미술과 관련된 책을 사 모으는지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데. 약간의 분노를 삭이며 결국 호텔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물론 티켓 두 장은 허공에 날렸다.
오랑주리 미술관 ⓒLWYang
오전 7시 30분부터 나가 오후 3시까지 쉬지 않고 돌아다녔으니 엄마와 함께하기에 과한 일정이긴 했다. 그래도 이대로 일정을 마무리하기엔 너무 아쉽다. 마음 같아선 혼자라도 나가고 싶은데 엄마만 호텔에 덩그러니 남겨둘 순 없고.
날이 좀 어두워지자 엄마를 깨워 재촉해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부지런히 걸어 도착한 곳은 바토 무슈 선착장이었다. 졸음과 사투를 하며 유람선에 탑승한 엄마를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보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먼 거리를 떠나와 이국의 거리를 걷고 있음에도 이국이란 자각이 없던 하루였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자 이제야 사유가 끼어든다. 떠나오면서 느낀 몇몇 감정은 핸드폰 메모장에 짤막하게 기록해 놓고 세느 강변에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페어 댄스를 추는 파리지앵들을 눈에 담았다.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의 모습은 저 건너편에 있지만, 내가 해야 하는 여행은 끔뻑거리는 엄마의 현재 눈꺼풀에 있었다.
유람선에서 본 에펠탑
* * *
어느덧 사흘째 아침. 꽤 오랜 시간 푹 잤다. 가뿐한 몸으로 채비를 마치고 오페라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손에 작은 마이크를 든 가이드와 이어폰을 꽂은 관광객 여럿이 다가왔다. 아마도 워킹 투어를 신청한 한국인들인 듯했다. 인터넷에서 투어 프로그램을 찾아보고 각자 신청해서 모인 것이라고 엄마에게 설명하자 혼자 다니는 네가 대단한 거란다. 그간 여행할 돈 아껴 저축하라던 엄마에게 아마도 거의 처음으로 들은 긍정의 말이었다.
점심은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서 중요한 장소로 나온 르 그랑 콜베르(Le grand colbert)로 예약해 놓았다. 프랑스 음식의 기본과도 같은 에스카르고와 어니언 수프, 소고기 요리를 시켜 맛있게 먹었다. 계산을 할 때 크리스 마틴을 닮은 점원이 파리가 처음이냐 물어 엄마가 파리에 처음 왔다 하자 그런 처음의 경험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냔다. 맞다. 대체 왜 점원이 계산을 하러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엄마에게 손님이 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하는 것이 경험일 테니까. 밥을 먹고 나오니 날이 쨍하게 맑고 덥다. 이럴 땐 예정했던 것처럼 마레 지구에서 쇼핑하는 대신 몽마르트르에 올라야 했다.
르 그랑 콜베르
맑은 토요일 오후의 몽마르트르. 아베스역부터 사랑의 벽, 벽을 뚫는 남자 동상, 테르트르 광장 넘어 사크레쾨르 성당까지 관광객들이 많아 천천히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가 되어 가고 있는 남자아이, 와인을 마시는 테라스의 연인, 호객 행위를 하는 거리의 화가. 사크레쾨르 성당 내부를 구경하는 것보다 성당 앞 계단에서 파리 전경을 보는 것이 훨씬 즐거운 일이라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았다. 거리 연주하는 할아버지의 바이올린, 인증샷을 찍는 관광객들의 선글라스, 털털거리며 지나가는 꼬마 기차.

몽마르트르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antabile.j
덕질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이곳, https://brunch.co.kr/@cantabilej
시작은 술을 마시면 호기로워지는 나의 불순한 습관 탓이었다. 엄마를 집에 불렀고, 배달 음식을 시켰고, 와인을 꺼냈고, TV로 유튜브 계정을 연결했던 어느 토요일 저녁.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튼 아무 영상이 파리 여행 브이로그였다. 파리는 내 첫 유럽 여행지이자 가장 많이 다녀온 유럽 여행지이기도 하면서 친구랑도, 여동생이랑도, 혼자도 다녀왔던 곳이며, 약간의 썸이 있기도 했다가 스스로 생일을 기념하기도 했던 도시다. 유독 마른 몸을 한 엄마가 상체를 구부려 식사하는 모습과 TV 화면을 번갈아 보다 와인을 마시던 때.
“엄마 나랑 파리 한번 갈까?”
보통의 엄마였다면 됐다며 고개를 저을 타이밍인데 갑작스러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들었다. “…가면 좋지.”란 승낙을. 휴일 없이 일하는 자영업자인 엄마가 연달아 쉴 수 있는 날은 고작 명절 연휴. 달력을 확인하니 올해 추석 연휴가 제법 길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를 결정.
“파리만 보기에 5일은 짧을 수 있는데…, 그래도 추석 때 가자! 파리.”
* * *
여행에 적당한 날짜란 있을 수 없다. 여행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는 정복. 파리가 일주일이면 충분할지, 한 달이면 충분할지, 일 년이면 충분할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파리에 고작 나흘 있는 것일 수도, 나흘이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일단 머무는 동안 마음껏 즐기기가 목표. 파리에 도착한 첫날은 밤이라 바로 잠에 들었고, 다음 날 일찍 일정을 시작했다. 오전 7시 30분.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에 옷깃을 여미며 호텔을 떠났다.
2023년 9월부터 종이 절약과 환경 보호를 위해 종이 승차권 판매가 중단된 파리. 오페라역에서 아주 친절한 역무원을 만나 충전식 교통카드인 나비고 이지 2장을 구입했다. 변화에 시큰둥한 파리도 바뀌어 간다.
버스를 타고 생제르맹 데 프레의 카페 드 플로르에 도착했다.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 등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의 아지트였던 유서 깊은 곳으로 파리만의 카페 문화를 즐기기에 딱 좋은 곳일 듯해서다. 입구에 서서 점원의 안내를 받은 뒤 좌석에 앉았다. 바게트와 크루아상, 커피를 시키고 둘러보니 이른 시간인데도 거의 만석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옆자리에 한국인 모녀가 앉았다. 좁은 테이블 거리, 엄마를 거리가 보이는 안쪽으로, 딸은 그 반대 방향으로 앉은 똑같은 구도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어느 기점이 지나면 모녀의 위치 전환이 일어난다. 엄마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딸이 된다.
분명 점심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동영상을 찍으며 좋아하던 엄마였는데, 티켓을 예약해 놓은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향하려고 하자 어디 눕고만 싶으시단다. 미술관은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호텔로 돌아가 쉬었다가 나오면 되지 않겠냐고 명확하게 말해주면 좋으련만 근처 정류장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리는 엄마의 몸짓에 짜증이 울컥. 볕이 은은하게 내린 오랑주리 미술관의 오후의 수련만큼은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내가 왜 주기적으로 미술관에 가고 미술과 관련된 책을 사 모으는지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데. 약간의 분노를 삭이며 결국 호텔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물론 티켓 두 장은 허공에 날렸다.
오전 7시 30분부터 나가 오후 3시까지 쉬지 않고 돌아다녔으니 엄마와 함께하기에 과한 일정이긴 했다. 그래도 이대로 일정을 마무리하기엔 너무 아쉽다. 마음 같아선 혼자라도 나가고 싶은데 엄마만 호텔에 덩그러니 남겨둘 순 없고.
날이 좀 어두워지자 엄마를 깨워 재촉해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부지런히 걸어 도착한 곳은 바토 무슈 선착장이었다. 졸음과 사투를 하며 유람선에 탑승한 엄마를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보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먼 거리를 떠나와 이국의 거리를 걷고 있음에도 이국이란 자각이 없던 하루였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자 이제야 사유가 끼어든다. 떠나오면서 느낀 몇몇 감정은 핸드폰 메모장에 짤막하게 기록해 놓고 세느 강변에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페어 댄스를 추는 파리지앵들을 눈에 담았다.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의 모습은 저 건너편에 있지만, 내가 해야 하는 여행은 끔뻑거리는 엄마의 현재 눈꺼풀에 있었다.
* * *
어느덧 사흘째 아침. 꽤 오랜 시간 푹 잤다. 가뿐한 몸으로 채비를 마치고 오페라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손에 작은 마이크를 든 가이드와 이어폰을 꽂은 관광객 여럿이 다가왔다. 아마도 워킹 투어를 신청한 한국인들인 듯했다. 인터넷에서 투어 프로그램을 찾아보고 각자 신청해서 모인 것이라고 엄마에게 설명하자 혼자 다니는 네가 대단한 거란다. 그간 여행할 돈 아껴 저축하라던 엄마에게 아마도 거의 처음으로 들은 긍정의 말이었다.
점심은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서 중요한 장소로 나온 르 그랑 콜베르(Le grand colbert)로 예약해 놓았다. 프랑스 음식의 기본과도 같은 에스카르고와 어니언 수프, 소고기 요리를 시켜 맛있게 먹었다. 계산을 할 때 크리스 마틴을 닮은 점원이 파리가 처음이냐 물어 엄마가 파리에 처음 왔다 하자 그런 처음의 경험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냔다. 맞다. 대체 왜 점원이 계산을 하러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엄마에게 손님이 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하는 것이 경험일 테니까. 밥을 먹고 나오니 날이 쨍하게 맑고 덥다. 이럴 땐 예정했던 것처럼 마레 지구에서 쇼핑하는 대신 몽마르트르에 올라야 했다.
맑은 토요일 오후의 몽마르트르. 아베스역부터 사랑의 벽, 벽을 뚫는 남자 동상, 테르트르 광장 넘어 사크레쾨르 성당까지 관광객들이 많아 천천히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가 되어 가고 있는 남자아이, 와인을 마시는 테라스의 연인, 호객 행위를 하는 거리의 화가. 사크레쾨르 성당 내부를 구경하는 것보다 성당 앞 계단에서 파리 전경을 보는 것이 훨씬 즐거운 일이라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았다. 거리 연주하는 할아버지의 바이올린, 인증샷을 찍는 관광객들의 선글라스, 털털거리며 지나가는 꼬마 기차.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antabile.j
덕질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는 이곳, https://brunch.co.kr/@cantabile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