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여행] 엄마의 첫 유럽 여행은 파리! #2

엄마의 첫 유럽 여행은 파리! 1편 보기 


긴 일정은 아니지만 관광 명소 위주로 돌아다니는 거면 파리만 있기 아쉬울 수도 있을 것 같아 욕심을 내 주변국 당일치기 일정을 세웠다. 처음엔 룩셈부르크를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가 랜드마크가 확실한 곳이면서 내가 잘 아는 곳이라 시간을 최대한 단축할 수 있을 도시가 낫겠다 싶어 결국 런던으로 선회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 밤늦게 돌아오는, 말 그대로 “말이 돼?” 싶은 어메이징한 하루를 보낼 예정이다. 


도버 해협을 지나는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역에 다다랐다. 런던 대중교통은 컨택트리스 신용카드나 애플페이로 탑승이 가능했다. 두 시간 반 만에 또 다른 분위기의 도시에 도착한 것이 실감 났다. 돌아오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런던 도심을 관광할 수 있는 시간은 만 일곱 시간. 바로 웨스트민스터역으로 출발했다.

 

런던 입성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빅벤, 국회의사당, 런던 아이 그리고 템스강을 바로 마주할 수 있는 곳답게 역 출구로 나오자마자 발 디딜 곳 없이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지난 런던 여행 때는 보수 공사 때문에 볼 수 없었던 빅벤이 화려한 얼굴을 하고 있어 엄마보다 내가 더 반가워했다. 흐린 하늘 아래 금색의 빅벤과 빨간 이층 버스와 공중전화부스, 화려한 꽃들로 장식된 건물의 테라스. 엄마는 파리보다 런던이 도로도 넓고 사람들 느낌도 다르다며,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더니 그게 딱인 것 같다고 했다. 그 짧은 새에 파리와 런던을 비교도 하고,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는데 엄마도 엄마의 여행을 하고 있구나.


코벤트 가든과 피커딜리 서커스, 리젠트 스트리트를 지나 세인트 폴 대성당과 더 샤드, 그리고 타워 브리지까지 보고 세인트 판크라스역으로 돌아왔다. 런던이 가지고 있는 아기자기한 맛이나 자잘한 재미를 느낄 새는 없었지만, 이만하면 정말 알차게 돌아다녔다. 도시를 아는 힘이다.


세인트 폴 대성당


출국 수속을 밟고 들어오니 대합실이 앉을 자리 없이 빽빽하다. 파리행 유로스타가 줄줄이 탑승 지연이다. 이런 지연쯤은 익숙한 듯 가방에서 플레잉 카드를 꺼내 삼삼오오 앉아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 틈에 겨우 앉을 만한 바닥을 찾았다. 엄마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나는 언제 상황이 변할지 모르니 무거운 눈꺼풀을 지탱하며 있었다. 왜 지연이 됐는지 따지거나 한숨을 쉬는 사람들이 없다. 파리냐 런던이냐가 아닌, 이런 데에서 불쑥, 9천 킬로가 넘게 멀리 떠나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런던의 상징 빅벤과 빨간 이층버스


*   *   *


벌써 닷새째 아침, 떠나야 하는 날이 되었다. 그나마 밤 비행기라 캐리어를 호텔에 맡겨두고 일찍 나섰다. 이제는 익숙한 오페라역 앞 버스 정류장에 다다르자 그제 만난 한국인 투어 가이드를 다시 만났다. 매번 일정을 오페라 가르니에에서부터 시작하는가 보구나. 새로운 투어 손님들을 앞에 두고 마이크로 설명을 이어간다. 이 아름다운 풍경도 매일 같은 동선으로 매일 같은 설명을 하면 질릴까? 이번에도 우리와 같은 버스를 탄 여행자들은 그제와 똑같이 피라미드역에서 벨을 눌렀다. 누군가의 처음과 누군가의 일상이 함께 내렸다.


보주 광장을 지나서 도착한 곳은 메르시. 개인으로 여행 온 한국인들을 제일 많이 만날 수 있는 유명 편집숍이다. 작년에 무게 때문에 사지 못하고 침만 흘리고 나왔던 접시와 엄마가 쓸 수 있는 에코백을 하나 골랐다. 어디 가면 가격부터 보느라 기념품 하나 제대로 사지 못하는 엄마에게 유로 환율을 일부러 잘못 적은 금액을 말해주기까지 하며 못 이기는 척 하나를 고르게 할 수 있었다.


Merci 매장 ⓒmerci-merci.com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넘어온 미슐랭 원스타 ‘Substance’에서 눈이 즐겁고 위가 즐거운 점심을 먹은 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에펠탑까지 걸었다. 있는 동안 날이 제일 좋고 그만큼 가장 더운 날이었다. 늘 그렇듯 여행을 아쉽게 하는 건 떠나는 날 맞이하는 완벽한 날씨다.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낮의 에펠탑을 바라보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풍경을 눈에 담았다.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오페라역까지 바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 더위에도 에어컨을 안 틀어주는구나, 덥다, 하며 가는데 생라자르역 즈음 기사분이 불어로 어떤 설명을 했고, 그러자 몇몇 승객이 내리고 몇몇 승객은 그대로 남았다. 무슨 말이었지? 그래도 오페라역까지는 두세 정거장밖에 안 남았으니 괜찮을 거야 하고 가는데 갑자기 오페라 가르니에를 지나치더니 그대로 무정차를 계속하며 마레 지구까지 질주했다.


그제야 아차, 싶어 기사분께 다가가 상황을 물었더니 생드니로 간다고 알려주지 않았느냔다. “불어를 못해 몰랐어요. 사실 우리 오페라에서 내렸어야 해요” 그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잠시 생각하더니 그럼 8호선을 타면 되겠냐며 조금만 기다려 보란다. 그렇게 얼마를 더 가더니 버스를 멈추고 여기서 지하철 8호선을 탈 수 있다고, 목적지까지 잘 가라고 인사를 건넸다.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엄마를 챙겨 내렸다. 덕분에 파리에서 미아 안 되고 엄마 앞에서 멋지게 해결사까지 된 뒤 늦지 않게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누가 파리 사람 불친절하다고 했나. 파리는 언제나 내게 이런 모습이었다.



*   *   *


한국의 효율적인 입국 절차로 금방 짐을 찾아 주차된 차에 도착했다. 오후 다섯 시 반. 이제 다시 네 시간 가까이 운전하면 집에 도착한다. 공항 터미널을 빠져나와 인천대교를 건너는 순간, 하늘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잔잔하게 파도치는 서해 위로 작게 보이는 비행기도 그림 같다. 한국에 여행으로 도착해 공항버스를 막 타고 나오는 여행객이 이 풍경을 맞이하면 어떨까. 아마 영원으로 남을 색감이 되겠지. 


여행 잘 다녀왔다고 남동생과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던 엄마가 내가 옆에 듣고 있다는 걸 무심코 잊었나 보다.


“밥이랑은 맛있었어? 누나 성격상 웬만한 곳은 안 갔을 것 같은데?”


“음식이 다 찔끔찔끔 나와서 배가 하나도 안 차더라. 기내식으로 먹은 비빔밥이 제일 양에 찼어.”


“엄마, 배부른 음식보다 배고픈 음식이 더 비싸고 몸에 좋은 거야”


ⓒ신태진


남동생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구나, 가 감상의 전부였다. 엄마의 말에 화가 나지 않았다. 그랬구나, 그런 마음이었구나 싶었다. 배가 차지 않았다고 나한테 말할 수 없었을, 배가 고픈데 뭘 좀 더 먹어도 되겠냐고 하지 못했던 엄마의 고충을 생각했다. 혼자서 뭘 할 수 없는 낯선 상황에서 유일한 의지일 딸 눈치가 먼저였을 엄마에 대해. 아주 뒤늦게. 


엄마를 무척 위한 척했지만 사실 이번 일정 동안 내가 평소 파리를 여행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다녔다.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골목 걷고, 식사만큼은 비용을 투자해 잘 챙겨 먹고, 부지런히 사진 찍으며. 많은 걸 포기한 척했지만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고 이해만 바랐다는 걸 이제야 솔직히 인정한다. 엄마가 동행인일 때만 발현되는 이기심이 있다는 걸. 


장녀들이 으레 갖는 엄마를 향한 부채 의식으로 명절 연휴에 엄마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벌써 여럿 진행했는데 취기의 호기가 더해져 그 범위를 유럽까지 넓혔다. 엄마 모시고 다녀온 효녀 메달 획득 이상의 것들이 우리 사이에 남았기를. 그랬다면 이 여행은 성공일 테니까. 영원히 서로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을 모녀에게 한 가지 공통 경험이 추가 됐다.


중간에 휴게소 한 번 들르고 부지런히 달려 돌아왔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엄마를 먼저 내려주고 집에 도착했다. 캐리어를 풀기 전에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서 마셨다.


그 모든 감상에도 불구하고. 자, 그러니 일단 다음 파리는 혼자….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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