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겨울 플라스크, 광장의 봄

술 특집 #1



폴란드 바르샤바. 쇼핑센터 ‘Arkadia’ 2층 선물가게에서 플라스크를 하나 샀다. 원래는 바르샤바 외곽의 마을 Targówek에서 만난 폴란드아저씨들이 소개해 준 악기점을 찾아 간 것이었는데, 악기는 사지 못하고 “For Life’s Great Adventures”라는 문구가 음각으로 새겨진 동그란 플라스크만 사고 말았다. 불과 며칠 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남대문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Apraksin Dvor’시장에서 CCCP(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소비에트연방의 러시아어 약칭. 러시아 알파벳이며, “에스에스에스에르”라 읽는다)가 크게 프린트된 플라스크를 구입했지만, 러시아와 긴장관계에 있는 우크라이나로 넘어갈 예정이어서 하나 더 구입했다. 플라스크는 예전부터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비싸기도 하거니와 그에 비해 쓸 일은 많지 않아 사지 않고 있었다.


바르샤바에서 구입한 플라스크.


플라스크란 게 입구가 좁아 세척에 어려움이 있어 그 자체로 소독이 될 수밖에 없는 높은 도수의 술을 넣어 다녀야 한다. 한국에서 내 주머니 사정으로 살 수 있는 높은 도수의 술이라곤 고량주 정도다. 그렇다고 고량주를 플라스크에 넣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애초에 한국에서 플라스크를 품고 다니며 대낮부터 술을 홀짝대다가는 알코올중독으로 몰리기에 딱 좋다. 아무튼 그렇게 구입한 플라스크를 들고 숙소로 돌아와 깔때기를 꽂고 꼬냑을 채워 넣었다. 불투명한 플라스크라 술이 얼마나 찼는지 알 수가 없으니 조심스럽게 조금씩 따를 수밖에 없다. 쫄쫄거리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꼬냑의 향이 올라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성을 고려해서 산 작은 플라스크는 꼬냑 병의 양을 감당하지 못하고 넘쳐버린다. 하지만 그것도 그런대로 좋다. 병에 남은 술은 지금 마셔버리면 그만이니.


우크라이나 키에프의 드네프르강, 꽁꽁 언 강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


이번 여행에서는 거의 매일 꼬냑을 마셨다. 바로 지난달까지만 해도 꼬냑은 영화에서만 보던 술이었는데 장족의 발전이다. 여행이 아니더라도 술을 자주 마시지만, 여행을 가면 그냥 시도 때도 없이 마신다. 루틴을 벗어나 일상적이지 않은 장소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생활을 하는 것을 여행이라고 한다면, 술은 그 여행에 속히 빠져들게 하는 촉진제가 될 수 있다, 대충 이런 식으로 말하며 그냥 시도 때도 없이 마신다.


이른 아침부터 마시는 맥주의 알싸한 향과 대낮부터 horseradish(서양 고추냉이)가 들어간 보드카의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온기를 느끼면서 우크라이나 키에프를 걸었다. 여행의 순간임이 기분 좋게 인식되었다.


사실 여행 일정의 절반이 보드카의 종주국 러시아에 있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을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보드카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여행 계획을 얘기할 때 마다 지인들은 “러시아는 역시 보드카지”라는 하나마나한 얘기를 했고, 나조차 벽 한 면이 수십 가지 보드카로 가득 채워진 모스크바 마트 사진을 보고 흥분하여 반드시 1일 1보드카를 달성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마신 보드카는 생각보다 입맛에 맞지 않았고, 대신 우연히 마시게 된 꼬냑이 그 기대를 대신했다. 보드카는 무색, 무취, 무향의 술이며 스트레이트로 마시기보다는 다른 술이나 음료와 섞어 칵테일로 마시는 게 일반적이다. 그냥 마시기엔 밍밍하다는 거다. 하지만 꼬냑은 풍부한 향과 깊은 맛을 지닌 술이라 스트레이트로 마시기에 적당했다. 가격도 한 병에 만 원을 넘지 않으니 부담스럽지 않았다.


여행 중에 마셨던 꼬냑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종류.


꼬냑으로 가득 채운 플라스크를 지니고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한 일인 줄 몰랐다. 폴란드에서 플라스크를 구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로 넘어갔고, 몸에 한기가 들 때마다 플라스크를 꺼내 몸을 녹였다. 초콜릿 향이 번지는 듯하다 불현듯 명치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불타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8차선 도로를 막고 차가 다니지 못하게 한 키에프 독립광장 앞을 걸어 다닐 때에도 광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거리공연을 구경하면서 꼬냑을 마셨고, 1950년대 생산된 러시아제 Fed-2 카메라를 사러 ‘Andriivs'kyi descent’ 거리를 뒤지고 다니다가도 틈만 나면 플라스크를 꺼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에서는 꼬냑 한 병의 가격이 3, 4천 원 선이었다. 소주 2병 값에 꼬냑 한 병이라, 우크라이나에서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Andriivs'kyi descent 기념품 가게들의 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년, 끈질긴 설득과 현란한 말솜씨로 자신의 카메라를 내게 팔아먹는데 성공했다.


주말 키에프 독립광장앞 거리, 차를 통제한 8차선 도로를 산책하는 시민들.


키에프에서의 일정이 반을 넘어가던 날, 우크라이나의 대형마트 ‘Auchan’에서 눈썰매를 하나 샀다. 일정에 따라 점잖게 국립역사박물관에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앞마당에 들어섰으나 언덕에서 눈썰매 타는 아이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말았던 것이다. 아이들이 썰매를 타며 만들어놓은 썰매자국에 새로 산 썰매를 놓고, 눈밭을 헤치며 언덕 아래에 도착하면 온몸은 눈 범벅이 되었다. 언제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지, 입속에도 팥빙수 얼음가루 같이 곱게 갈린 눈이 한 가득이었다. 아이처럼 두세 번 썰매를 타고 내려오자 어른이 될 시간이었다. 플라스크를 꺼내 꼬냑 한 모금을 마셨다. 아파 오는 꼬리뼈를 치료하진 못했지만 확실히 몸은 따뜻해졌다.


우크라이나 국립역사박물관 앞마당.


여행의 끝. 인천행 비행기를 타려면 모스크바로 가야했다. 키에프에서 모스크바까지 이동 수단은 15시간이 걸리는 기차를 선택했다. 새벽 1시에 키에프 중앙역에서 기차에 올라 알 수 없는 글자로 가득한 티켓을 들고 묻고 물어 겨우 우리 자리를 찾아냈고, 15시간을 함께 보낼 옆자리 우크라이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의 도움으로 매트리스를 찾아내고 침대를 펴고 자리에 이불을 깔았다. 기차 안에 불이 꺼지며 조용해진 실내는 코고는 소리, 소곤거리는 소리로 작게 채워질 뿐이었다. 여행의 피곤보다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이 컸다. 2층 침대 아래 칸에 앉아 어제 밤 먹다 남은 치즈 한 조각과 귤보다는 오렌지 같았던 우크라이나 귤을 펼쳤다. 그리고 가만 플라스크의 뚜껑을 열었다. 어두운 차창 밖은 러시아의 눈 덮인 벌판이었을 것이다.


키에프에서 모스크바로 넘어가는 기차 안.


일상으로 복귀한 지 보름. 3월이 되었지만 아직도 겨울이다. 끝이 보이는 겨울을 참아내며 지난 주말, 나는 마지막 남은 꼬냑을 플라스크에 채웠다. 거리와 광장을 서성이며, 이것만 비우면 나의 겨울도 끝나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플라스크는 책장 어딘가에서 다음 여행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겠지. 봄은 그걸로도 좋으리라.






글/사진 김동재

어쿠스틱 밴드 '신나는섬'에서 리듬 기타, 우쿠렐레, 보컬을 맡고 있지만, 전공은 탬버린과 숟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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