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공유되는 여행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예상치 못한 무덤덤함을 마주해야 했다.


3년을 꿈꾸고, 1년을 휴학해, 6개월 간 돈을 벌어 떠난 유럽 여행이었다. 인생 전체로 놓고 보면 결코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20대에게 그 시간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만큼 이 여행에 대해 막연한 기대도 있었고 내 인생에서 전환점이 되길 바라기도 했다. 매 순간 꿈 같고 행복한 여행이 되길 기대하기도 했고. 하지만 출국 비행기에 오른 내 감정은 낯설었다. 기대했던 만큼의 설렘과 가슴 떨림 없는, 나는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이 이상한 감정은 나를 지배했다. 그렇게 보고 싶던 런던의 야경 한가운데를 거닐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결핍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랫동안 꿈꿔온 여행이 내가 바라던 모습과는 다르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여행이 끝나는 순간까지 내게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 같았다. 급기야 합리화, 자기최면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꿈에 그리던 유럽 여행 중이고, 매 순간 행복하고 즐겁다.” 어느 순간 나를 속이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속일 순 없었다. 많은 청춘들이 다녀와 오래토록 추억으로 품고 사는 유럽이 내게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일상의 무감함과 지루함이 여행 중에도 찾아왔다. 다음 여행지를 떠올려도 설레지 않았다. 이 원인 모를 불감증을 치료해야 내 여행이 제 궤도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SNS에 사진을 올려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치료는 생각보다 작은 순간에 이루어졌다. 스위스 체르마트에 가던 날, 나를 포함해 동행 넷이 일정을 함께 했다. 전망대에서 마테호른의 웅장한 모습에 감탄한 뒤, 리펠제 호수로 내려갔다. 리펠제 호수는 날씨가 좋으면 마테호른이 온전히 비친 모습, 일명 ‘마테호른 반영샷’을 찍을 수 있는 곳이다. 여행자들 사이에선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미심쩍은 마음으로 호수로 걸어 내려갔다. 


마침내 호수에 도착했을 때, 경이로운 광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마테호른의 장엄한 모습이 데칼코마니처럼 위아래로 비추어지고 있었다. 유럽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가장 보고 싶었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니, 동행과 입을 벌린 채 벅찬 마음을 나누었다. 과연 이 날까지 열심히 경비를 모으고 계획해 온 보람이 있구나, 하면서.



그 순간, 내 여행을 내내 따라다니던 ‘불감증’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홀로 여행을 하면서, 새롭고 멋진 것들을 보면서, 입 밖으로 내 감상을 뱉어낼 일이 없었다. 다시 말해, 그 감상을 공유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공유되지 못한 감정들은 내 안에서 식었다. 그 식어가는 과정이 나로 하여금 결핍감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우리가 여행에서 마주하는 순간들은 낯설고 새로운 것투성이다. 각기 다른 색깔과 무늬를 가졌다. 그렇기에 각자가 가진 하나의 색깔로 그 모든 것을 담아내기란 역부족이다. 그래서 그걸 공유하는 것, 서로에게 ‘공유되는 여행’이 중요한 것이다. 같은 영화나 책이라도 사람은 저마다 다르게 느끼고 생각한다. 하물며 여행은 우리의 모든 감각이 동원되는, 그야말로 몸으로 부딪히는 체험이다. 그 버거우리만치 거대한 감상을 공유하여 자기 안에 채울 때, 여행의 풍요로움은 몇 갑절이 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혼자 온 여행이니, 혼자 여행해야 한다”라는, 이상한 자존심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동행을 구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체르마트를 다녀온 후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 노력했다.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 여행하며 느낀 수많은 감정들로 나의 여정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그래서 여행을 돌이켰을 때 그 수많은 이야기가 함께 떠오를, 기억의 모음집을 만들고 싶었다.


여행이라고 매 순간 즐겁고 짜릿한 일들만 있을 순 없음을 인정했다. 하이라이트가 아닌, 소소하고 자그마한 순간도 있는 그대로의 내 여행이라고 받아들이려 했다. 그렇게 불감증을 점점 지워낼 수 있었다. 내 여행을 빛나게 만들어준 건 유럽 각지의 랜드마크가 아니었다. 바로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이었다. 홀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사람은 결국 사람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때로는 낙타와.


그렇게 여행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나는 여전히 ‘공유되는 여행’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전에는 민망한 일이었지만, 이젠 가족, 친구들과 내 이야기를 더욱 깊고 진솔하게 나누게 되었다. 좋은 기회를 얻어 여행 토크 콘서트에서 나의 경험을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또, 이 경험을 디딤돌 삼아 새로운 대외활동에도 도전해, 다채로운 한 해를 보낼 예정이다. 그렇게 돌아온 일상에서도, 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그런 ‘새로운 여행’을 매 순간 떠나는 중이다. 가끔 유럽이 그립기도 하지만, 이곳에서의 여행도 적잖이 행복하고 설렌다.


여행을 시작하며 찾아온 무기력한 감정에 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면,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았다면, 나의 유럽 여행은 공허하고 단조로운 채 그저 즐거워 보이는 SNS의 여행 사진으로 그쳤을 것이다. 물론 정답인 여행은 없고, 각자가 여행하는 이유도 다르다. 그래서 여행을 더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도 각자의 안에 있는 것 같다. 나는 고민 끝에 ‘공유되는 여행’이라는 가치를 발견했다. 당신에게 있어 당신의 여행을 더 낫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혹여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다면,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다는 데서 더 나은 여행의 힌트를 찾았으면 좋겠다.





글/사진 고민석

낯선 땅 위에서 배우고 익히는 여행자가 되고 싶은 고민석입니다.
https://www.instagram.com/kk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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