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으로 가는 길목]점심시간, 그 여백의 미를 찾아

동으로 가는 길목 #5



“Choi~  우리 지금 점심하러 나가는 데 같이 안 갈래?”

“지금 11시반인데? 아직 배가 안고프네. 너희들끼리 다녀와.”


오늘도 어김없이 점심시간이 돌아왔고, 팀원과 매니저들이 이 외로운 동양인을 역시나 챙겨주고 있다.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땐 동료들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 특별히 약속이 없으면 대여섯 명의 남녀동료들과 함께 이곳저곳 브라티슬라바 다운타운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한국에서 상상했던 이국적이고 여유로운 유럽 직장생활, 바로 그 모습이었다.


이 얼마나 좋은 그림인가.


점심메뉴가 고민된다면 쇼핑몰을 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슬로바키아 최대 쇼핑몰은 eurovea의 푸드코트


하지만……, 이젠…… 조금 지쳤다.


특별히 서로 할 말도 없고, 나 때문에 영어를 해야 하는 다른 친구들도 답답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하루 중 유일하게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런치타임을 이렇게 날려버리는 것도 못내 아쉽다는 생각도 드는 요즘이다.


그래서 요즘 점심은 혼밥이다. 매일 점심시간이 되면 여행자의 마음으로 구글맵을 보면서 반경 1킬로미터 이내의 식당을 하나씩 찾아다니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인구 백만 명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의 수도이지만, 그래도 점심시간이면 항상 줄을 서야 한다. 베트남,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식당은 물론이고, 패스트푸드, 퓨전 레스토랑, 슬로바키아 스타일 식당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아직 시내에 한국식당이 없다는 것이다. 식사를 하다 보면 ‘김치’, ‘불고기’라고 하는 현지인들의 대화 내용이 심심치 않게 들리곤 하는데 말이다. 이러다, 중국인이 어설픈(?) 한국식당을 차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스시를 팔지 않는 일본식당 KOSHIDA. 두명의 일본인 오너쉐프 사장이 주방을 지키고 있다.
저녁시간에는 마치 영화 ‘심야식당’의 느낌이 난다.


12:10분 정도 되니 허기가 진다. 아침을 샐러드와 비타민으로 해결하는지라 점심시간은 항상 즐겁다. 오늘의 목적지는 코시다KOSHIDA라고 하는 일본 가정식 식당이다. 최근 1년간 일본 가정식 메뉴로 오픈한 일본 식당이 세 곳이나 된다. 모두 일본인이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이곳은 스시를 팔지 않는다. 가라아게 정식, 된장 고등어 정식, 유부우동처럼 집에서 먹을 법한 메뉴를 판다. 한국으로 치면 백반 집 같은 느낌이다. 주방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일본인 사장과 매니저. 안으로 들어가니 빈자리가 없어 보인다.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인근 로펌 사무실에서 일하는 한국인 변호사가 슬로바키아 동료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다. 간단하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한 후, 마침 딱 한자리 남은 바 테이블에 앉았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모바일로 뉴스를 보면서 짧지만 달콤한 나만의 시간에 빠져든다.


보통 메뉴 가격은 10유로 남짓하니 현지인들에게는 식사를 두 번 할 수 있는 돈이다. 그래도 한국과 일본음식에 대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라 기꺼이 지불하는 편이다.


다운타운 주택가 모퉁에 자리 잡은 수제 햄버거 집. 1만 원짜리 햄버거 세트.
역시 점심시간에는 사무실 키와 자동차 키를 들고 다녀야 왠지 런치타임스러운 느낌이 난다.


사실 도심에서 점심을 먹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한편의 영화 같은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처음 슬로바키아에 와서 10년 가까이 경험한 점심식사는 단체급식 같은 느낌이었다. 한국공장들이 밀집해 있는 갈란타, 트르나바의 한국생산법인에서 일을 했는데, 회사는 한국 민박집과 일정기간 계약을 하고 식사를 제공받는다. 음식 걱정은 전혀 없다. 매일매일 한국식으로 다양한 점심 메뉴를 즐길 수 있고, 복날이 되면 삼계탕, 주방장이 바뀌면 주방장 특선 양념갈비 등 한국보다 더 풍요로운 점심이었다. 입맛이 없다면 라면도 끓여주고, 계란 프라이도 부쳐주었다. 음식으로만 따지면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상낙원이다.


시간이 흘러, 지겨움이 찾아왔다. 다른 건 모르겠고, 점심시간만이라도 공장이 눈에 띄지 않았으면 했다. 도심 속 클래식이 흐르는 모던 한 레스토랑에서 자동차 키와 함께 묶여 있는 사무실 열쇠와 지갑을 손에 들고 우아하게 점심을 즐기고 싶었다. 외국인 동료와 식사를 하며 나누는 자연스러운 대화는 분명 영화의 한 장면일 거라는 상상도 했다.


개성 있는 채식 레스토랑 Made with Laf. 심플하고 담백한 요리가 일품이다.


이 생활이 언제까지 일지 모르지만, 오늘도 귀에 이어폰을 꼽고 수백 년이 된 건물 사이사이에 새로 오픈한 가게를 찾아 나선다.





글/사진 최동섭

슬로바키아 14년차로 삼성전자 슬로바키아 법인에서 9년 근무 후 독립했다. 현재 슬로바키아에서 CDS Korea라는 기계설비무역 및 여행코디네이터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동유럽/일본/한국에 자신만의 놀이터를 하나씩 만드는 게 목표.

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