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없이 시작한 빵 일기][베이킹에세이] 마녀 배달부 키키한테 한 걸음 다가가기까지

2023-12-12

겁 없이 시작한 빵 일기 #2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주인공 키키는 열세 살의 나이에 독립하여 검은 고양이 지지와 낯선 도시에서 수련 기간을 보낸다. 어린 시절, 홀로 길을 떠난 키키를 동경과 불안 섞인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녀가 어느 베이커리의 일을 거들며 가게 위층 다락방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이커리 주인이 악역일 리 없으니까. 아침에 빵을 굽는 주인아저씨, 카운터를 보는 주인아주머니, 그런 주인아주머니의 일을 거들며 노릇노릇 구워진 식빵을 진열하고 배달하는 키키.


12a3b2913d04e.png베이커리에 정착한 마녀 배달부 키키 ⓒ지브리스튜디오


그 포근함이 처음 빵을 구운 그날부터 점점 반갑고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열어본 먼지 쌓인 상자에서 잊고 있었던 물건을 발견한 것처럼.


30대가 다 지나도록 지독히도 대중성 없는 음악을 하며 포기했던 일생일대의 간절한 소망, ‘좋아하는 일을 직업 삼아 살기’를 이룰 기회는 아주 사소한 계기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느 때와 같이 친구가 몇 없는 딸과 평일 데이트를 해 주시던 엄마에게 현생에 치여 일과 사람에 대한 불평불만을 잔뜩 늘어놓은 뒤 “언젠가는 작은 빵집을 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덧붙였다.


엄마는 나도 모르게 흘린 말을 웃어넘기지 않으시고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제안하셨다. 그 한마디에 스위치가 켜진 듯 막연한 꿈을 뒤덮고 있던 안개가 빠르게 걷히기 시작한 것이다. 키키의 베이커리는 더 이상 내가 닿을 수 없는 가상의 세계가 아니었고, 백발 할머니가 되어도 오븐 열기 아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빵을 보고 뿌듯해할 나의 모습도 자연스레 그려졌다.


4d2576e323a51.jpg키키를 만난 지 20여 년,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며


하지만 공대생에서 영어 과외, 학원 강사, 밴드맨, 공공기관 종사자, 서비스업 자영업자, 티셔츠 제작‧판매자로 다소 일관성 없는 부업과 직업을 거쳐 온, 베이커리는커녕 요식업 알바 경험조차 전무한 사람에게는 꽤나 대담한 방향 전환이었다. 사람마다 소심함의 총량이 있다면 평상시 할당량을 넘치도록 채워버려서일까? 아니면 어릴 적부터 내 안에 살고 있는 키키의 목소리였을까? 의외로 결정적인 순간에는 ‘안 하고 후회할 바에는 해 보고 후회하자’며 과감하게 사고를 치는 나답게 이번에도 저질러 보기로 했다. 저지르기로 한 이상 크게, 제대로, 베이킹을 배우려면 본토로 가서.


샌프란시스코를 바로 떠올린 것은 천연발효빵 사워도우의 본토이자 내가 사워도우를 처음 만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유년기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내고 예멘과 한국을 거쳐 미국에 살게 되었을 때, 홀로 수련 길에 올랐던 키키와 같은 열세 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나는 겁 많고 낯가림 심한 울보였다.


수많은 이사와 전학에 익숙해지는 일 없이 갑자기 낯선 땅에 끌려올 때면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처럼 하늘의 비행기를 보고 ‘저 좀 데려가 주세요’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곤 했다. 그러나 퉁명스럽게만 느껴졌던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따끈한 클램차우더와 말랑하고 쫀득하면서 새콤한 사워도우는 나의 마음을 서서히 녹여주었고, 새로운 도시에도 점차 녹아들 수 있게 되었다.


867bbd290c5e6.jpg낯선 도시에서 우울했던 열세 살의 나


이후 힘들게 적응한 미국을 떠나 다시 일본에 살던 때도, 대학교 진학을 위해 한국에 돌아와서도, 나를 위로해 주었던 맛을 다시 찾을 수 없었고, 그 맛의 재현을 목표로 시작된 나의 본격적인 베이킹 여정에서 사워도우의 본토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학은 필연적 선택이었다.


그렇게 큰 설렘과 아주 큰 불안을 안고 다시 찾은 샌프란시스코는 화해하지 못한 채 왕래가 끊겼던 서먹한 친구처럼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지난주 화요일에 뭘 했는지는 기억을 못하면서 그 옛날 첫 등교 전날 밤과 아침 등굣길은 왜 아직도 기온과 냄새까지 생생한지.


c198840c85a53.jpg추억의 그 맛, 클램차우더와 사워도우를 꽤나 성공적으로 재현


유학을 결정하고 출발하는 날까지 ‘니는 안 무섭나, 내가 다 무섭다’던 남편의 말에도 ‘말도 통하고 이제 어른인데 뭐가 무섭냐’며 애써 마음 한쪽으로 밀어 넣어뒀던 두려움이 낯선 숙소에 홀로 눕자 슬슬 고개를 들었다. 스스로에게도 계속 아닌 척했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겁쟁이에 소심한 걱정덩어리인 나는 뱃속에 불편한 돌덩이를 품고 강의 첫날을 맞았다.


아직 해가 뜰 기미 없이 깜깜한 아침, 긴장에 차가워진 양손을 꽉 쥐고 학교에 들어섰는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예전처럼 심장은 쿵쾅쿵쾅 울려댔지만 그때처럼 모두의 눈을 피해 강의실 구석에 숨지 않았고, 예전처럼 입이 바싹 말랐지만 그때처럼 얼어붙어 한마디도 할 수 없지는 않았다. 씩씩한 척할 수 있는 겁쟁이로 진화한 것이다. 키키도 속으로는 무서웠을까. 그녀의 세 배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동경하던 키키에게 한 걸음 다가간 듯했다. 앞으로 2주, 생각보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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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조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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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코어 밴드 '노이지'와 '데이오브모닝'의 베이스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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