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만담]내 영혼의 트롤

무덤 만담 #5



언뜻 보니, 헨릭 입센의 옛집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인 것 같았다. 문고리를 잡고 흔들어 봐야 판명날 일이지만 날이 추워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싶지 않았다. 각박하게 짧은 해에 왕궁, 카를 요한Karl Johans 거리, 그룬네르뢰카Grunerlokka를 거쳐 입센의 묘지까지 걸으려니 마음이 급하기도 했다. 조상 묏자리도 분간 못하면서 빈번하게 남의 묘지나 찾아다니고, 집 떠나 봤자 뭐 뾰족한 하루 계산이 없다.


그룬네르뢰카에 있는 예술학교의 공연 포스터


꿈에 만나도 말 한 마디 못 나눌 외국인들의 무덤을 찾아 기차도 타고 버스도 타고 했더랬다. 내 나름 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지만, 너무 거창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누굴 만나도 잘 먹히질 않았다. 내가 찾아가는 무덤의 주인들은 다들 고인이 되고 나서야 작품으로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내게는 그 인생 자체가 작품일 수밖에 없었다. 지구상의 공간을 점유하고 실존하던 인간이란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안다는 수준이 그 옛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루시’도 한때 생명이었다는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무덤을 찾아와 육체가 지상에 남긴 최후의 흔적, 막 숨이 진 육체가 안장되던 순간을 되짚다 보면 그가 나와 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약간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인생만 봐서는 실감할 수 없었을 ‘인간의 위대한 삶’이 정말로 실재했구나, 그러다 보면 나의 마지막도 느닷없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삶은 온갖 순간적이고 쾌락적인 장치들로 삶이 영원히 지속될 듯, 나의 가족, 심지어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음조차 믿을 수 없을 만치 허황된 일로 여기게끔 만들었지만, 위대한 인간의 묘비 앞에 서면 죽음만이 명백하고 삶은 허망, 허상이었다.



"우리는 완전히 자유예요."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시리아. 어디에서 왔든 모두가 노르웨이 사람입니다. 소녀를 사랑하는 소녀, 소년을 사랑하는 소년 모두가 노르웨이 사람입니다. 야훼를 믿는 사람, 알라를 믿는 사람, 신을 믿지 않는 사람 모두가 노르웨이 사람입니다.”


올해 나이 여든이 된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가 작년 가을 자신의 집 앞마당을 밟고 있는 천여 명의 사람들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이런 국가라면 애국자로 늙는다는 게 그리 추하지 않을 지도 몰라, 잠시 그런 생각도 했었다. 21세기까지 왕을 해먹는 집안이라니 위세 좀 보게나 싶겠지만, 이 왕궁에 살게 된 지 고작 3대째다. 18세기 노르웨이 왕은 덴마크에 있었고, 1814년 나폴레옹 군에 부역하던 덴마크와 싸워 이긴 스웨덴이 전리품으로 노르웨이를 할양받자 노르웨이에서 빚어지는 모든 일은 오슬로가 아니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결정되었다.


노르웨이 왕궁


1884년 자유당의 지도자 스베르드럽이 의회 다수를 확보하며 노르웨이 책임 정부를 수립했지만, 자주권은 늘 국경 밖의 문제였다. 민족주의자들과 진보 정치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헨릭 입센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스칸디나비아를 넘어 유럽에서 가장 존경 받는 작가 헨릭 입센이 노르웨이 독립에 한 마디 보태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입센은 왕궁 정원을 거쳐 카를 요한 거리로 이어지는 산책을 나서거나, 늘 가는 Grand Cafe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독일 맥주를 마셨다.


“나는 혁명에 찬성합니다. 다만 당신들의 혁명이 한 개인의 자유, 모든 인간들의 정신적인 자유를 위한 혁명이라면 말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혁명이 정치적 혁명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스웨덴은 노르웨이를 간섭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정치적 혁명이라는 것은 왕의 국적이 바뀌거나, 지배하는 무리가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정치 싸움은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그 역시 바이킹의 역사, 노르웨이 민족, 웅장한 자연을 담아 보고자 편력하던 때가 있었다. <브란>, <페르귄트>가 그 일단락이었다. 그러나 1876년 2월 24일 노르웨이 역사상 가장 제작비를 많이 들였던 공연 <페르귄트> 개막에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그의 음악을 싫어해서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노르웨이 정신이란 게 있기나 한지, 국가란 게 찬양할 만한 것인지, 작품에 담으려 했던 모든 생각들이 불명확해졌던 까닭이다. 내가 쓴 모든 것이 나태한 국민들과 부패한 정치가들에게 큰 세상을 바라볼 필요 없이 자발적으로 노르웨이 땅 안에 고립되어 살아가라고 독려한 것은 아니었을까?


헨릭 입센의 두상


3년 뒤 1879년, 입센은 이탈리아 아말피 해변에 머물며 그의 대표작 <인형의 집>을 탈고했다. <인형의 집>은 남편의 사랑스런 인형, ‘귀여운 종달새’ 노라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남편이 사랑한 것은 자신의 지위와 체면이지 노라 자신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집을 나간다는 내용의 희곡이다.


“우리는 완전한 자유예요.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고, 남에게선 아무 도움도 받지 않을 거예요.”


이 작품이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작품을 비판하고 거부하던 사람들이 내세우던 근거들이 하나둘 허위로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언론과 학자들은 일제히 노라의 과격한 가출을 비난했고, 노라 역을 맡은 배우가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는 연기를 할 수 없다며 그 부분을 수정해주길 요구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거부의 역사는 채 10년을 가지 못했다.


“아이들을 키우기 전에 먼저 나 자신부터 가르쳐야 해. 나 자신과 세상을 알기 위해 완전히 홀로 서야 해.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의무만큼이나 나 자신에 대한 의무도 있어.”


노라의 말은 도덕적으로 너무나 해로워 관객들이 용납할 수 없을 거라는 평론가들의 장담과 달리 불과 몇 개월 만에 가장 도덕적이고 매력적인 여성의 외침이 되어 갔다.


저 교회 뒤가 오슬로에서 공연장이 가장 많은 그룬네르뢰카 지역이다.



“망치로 치고 또 쳐라, 생명의 등불이 가라앉을 때까지. 희망도 아닌, 여명도 아닌.”



쉬지 않고 네 시간을 서성이다 도착한 입센의 묘비에는 망치 하나가 음각으로 그려져 있을 뿐 아무런 헌사가 붙어 있질 않았다. 망치라, 그 먼 빙판길을 돌아 돌아 망치라. 무덤을 나와 다시 20분을 걸어 그룬네르뢰카로 되돌아가 문 앞에 공연 시간표가 적힌 카페로 들어갔다.


‘오늘은 종일 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선 갈등하고 투쟁하고 패배에 괴로워하는 전투가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입센에 관한 이것저것을 검색했고, 어렵사리, 무덤에 새겨진 그림이 토르의 망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센은 나태하거나 거만하거나 극심한 절망에 빠져 한 줄도 쓸 수 없게 될 때마다 자신의 영혼에 트롤이 산다고 생각했다. “산다는 건 마음과 영혼에 자리 잡은 트롤과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시를 쓴다는 건 나 자신에게 마지막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죽어서도 트롤과의 싸움을 멈출 수 없었는지 그는 묘비에다 트롤을 때려잡던 토르의 망치를 새겨 넣었다.


“망치로 치고 또 쳐라, 생명의 등불이 가라앉을 때까지. 희망도 아닌, 여명도 아닌.”


오슬로 밤 풍경


<페르귄트> 이후 그의 작품에는 국민도 민족도 아닌 하나의 목숨들이 내는 목소리들이 담겼다. 소녀는 소녀를 사랑하기 위해, 소년은 소년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 완력과 싸워야 했고, 국적과 종교에 상관없이 그저 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눈앞에 보이는 실패 속으로 외롭고 처참하게 걸어 들어가야 했다.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정치적 타협으로 보장받을 샛길이 인간을 사랑하려는 인간이 택할 길일 수는 없었다.


“이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된 건, 모든 사람들은 국가, 민족, 이념이 아닌 자기 자신이 내건 깃발을 뱃머리에 달고 항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후 여섯 시. 벤조, 기타, 콘트라베이스를 든 밴드의 연주가 시작될 즈음, 나는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내 손에 들린 망치는 얼마나 무르기에 이토록 더딘 인생 흥얼거리기만 하는 걸까, 내 영혼의 트롤은 널찍한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 유튜브나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런 국가라면 10년쯤 애국자로 살아봐도 좋을 텐데, 이름 난 장수의 선단을 선망해 보기도 했지만, 가벼운 망치나마 근근이 들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 작은 쪽배에 내 이름 적힌 깃발 한 장 돛대에 내걸고서 세상 떠다닐 날도 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글/사진(1-3, 5-7)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 『도쿄적 일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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