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을 걷는 건축가][인문] 삶의 콜라주, 로리웨이

런던을 걷는 건축가 #2



애착과 의인화. 어떤 대상에 대한 친밀감을 자신의 정서적 반응과 동일시하는 사고. 나는 습관적으로 도시와 건물, 혹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크고 작은 무생물들을 나와 소통하거나 나를 대변하는 존재로 은유하곤 한다. 특히 건물은 알아가고 그 사연을 들여다보면 늘 반전이 있는 것이 꼭 사람을 알아가는 것과 닮았다. 어떤 군집에서나 단연 돋보이는 누군가가 있는가 하면 한 쪽 구석에서 소외되어 빛을 발하지 못하는 존재도 있기 마련이다. 특히 한 때는 찬란했던 누군가가 지금은 소외당하고 있거나 그 사연이 왜곡되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 이면의 상처가 무엇이든 연민의 호기심이 생기게 된다.


나에게는 브루탈리즘Brutalism 건축물들이 그렇다. 런던에서 지내는 시간이 쌓이다보니 애써 눈길을 주려고 하지 않아도 자꾸 관심을 끄는 건물들이 하나둘씩 생겨난다. 대체 저항할 수 없게 된 대상은 템스 강변에서 볼 수 있는 런던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결정하는 랜드마크들이 아닌, 바로 브루탈리즘 건축물의 잔재들이다. 별다른 생각이 없이 골똘히 길을 걷다가 골목길로 우연히 눈길을 주었을 때 그 골목의 끝에 내가 예상하지 못한, 마치 한창 때가 지났음에도 그 존재감을 숨길 방법이 없는 여전한 장엄함으로 이 도시 곳곳에 육중하게 자리 잡고 있는 날 것의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들 말이다.
그 저항할 수 없는 끌림 때문에 나는 런던의 브루탈리즘 건축물들을 찾아 하나씩 기록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브루탈리즘 건축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반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안하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두 차례의 전쟁을 겪은 이후, 디자인 면에서는 더욱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방향을, 이념적인 면에서는 유토피아 구현을 지향하면서 건물의 기능과 재료의 물성, 그리고 구조체의 기하학을 너무나도 정직하게 표현하여 한편으로는 투박하고도 거칠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브루탈리즘 건축물의 미학이었다. 하지만 엄격한 기하학을 기반으로 구현된 브루탈리즘 건축물도 시간이 지나 주재료로 사용된 노출 콘크리트가 노후함에 따라 대중에게는 말 그대로 조악하고 폭력적이며 황폐화된 인공구조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런 탓에 브루탈리즘 건축물들은 종종 미래도시의 차가운 이미지나 우범지역의 어두운 단면, 저소득층민들의 각박한 삶의 단편을 반영하는 영화의 배경지로도 자주 선정되곤 한다. 더 위협적인 환경으로 보이기 위해 콘크리트에 그래피티Graffiti를 그리는 등의 효과까지 가미할 정도다. 어떻게 보면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그런 해석 자체가 브루탈리즘 건축물을 콘크리트 괴물처럼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막상 그곳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말이다.




알렉산드라 앤 아인스워드 주거단지Alexandra and Ainsworth Estate의 로리웨이Rowley Way는 1968년도에 영국의 건축가 니브 브라운Neave Brown이 설계하여 1978년에 준공된 런던 캠든Camden 지역의 주거단지이다. 축구장 12개를 합한 대지 규모, 단지의 초입부터 그 맞은 편 끝까지 약 450미터 길이에 달하는 선형배치의 공간구조, 그 안에 총 520가구, 16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효율성. 주거단지의 북쪽으로 지나가는 철로의 소란스러움을 등지고 하나같이 남향으로 배치된 모든 세대들이 층층이 테라스 하우스 같은 모습이다. 지구라트Ziggurat를 꼭 닮았다. 단지는 놀이터, 학교, 커뮤니티 센터, 청소년 클럽, 주차시설, 가든, 지역난방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편의시설들을 갖추고 있어 마치 이곳에서의 생활을 주거단지 경계 안으로 무한정 수렴하도록 의도한 느낌을 받는다.


로리웨이는 기존에 도시의 조직을 구성하던 박공지붕과 갖가지 톤의 벽돌로 지어진 빅토리안 하우스의 장식적 요철을 배제한 채, 그와는 차별화된 브루탈리즘 건축양식과 모더니즘의 유토피아를 온몸으로 구현하는 느낌이다. 지금은 마치 폐허처럼 노출 콘크리트 표면에 검버섯이 얼룩져 있지만, 아마도 최초엔 매끈한 백색의 콘크리트 면이었으리라. 그때의 모습을 회상하는 누군가는 그리스의 하얀 집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알카트라즈Alcatraz를 닮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진 © Martin Charles


지난 20년간 여러 사람들이 거쳐 갔을 로리웨이에는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각자의 취향대로 테라스를 꾸미고, 서로 다른 문양의 장식 펜스가 들어서고, 벽을 따라 흐드러지는 식재들이 심어지면서 로리웨이는 조금씩 사람들의 일상을 담는 골목으로 진화했다. 노출 콘크리트는 모노톤의 도화지 같은 역할, 붉은 벽돌로 포장된 골목은 동네 아이들의 아늑한 놀이공간이 됐다. 창밖으로 모든 것이 내다보이니 안전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골목을 오가는 이웃들이 늘 마주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안부를 주고받는 친근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테라스하우스를 구현하면서 건물의 배면은 아스날 경기장Arsenal Stadium 스탠드 하부공간처럼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각박한 얼굴을 갖게 되었다. 보행로와 차로를 분리하여 골목길은 안전해졌지만, 지하로 배치된 주차공간은 자연광이 부족해 길을 잃기 쉬운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실험정신으로 지어진 브루탈리즘 건축물들은 곧잘 시험대에 오르거나 왜곡된 시선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 이에 로리웨이 주민들은 이곳에서 사는 이야기를 주민참여형 다큐멘터리에 있는 그대로 풀어보기로 한다. 바로 「One below the queen: Rowley way speaks for itself」.



다큐멘터리의 주민 인터뷰 중, 로리웨이에 대해 “거대한 콘크리트 악어를 닮았다.”는 묘사가 이곳에 도착해서 느꼈던 기분을 그대로 설명해주는 듯하다. 누군가는 좋은 인상을,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인상을 받은 듯 이야기하지만 분명 그 안에는 일상의 단편이 전부 담겨 있다. 현재진행형인 삶에 필요한 소소한 것들, 즉 반려견의 분비물 처리에 대한 것, 설치류 퇴치 방안에 대한 것, 진한 갈색 타일의 촌스러움에 대한 것, 식재들의 산만한 머리숱을 솎아주는 것, 건물 유지관리를 위한 주민협동조합 운영에 대한 것 말이다. 건물의 설계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건물이 삶을 컨트롤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건물에 반응하는 방향대로 삶이 꾸려지는 것이 지극히 옳다.


건물의 설계의도와 거주자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양상엔 늘 간극이 존재한다. 건물 계획단계에서부터 실제 운영단계의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건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람을 알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차가운 노출 콘크리트 표면에 목재 거푸집이 남겨둔 나무의 나이테 패턴이 햇빛에 살며시 드러나 따듯한 촉감으로 다가오는 그런 과정과 같이 말이다. 로리웨이의 자화상은 결국 그 안에 어떤 유토피아의 기능을 담으려는 의도를 벗어난, 그 장소에 시간이 거듭되며 쌓인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매만져진 콜라주Collage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한 아이가 인터뷰에서 로리웨이에 남긴 다음과 같은 찬사가 다큐멘터리의 타이틀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모든 것이 거기에 들어있을 거예요. 여왕만 빼고 어떤 거대한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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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below the queen : Rowley way speaks for itself (37:47) © digital:works




글/사진(1-2, 4-8) 현소영

도시와 건축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크고 작은 해프닝을 탐닉하는 삼인칭 관찰자. 한껏 게으른 몸뚱이를 간발의 차이로 이긴 호기심으로 매일 아침 겨우 눈을 뜰 기력을 유지하고 있는 최소주의. 좀머 씨처럼 등속도를 유지하며 런던을 골똘히 누비고 다니는 뚜벅이 외국인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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