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처, K-POP 댄스의 나라 대한민국은 국토 면적과 인구에 비해 상당히 많은 전통춤을 보유하고 있다. 궁중, 교방, 사찰, 민간, 팔도강산 전역에 전해 내려오는 춤들을 찾아가 보았다. 명인을 만나 이야기 나누고, 연습에 참여하고, 공연도 함께하며, 20세기 이후 전통춤이 어떤 변화를 겪어 왔고 이토록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춤을 추는 여행을 마치고 이제 춤을 읽는 여행을 떠나 본다. |
활기와 다양성의 도시 부산. 바다와 낮은 산들이 어우러진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환경, 각지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들고 나는 복잡다단한 도시. 사투리에 담겨진 내용이 사실 친절과 환대임을 알면서도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사람들. 이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부산의 정서는 동래학춤, 동래고무, 동래한량무, 동래입춤, 야류와 지신밟기, 별신굿, 이 지역 춤에서도 느껴진다. 부산은 영남춤의 풍부한 자산이 모여 있는 곳이다.
내가 가장 자주 접했던 부산의 춤은 청화당 김온경 선생이 전승해온 춤들이다. 선생께서 서울에 공연을 오실 때마다 보러 갔고, 특강이 있을 때 참여해서 춤을 배우기도 했다. 선생께 집중적으로 배운 제자는 아니지만, 긴 세월 느슨하게 조금씩 선생의 춤에 익숙해졌으니, 내가 전통춤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데에 아주 중요한 분이 아니었나 싶다.
많은 춤꾼들이 그렇듯 나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춤을 시작했다. 춤춘다는 이유로 부모 눈치를 봐야 했던 청소년기, 내가 가장 동경했던 아이는 춤꾼 집안에서 자란 후배였다. 현재 종묘제례악 일무와 동래고무의 이수자이면서 강태홍류 산조춤 보존회 회장으로 활발한 공연 활동을 하고 있는 춤꾼 김율희는 故김동민 선생의 자손으로 김동민 선생의 딸 김온경, 외손녀 윤여숙, 친손년 김율희, 외증손녀 곽미소로 4대째 이어지고 있다. 김동민 선생은 1910년 경남 양산 대지주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일본 메이지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이자 풍류를 즐기는 한량으로 영남춤의 전통 계승과 전국적인 예술 교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율희의 강태홍류 산조춤
김동민 선생 자택과 민속무용연구소가 있는 곳은 부산시 토성동 3가 6번지. 과거 고래 등 같은 집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의 풍경은 고만고만한 빌딩들이 빽빽하게 박혀 있을 뿐이다. 전국 각지에서 부산을 찾아온 예인들이 이 집에서 숙식을 하고 공연까지 했다고 하니 동네 한 구역 정도가 선생의 자택이 아니었을지.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어려워진 예술계를 경제적으로 도왔을 뿐 아니라, 1949년 부산 최초의 민간 국악교육기관인 ‘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권번의 악가무를 일반인에게 강습하였고 공연을 대중화시켰다.
김온경 선생은 아버지를 어려워한 책임감 강한 장녀였다. 10대 초반, 좋아서 추는 춤도 아니면서 시키니까 그저 묵묵히 했다고 한다. 학교 수업 외에는 집에서 춤 연습을 하느라 친구들과 놀러 다녀 본 적도 없다고 한다. 너무 지긋지긋해서 결혼이 아니면 춤을 벗어날 방법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일생 연습만 했다. 김온경 선생은 25살에 결혼을 하며 아버지 품을 벗어나게 되는데 아버지가 창가에서 짐 싣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 없이 북을 둥둥 치셨다고 한다.
1958년부터 김동민 선생은 좀 더 넓은 지역춤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동래야류 박덕원, 문장원, 수영야류 최한복, 통영오광대 장재봉 등의 명인들을 만나 그들의 예술을 널리 소개하고, 대본 채록과 탈 제작 등 연구에도 몰두했다. 영남의 마당춤을 두루 경험했고 1973년부터 문장원 선생의 동래 덧배기춤 지도를 받아 1989년 동래야류의 문둥이춤과 동래학춤의 초대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받았다.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 10호 동래고무의 연습이 있다기에 이 춤의 보유자이신 김온경 선생께 참관을 부탁드리고 다음 날 오전 부산민속예술관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매월 둘째 주, 넷째 주 일요일 오전에 부산시 무형문화재 연습이 있다. 넒은 마당에서는 벌써부터 사람들이 모여 동래야류 연습을 하고 있었다. 동래고무전수회 회원들이 모인 실내 연습실로 들어갔다. 이 아침에 수십 명이 모이는 것도 힘들 텐데, 다들 의상과 한삼을 깨끗이 다려 와서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하는 것을 보니 정성과 감동이 느껴졌다.

동래고무보존회의 정기 연습
동래고무는 동래 교방청의 춤으로,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것을 1987년 고증,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동래 관아의 각종 연향과 일본 사신들을 위한 행사에서 추어졌던 춤인데, 동래 교방의 춤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레파토리다. 의례에 썼던 춤이지만 좀 더 지역성과 민속성이 가미되었고, 특히 중간에 중중모리 장단에 맞추어 ‘지화자’를 노래하면서 북 둘레를 도는 부분에서는 부산 특유의 활기가 느껴진다.
동래고무 정기연습에서는 동래입춤도 함께 췄는데, 아마도 몸을 풀고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한 기본춤으로 삼아 추는 것 같았다. ‘입춤’이라는 보통명사는 기본무라는 의미로, 발레로 치면 발레클래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여행 이후 입춤이 궁금해 또 부산을 방문하여 동래입춤 강습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권번춤 기본에 마당춤의 민속적 맛이 더해져 부산 춤 알짜배기를 다 모아놓은 듯한 재미가 있었다.

김온경선생님 강태홍류산조춤
전통춤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세월을 쌓은 노고에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젊은 춤꾼이 기교의 완벽함을 보여주는 것을 그다지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늘이 없다’, ‘무게가 없다’, ‘향기가 없다’며 욕을 먹기도 한다. 어둡고 매끈하지 않고 서툰 것이 함께 있어야 뭘 좀 아는 것이다. 그러니 노년 명인의 춤은 무게감과 표현의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 온 김율희의 산조춤을 긴 세월 지켜보면서도 계속 감흥이 달라졌던 것 같다. 어릴 땐 그저 춤 잘 추는 아이였다가, 어느 시기에는 풋풋한 교태도 느껴졌다가, 이제 점점 채색이 옅어지고 수묵이 깊어지는 것 같다. 춤으로 익어가는 사람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전통춤 애호가의 기쁨 아닌가 싶다.
글/사진 허유미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춤과 관련된 수업과 글쓰기를 함께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춤들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 『춤의 재미, 춤의 어려움』, 『춤추는 세계』가 있다.
춤의 재미 춤의 어려움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9
춤추는 세계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0
활기와 다양성의 도시 부산. 바다와 낮은 산들이 어우러진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환경, 각지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들고 나는 복잡다단한 도시. 사투리에 담겨진 내용이 사실 친절과 환대임을 알면서도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사람들. 이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부산의 정서는 동래학춤, 동래고무, 동래한량무, 동래입춤, 야류와 지신밟기, 별신굿, 이 지역 춤에서도 느껴진다. 부산은 영남춤의 풍부한 자산이 모여 있는 곳이다.
내가 가장 자주 접했던 부산의 춤은 청화당 김온경 선생이 전승해온 춤들이다. 선생께서 서울에 공연을 오실 때마다 보러 갔고, 특강이 있을 때 참여해서 춤을 배우기도 했다. 선생께 집중적으로 배운 제자는 아니지만, 긴 세월 느슨하게 조금씩 선생의 춤에 익숙해졌으니, 내가 전통춤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데에 아주 중요한 분이 아니었나 싶다.
많은 춤꾼들이 그렇듯 나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춤을 시작했다. 춤춘다는 이유로 부모 눈치를 봐야 했던 청소년기, 내가 가장 동경했던 아이는 춤꾼 집안에서 자란 후배였다. 현재 종묘제례악 일무와 동래고무의 이수자이면서 강태홍류 산조춤 보존회 회장으로 활발한 공연 활동을 하고 있는 춤꾼 김율희는 故김동민 선생의 자손으로 김동민 선생의 딸 김온경, 외손녀 윤여숙, 친손년 김율희, 외증손녀 곽미소로 4대째 이어지고 있다. 김동민 선생은 1910년 경남 양산 대지주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일본 메이지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이자 풍류를 즐기는 한량으로 영남춤의 전통 계승과 전국적인 예술 교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율희의 강태홍류 산조춤
김동민 선생 자택과 민속무용연구소가 있는 곳은 부산시 토성동 3가 6번지. 과거 고래 등 같은 집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의 풍경은 고만고만한 빌딩들이 빽빽하게 박혀 있을 뿐이다. 전국 각지에서 부산을 찾아온 예인들이 이 집에서 숙식을 하고 공연까지 했다고 하니 동네 한 구역 정도가 선생의 자택이 아니었을지.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어려워진 예술계를 경제적으로 도왔을 뿐 아니라, 1949년 부산 최초의 민간 국악교육기관인 ‘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권번의 악가무를 일반인에게 강습하였고 공연을 대중화시켰다.
김온경 선생은 아버지를 어려워한 책임감 강한 장녀였다. 10대 초반, 좋아서 추는 춤도 아니면서 시키니까 그저 묵묵히 했다고 한다. 학교 수업 외에는 집에서 춤 연습을 하느라 친구들과 놀러 다녀 본 적도 없다고 한다. 너무 지긋지긋해서 결혼이 아니면 춤을 벗어날 방법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일생 연습만 했다. 김온경 선생은 25살에 결혼을 하며 아버지 품을 벗어나게 되는데 아버지가 창가에서 짐 싣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 없이 북을 둥둥 치셨다고 한다.
1958년부터 김동민 선생은 좀 더 넓은 지역춤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동래야류 박덕원, 문장원, 수영야류 최한복, 통영오광대 장재봉 등의 명인들을 만나 그들의 예술을 널리 소개하고, 대본 채록과 탈 제작 등 연구에도 몰두했다. 영남의 마당춤을 두루 경험했고 1973년부터 문장원 선생의 동래 덧배기춤 지도를 받아 1989년 동래야류의 문둥이춤과 동래학춤의 초대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받았다.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 10호 동래고무의 연습이 있다기에 이 춤의 보유자이신 김온경 선생께 참관을 부탁드리고 다음 날 오전 부산민속예술관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매월 둘째 주, 넷째 주 일요일 오전에 부산시 무형문화재 연습이 있다. 넒은 마당에서는 벌써부터 사람들이 모여 동래야류 연습을 하고 있었다. 동래고무전수회 회원들이 모인 실내 연습실로 들어갔다. 이 아침에 수십 명이 모이는 것도 힘들 텐데, 다들 의상과 한삼을 깨끗이 다려 와서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하는 것을 보니 정성과 감동이 느껴졌다.
동래고무보존회의 정기 연습
동래고무는 동래 교방청의 춤으로,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것을 1987년 고증,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동래 관아의 각종 연향과 일본 사신들을 위한 행사에서 추어졌던 춤인데, 동래 교방의 춤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레파토리다. 의례에 썼던 춤이지만 좀 더 지역성과 민속성이 가미되었고, 특히 중간에 중중모리 장단에 맞추어 ‘지화자’를 노래하면서 북 둘레를 도는 부분에서는 부산 특유의 활기가 느껴진다.
동래고무 정기연습에서는 동래입춤도 함께 췄는데, 아마도 몸을 풀고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한 기본춤으로 삼아 추는 것 같았다. ‘입춤’이라는 보통명사는 기본무라는 의미로, 발레로 치면 발레클래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여행 이후 입춤이 궁금해 또 부산을 방문하여 동래입춤 강습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권번춤 기본에 마당춤의 민속적 맛이 더해져 부산 춤 알짜배기를 다 모아놓은 듯한 재미가 있었다.
김온경선생님 강태홍류산조춤
전통춤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세월을 쌓은 노고에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젊은 춤꾼이 기교의 완벽함을 보여주는 것을 그다지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늘이 없다’, ‘무게가 없다’, ‘향기가 없다’며 욕을 먹기도 한다. 어둡고 매끈하지 않고 서툰 것이 함께 있어야 뭘 좀 아는 것이다. 그러니 노년 명인의 춤은 무게감과 표현의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 온 김율희의 산조춤을 긴 세월 지켜보면서도 계속 감흥이 달라졌던 것 같다. 어릴 땐 그저 춤 잘 추는 아이였다가, 어느 시기에는 풋풋한 교태도 느껴졌다가, 이제 점점 채색이 옅어지고 수묵이 깊어지는 것 같다. 춤으로 익어가는 사람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전통춤 애호가의 기쁨 아닌가 싶다.
글/사진 허유미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춤과 관련된 수업과 글쓰기를 함께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춤들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 『춤의 재미, 춤의 어려움』, 『춤추는 세계』가 있다.
춤의 재미 춤의 어려움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9
춤추는 세계 :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935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