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을 걷는 건축가][인문] 미술관이 된 화력발전소, 테이트 모던

런던을 걷는 건축가 #4



넓게 뻗은 강변공원과 더불어 북쪽으로는 강변북로, 남쪽으로는 올림픽대로가 지나가는 서울의 한강. 이와 달리 런던 템스강River Thames의 남단에는 둑을 돋아 만든 산책로가 있다. 강변을 따라 산책로를 걷다 보면 산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활약하던 옛 런던의 거친 흔적들과 조우하는 즐거움이 있다. 강물의 수위가 낮아지며 드러나는 강바닥에 산만하게 박힌 녹슨 말뚝, 제방의 벽면에 오랜 시간을 두고 두터워진 물이끼, 상하역을 위해 건물의 입면마다 설치되었지만 지금은 그럴싸한 장식이 되어버린 낡은 크레인, 교각 아래를 지날 때마다 머리 위를 드리우는 벽돌로 견고히 쌓은 아치형 터널. 이런 흔적들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산책로를 따라 즐비한 레스토랑, 버스킹 스폿, 노점과 공연장들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뱅크사이드Bankside의 무게중심이 되고 있는 곳, 옛 화력발전소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며 지금은 미술관이 된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이 자리 잡고 있다.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 건물은 1960년대 자일스 경Sir Giles Gilbert Scott이 설계한 대표작으로 35미터 높이, 152미터 길이의 육중한 박스형 터빈홀Turbine Hall과 중앙에 높게 솟아 연기를 내뿜던 99미터 높이의 굴뚝이 인상적인 건물이었다. 1990년대 초 테이트 재단Tate Trustees이 런던에 현대미술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화력발전소의 기능을 잃고 허물만 남게 된 이 부지를 선택하게 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건대, 테이트 재단이 발전소를 미술관 부지로 선택한 것이 런던이라는 도시에 신의 한수가 된 것은 아닐까? 당시에는 그 선택의 이유가 런던의 어마어마한 건물가 때문이었더라도 말이다. 


초기 화력발전소의 전경 © George Georgiou


테이트 재단은 발전소를 미술관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국제경기를 통해 여러 건축가들의 아이디어를 수렴하기 시작했다. 최종 선정된 설계안이 바로 지금의 테이트 모던을 있게 한 스위스 건축가 헤르조그와 드 뫼론Herzog & De Meuron의 것이다. 그들의 설계안이 초기 화력발전소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는 방식으로 제안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고, 그 설계안이 채택되었다는 것도 왠지 다행스럽다. 거대한 터빈홀에서 발전기와 각종 기기를 제거하여 일반적인 건물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대공간을 만들고, 철골구조와 벽돌벽을 최대한 보존하되 기존의 물성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글라스 박스로 구성된 새로운 전시 공간들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테이트 모던이 탄생하게 되었다.

 

초기 화력발전소의 터빈홀 내부 © Brian Harris



강 건너편의 세인트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이 화력발전소가 한때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논란의 중심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런던의 도시개발계획에는 세인트폴 대성당의 돔이 어디에서도 보일 수 있도록 인근에 들어서는 건축물의 높이와 형태를 제한하는 건축법규가 존재한다. 영국인과 런던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국교였던 성공회와 그를 대표하는 종교건축물이 전쟁을 거치고도 보존되어 얼마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다. 그런 중요한 종교건축물을 대적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 화력발전소가 이제는 사람들에게 세인트폴 대성당의 가장 아름다운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주인공은 2000년 테이트 모던의 탄생과 더불어 개통된 밀레니엄 브리지Millennium Bridge다. 세인트폴 대성당과 미술관을 연결하는 다리인 밀레니엄 브리지는 건축가 포스터 경Sir Norman Foster의 설계로 구현된 폭 4미터, 길이 320미터의 현수교이다. 현재까지는 템스강의 유일무이한 보행교이기도 하다. 밀레니엄 브리지는 주변의 경관을 방해하지 않는 미니멀한 디자인이라 마치 얇은 와이어처럼 강물 위에 가볍게 떠있는 형상이다.


세인트폴 대성당과 테이트 모던, 그리고 밀레니엄 브리지의 조합은 실로 아름답다. 밀레니엄 브리지를 건너는 방향이 대성당 쪽이든 미술관 쪽이든, 마주하게 되는 두 건물의 웅장한 전경을 오롯이 느끼며 다가가는 시간을 선사한다. 밀레니엄 브리지는 단순히 강을 두고 마주하고 있는 두 랜드마크 건물을 연결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근의 공연장, 카페, 레스토랑, 펍과 산책로를 모두 아우르며 많은 사람들이 템스강을 찾게 하는 중요한 가교역할을 한다.



2016년에는 오랜 시간을 두고 계획된 증축부가 완성되면서 테이트 모던에 또 다른 시대가 열렸다. 이미 런던의 랜드마크로 우뚝 선 테이트 모던에 또 다른 변화를 가하는 것은 사실 건축적인 어휘의 변형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중들의 반응 때문에 어떤 건축가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증축 프로젝트를 위한 건축가는 초기 테이트 모던을 설계했던 헤르조그와 드 뫼론으로 재선정되었다. 프로젝트가 순항한 것만은 아니었다. 포부가 컸던 만큼 증축 설계안에도 많은 변경이 요구되었고, 예산상의 문제로 완공은 예상보다 많이 지연되었다.


증축의 첫 단계로 발전소 남측 지하에 존재하던 세 개의 거대한 오일탱크를 보존하여 행위예술을 위한 전시공간을 만들고, 이후 상부 스위치 하우스Switch House를 복원하여 총 10개 층의 타워부를 수직 증축하였다. 증축부는 기존의 테이트 모던이 갖고 있던 공간의 1.6배에 해당하는 면적에 전시공간, 교육공간, 공연장, 레스토랑, 아트숍 등 방문자들에게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10층에 테라스를 두어 런던 시내를 바라보는 또 다른 뷰를 만들어준다.



증축부의 입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설계 초기에 주외장재로 유리를 제안했던 것을 런던시 관계 부처와의 논의에 따라 결국 벽돌로 변경하게 되었는데, 신축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발전소의 낡은 벽돌재질과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외장벽돌의 톤과 패턴을 고민한 흔적이 읽힌다. 원래 한자리에 있어야 했던 건물이 비로소 구현된 듯 말이다.

 


새롭게 태어난 테이트 모던의 두 블록은 재단에 큰 기여를 했던 사회활동가 나탈리 벨Natalie Bell과 자선사업가 레오나르드 블라파트닉Leonard Blavatinik의 이름을 땄다. 기존의 터빈홀이 나탈리 벨 빌딩, 증축한 스위치 하우스가 블라파트닉 빌딩이다. 이 두 블록을 연결하는 중간에는 터빈홀의 대공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브리지가 연결되었고, 비로소 완전체가 된 테이트 모던이 런던 시민들에게 다시 공개된다.


늘 열려 있는 미술관에서 누구나 현대미술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고, 이곳을 지나는 누구의 발길이라도 머물게 하면서 수년간 런던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런던이라는 도시에게 테이트 모던은 책으로 비유하자면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그런 장소이다.





글/사진(1, 4-12) 현소영

도시와 건축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크고 작은 해프닝을 탐닉하는 삼인칭 관찰자. 한껏 게으른 몸뚱이를 간발의 차이로 이긴 호기심으로 매일 아침 겨우 눈을 뜰 기력을 유지하고 있는 최소주의. 좀머 씨처럼 등속도를 유지하며 런던을 골똘히 누비고 다니는 뚜벅이 외국인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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