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산책: 달의 왼편
그대 조상들이 다른 것을 본 바 없고, 그대 후손들이 다른 것을 볼 바 없으리라.
- 마닐리우스
교토 도시샤 대학으로 가고 있었다. 오래 전 그가 걷던 길, 천변 햇살에 눈을 잔뜩 찡그리고서. 1875년 개교 이래 변한 게 거의 없다는 옛 벽돌건물들 틈에서 그의 시비를 찾아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여기저기 들리는 한국말들이 다 그리로 몰려가고 있었으니까. 1995년 2월 16일, 그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고 꼭 50년을 채우던 날, 윤동주 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살아 있으면 여든을 바라볼 나이, 한중일 노정이 엮이는 시대적 회환과 의지를 되새김하며 여전히 시가 무얼 할 수 있는지 곰곰 떠올려 봤을까? 훗날 이곳 시비에 새겨질 한 구절, 한국 현대사 어두운 골짜기에서 마주본 또 다른 반성과 부끄러움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고 있었을까?

교토 가모가와
* * *
2017년 10월,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동주 문학 여행을 떠나온 사람들이 많이들 이곳에 다녀갔다. 시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삶이라니, 퍽이나 시적이다. 멋쩍을 만큼 시적으로 나의 여행 첫 여정도 중국 연길 땅 명동촌, 그가 살았던 집 뒷마당이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열매들을 숨기듯 잎으로 감싼 살구나무 한 그루, 한눈에도 단물이 벌겋게 오른 앵두나무 한 그루. 사실 그곳은 윤동주 가족이 신발을 벗던 앞마당이었다. ‘중국 시인 윤동주’를 두서없이 기념하느라, 추억의 앞뒤가 바뀌어 버렸다.



중국 연길, 윤동주 생가에서
지상 마지막 흔적, ‘시인윤동주지묘’ 묘비를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인 학자 오무라 마스오였다. 1984년 그가 용정을 찾아갔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윤동주가 시인이었다는 것도, 그의 시를 모르면 남조선에선 대학 가기 어렵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세상이 그의 시를 읽기까지는 아직 3년, ‘시인 윤동주’, 그의 할아버지가 새긴 묘비명은 짧고 단호했다. 그리고 40년이 다 가도록 묘비엔 ‘자랑처럼 풀더미’만 무성했다. 교회 십자가도 첨탑도 없는 퀭한 하늘, 종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복원공사가 되다 만 명동 학교 운동장에 입안에 우물거리던 앵두 씨 다섯 알을 뱉고서 뒤꿈치로 지그시 눌러 다독였다.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앵두나무 한 그루 자라나 있으려나. 용정에서의 마지막 식사. <사랑의 전당>에 등장하는 순이, 그 정겨운 이름을 곱씹으며 순이랭면에서 서늘한 냉면 육수를 마셨다. 그릇의 바닥을 볼 수 없을 만큼 정겨운 양이었다.


명동학교 기념터와 순이랭면
* * *
서울 종로, 인왕산 수성동 계곡으로 이어지는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 본명 김금송이라는 이가 1939년 두 번째 부인과 폐가를 사들여 일궜던 살림집이다. 하숙생 윤동주는 이곳에서 다섯 달을 지냈다. 이른 아침 인왕산 중턱에 올라 약수를 마시고, 계곡물에 얼굴을 씻고, 여주인이 차려 준 아침밥을 먹었다. 학교를 마치고 적선동 전차 정류장에 내리면 서점에 들러 책을 읽었다. 지금 적선동에는 서점이 없다. 술집, 밥집, 아주 오랫동안 책방 같은 건 없었을 풍경이다. 술을 즐겨 하지 않았다지만, 그가 나이 마흔 넘도록 살아남았다면 서점대신 적선동 허다한 술집에 들어가 반주로 소주 한 잔 곁들였을까. 집주인 김송은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갔다 올라와 이 집을 팔고, 세 번째 부인과 서소문으로 이사했다.

종로 누상동, 윤동주 하숙집
윤동주가 좋아하던 시인 정지용이 스무 해 전 유학하던 곳, 도시샤 대학교. 그는 마음의 스승이 써내려간 ‘수박 냄새 품어 오는 압천 강바람’을 따라 이곳을 걸었다. 연희전문 시절 북아현동 정지용 시인의 집에 찾아간 적도 있었으나 훗날 정지용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대신 윤동주가 죽고 발행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설운 서문을 적었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 없이.’

교토 도시샤 대학교의 윤동주 시비
1943년 7월 14일, 여름방학을 앞두고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타기 이틀 전, 그는 매일 지나던 압천 가 시모가모 경찰서로 잡혀와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죄목은 독립운동. 그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시가 아니라 외마디 비명이었다. 후쿠오카 형무소를 떠나던 날 그의 아버지는 조선도 일본도 아닌 곳, 현해탄에 아들의 반을 남겨 두었다.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와 후쿠오카 형무소
경찰서에서 걸어서 15분, 그가 살던 다케다 아파트는 교토조형예술대학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 윤동주 시를 사랑하던 건물주가 그의 흔적을 남기고자 교토 외곽 어느 높고 외롭고 쓸쓸한 골목에 윤동주의 시비를 하나 더 세웠다.

다케다 아파트
* * *
다다미 깔린 자그마한 숙소 창을 활짝 열고 2인용 식탁을 창가로 끌어왔다. 창 왼편에는 보름달. 만주, 서울, 교토, 후쿠오카를 다 지나오도록 그와 나의 접점이랄 만한 자그마한 자리 하나 찾질 못했다. 오늘처럼 보름달이 뜬 밤, 그도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으려나. 저 달은 그때 모습 그대로겠지요? 그래서 어쩌면 하늘과 바람과 별 뒷장에 저 보름달에 관한 시도 몇 편 적혔을 테지요?

윤동주의 마지막 소풍 장소, 교토 우지 아마가세 다리
나는 달의 왼편에 있다. 그가 오가며 바라보았을 보름달은 그의 창 오른편. 그와 나 사이 거리, 200미터, 그리고 한 세기. 당신의 창가 아래에서 오늘 나의 창으로 걸어오는 동안,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갯짓 약간 만큼은 달이 기울더군요. 단풍이 한창인 가을 밤, 셔츠 위에 머플러로 목을 단단히 두른 행인 하나 수줍게 지나고, 시라카와 물소리 좁고 긴 골목을 관통하고, 길고양이 한 마리 사뿐 담장을 뛰어 넘었답니다. 달이 내 쪽으로 살짝 이울면 우리 설핏 눈이라도 마주칠 수 있을까요? 쓸쓸한 밤, 달의 왼편, 나는 여직 ‘당신,처럼’ 살아갈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반대편 먼 창에 서린 당신의 흔적을 기웃거릴 뿐입니다. 나의 20대는 왜 그리 허투루 가버렸을까요? 그러면 당신은 오직 시로만 위로할 수 있다는 듯, 곁에 서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 나.

글/사진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
동주산책: 달의 왼편
교토 도시샤 대학으로 가고 있었다. 오래 전 그가 걷던 길, 천변 햇살에 눈을 잔뜩 찡그리고서. 1875년 개교 이래 변한 게 거의 없다는 옛 벽돌건물들 틈에서 그의 시비를 찾아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여기저기 들리는 한국말들이 다 그리로 몰려가고 있었으니까. 1995년 2월 16일, 그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고 꼭 50년을 채우던 날, 윤동주 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살아 있으면 여든을 바라볼 나이, 한중일 노정이 엮이는 시대적 회환과 의지를 되새김하며 여전히 시가 무얼 할 수 있는지 곰곰 떠올려 봤을까? 훗날 이곳 시비에 새겨질 한 구절, 한국 현대사 어두운 골짜기에서 마주본 또 다른 반성과 부끄러움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고 있었을까?
교토 가모가와
* * *
2017년 10월,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동주 문학 여행을 떠나온 사람들이 많이들 이곳에 다녀갔다. 시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삶이라니, 퍽이나 시적이다. 멋쩍을 만큼 시적으로 나의 여행 첫 여정도 중국 연길 땅 명동촌, 그가 살았던 집 뒷마당이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열매들을 숨기듯 잎으로 감싼 살구나무 한 그루, 한눈에도 단물이 벌겋게 오른 앵두나무 한 그루. 사실 그곳은 윤동주 가족이 신발을 벗던 앞마당이었다. ‘중국 시인 윤동주’를 두서없이 기념하느라, 추억의 앞뒤가 바뀌어 버렸다.
중국 연길, 윤동주 생가에서
지상 마지막 흔적, ‘시인윤동주지묘’ 묘비를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인 학자 오무라 마스오였다. 1984년 그가 용정을 찾아갔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윤동주가 시인이었다는 것도, 그의 시를 모르면 남조선에선 대학 가기 어렵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세상이 그의 시를 읽기까지는 아직 3년, ‘시인 윤동주’, 그의 할아버지가 새긴 묘비명은 짧고 단호했다. 그리고 40년이 다 가도록 묘비엔 ‘자랑처럼 풀더미’만 무성했다. 교회 십자가도 첨탑도 없는 퀭한 하늘, 종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복원공사가 되다 만 명동 학교 운동장에 입안에 우물거리던 앵두 씨 다섯 알을 뱉고서 뒤꿈치로 지그시 눌러 다독였다.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앵두나무 한 그루 자라나 있으려나. 용정에서의 마지막 식사. <사랑의 전당>에 등장하는 순이, 그 정겨운 이름을 곱씹으며 순이랭면에서 서늘한 냉면 육수를 마셨다. 그릇의 바닥을 볼 수 없을 만큼 정겨운 양이었다.
명동학교 기념터와 순이랭면
* * *
서울 종로, 인왕산 수성동 계곡으로 이어지는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 본명 김금송이라는 이가 1939년 두 번째 부인과 폐가를 사들여 일궜던 살림집이다. 하숙생 윤동주는 이곳에서 다섯 달을 지냈다. 이른 아침 인왕산 중턱에 올라 약수를 마시고, 계곡물에 얼굴을 씻고, 여주인이 차려 준 아침밥을 먹었다. 학교를 마치고 적선동 전차 정류장에 내리면 서점에 들러 책을 읽었다. 지금 적선동에는 서점이 없다. 술집, 밥집, 아주 오랫동안 책방 같은 건 없었을 풍경이다. 술을 즐겨 하지 않았다지만, 그가 나이 마흔 넘도록 살아남았다면 서점대신 적선동 허다한 술집에 들어가 반주로 소주 한 잔 곁들였을까. 집주인 김송은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갔다 올라와 이 집을 팔고, 세 번째 부인과 서소문으로 이사했다.
종로 누상동, 윤동주 하숙집
윤동주가 좋아하던 시인 정지용이 스무 해 전 유학하던 곳, 도시샤 대학교. 그는 마음의 스승이 써내려간 ‘수박 냄새 품어 오는 압천 강바람’을 따라 이곳을 걸었다. 연희전문 시절 북아현동 정지용 시인의 집에 찾아간 적도 있었으나 훗날 정지용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대신 윤동주가 죽고 발행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설운 서문을 적었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 없이.’
교토 도시샤 대학교의 윤동주 시비
1943년 7월 14일, 여름방학을 앞두고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타기 이틀 전, 그는 매일 지나던 압천 가 시모가모 경찰서로 잡혀와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죄목은 독립운동. 그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시가 아니라 외마디 비명이었다. 후쿠오카 형무소를 떠나던 날 그의 아버지는 조선도 일본도 아닌 곳, 현해탄에 아들의 반을 남겨 두었다.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와 후쿠오카 형무소
경찰서에서 걸어서 15분, 그가 살던 다케다 아파트는 교토조형예술대학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 윤동주 시를 사랑하던 건물주가 그의 흔적을 남기고자 교토 외곽 어느 높고 외롭고 쓸쓸한 골목에 윤동주의 시비를 하나 더 세웠다.
다케다 아파트
* * *
다다미 깔린 자그마한 숙소 창을 활짝 열고 2인용 식탁을 창가로 끌어왔다. 창 왼편에는 보름달. 만주, 서울, 교토, 후쿠오카를 다 지나오도록 그와 나의 접점이랄 만한 자그마한 자리 하나 찾질 못했다. 오늘처럼 보름달이 뜬 밤, 그도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으려나. 저 달은 그때 모습 그대로겠지요? 그래서 어쩌면 하늘과 바람과 별 뒷장에 저 보름달에 관한 시도 몇 편 적혔을 테지요?
윤동주의 마지막 소풍 장소, 교토 우지 아마가세 다리
나는 달의 왼편에 있다. 그가 오가며 바라보았을 보름달은 그의 창 오른편. 그와 나 사이 거리, 200미터, 그리고 한 세기. 당신의 창가 아래에서 오늘 나의 창으로 걸어오는 동안,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갯짓 약간 만큼은 달이 기울더군요. 단풍이 한창인 가을 밤, 셔츠 위에 머플러로 목을 단단히 두른 행인 하나 수줍게 지나고, 시라카와 물소리 좁고 긴 골목을 관통하고, 길고양이 한 마리 사뿐 담장을 뛰어 넘었답니다. 달이 내 쪽으로 살짝 이울면 우리 설핏 눈이라도 마주칠 수 있을까요? 쓸쓸한 밤, 달의 왼편, 나는 여직 ‘당신,처럼’ 살아갈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반대편 먼 창에 서린 당신의 흔적을 기웃거릴 뿐입니다. 나의 20대는 왜 그리 허투루 가버렸을까요? 그러면 당신은 오직 시로만 위로할 수 있다는 듯, 곁에 서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 나.
글/사진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