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산책: 〈동주〉 비평
오프닝에서 영화는 우리를 어느 평범한 시골마을로 안내한다. 간도, 조선의 경성, 일본의 교토, 도쿄, 후쿠오카를 횡단하는 〈동주〉의 첫 출발지인 바로 간도 땅의 용정, 만주 땅. 거대한 악, 일본군이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미명 하에 무고한 조선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간도참변의 장소, 영화 〈암살〉에서 독립군 스나이퍼로 양육된 임옥윤(전지현)이 어머니를 잃은 비극적 장소, 영화 〈밀정〉에서 일본군의 삼엄한 감시 하에 비밀 작전을 수행하던 끝 모를 벌판. 그러나 〈동주〉에서 만주는 흔하디흔한 시골 마을이다. 동주는 거악과 싸우거나, 비극을 맞이하거나, 대륙의 기운을 얻는 대신 부모님께 혼나고,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친구와 놀고, 동생을 돌보며 살아간다.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을 풍경들.
역사적 소명보다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일상이다, 아무것도 아닌 듯 던져지는 공간의 뉘앙스는 비슷한 시기를 다룬 기존의 영화들과 비교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이 〈동주〉에서 보는 만주는 정말 만주인가? 가족, 일상, 생활의 감각을 평범하게 포개면서 〈동주〉는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만주가 그때의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지금 시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적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영화〈동주〉에서
〈동주〉는 흑백 영화다. 이준익 감독은 제작비 때문에 흑백으로 찍었다 했지만, 감독 특유의 겸손으로 보는 게 옳다. 감독의 해명과 영화가 부딪칠 때 차라리 영화를 믿어야 한다. 〈동주〉의 흑백 조형미와 마주하며 제작비를 떠올리는 사람이 흔치 않을 테니까. 천연색 영화가 상용화된 후 일제강점기를 재현한 한국영화 중 흑백 화면을 사용한 영화는 없다. 과거를 회고하는 영화는 대체로 그때 그 시절을 시각적으로 복원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는 시각적 스펙터클을 장점으로 하는 매체고, 대중 역시 그러한 구경거리와 마주하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러면 〈동주〉는 왜 시각적 스펙터클을 포기했을까?

영화〈동주〉에서
기존 일제강점기 영화들은 특히 그때 그 시절의 백화점을 사랑한다. 그 덕에 우리는 초창기 근대 문물의 압축적 전시장의 현란한 율동을 넋 놓고 본다. 복원된 시각성을 기준으로 과거가 현재로 매개되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복원된 그때를 단지 ‘기술적’으로 탄복하는 사태, 태도는 온당한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시각적 스펙터클, 천연색이 탈색되면서 스크린 여기저기에 아로새겨지는 불균질한 징후들이다.
〈동주〉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론에 불과할 뿐, 〈동주〉는 그리 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동주가 시를 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투명하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 동주의 결단에 대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투명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분명히’ 시를 쓰고 싶었으나, ‘어쩌다’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목숨을 잃었다. 분명히, 어쩌다가, 결과적으로. 영화 곳곳에서 삐쳐 나오는 불화의 풍경을 천연색의 시각적 테크놀로지가 재현할 수 있는가? 그 현란한 시각적 전시는 오리혀 재현하기 까다로운 불균질한 정황을 제거하는 도구가 아닌가? 흑백을 선택하면서 〈동주〉는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주체의 형언할 수 없는 내심을 비로소 음미의 대상으로 격상시킨다. 가시화될 수 없는 불화의 내면은 시각적 스펙터클을 포기한 뒤에야 비로소 환기된다.


영화〈동주〉에서
동주에게는 몽규라는 동갑내기 사촌 형이자 둘도 없는 친구가 있다. 둘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몽규의 신춘문예 당선일 것이다. 시인을 꿈꾸는 이는 동주인데 정작 시인으로 등단하는 사람은 몽규이다. 몽규는 혹여나 동주가 마음을 다쳤을까 걱정하는 눈치고, 동주는 자신을 의식하는 몽규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애틋하다. 둘은 다정하게 서로를 격려하기도, 시대의 이슈를 두고 언쟁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경성, 도쿄, 후쿠오카로 이어지는 여행을 함께 하며 비슷한 시기에 죽음을 맞이한다.
몽규는 동주를 바라보며 동주의 시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진심인지 여부는 판명되지 않는다. 그 다음 이어지는 동주의 표정은 화답이 아니다. 불투명하다. 이론보다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몽규의 주장에 동주는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지지표명 내지는 동의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불투명하다. 필요 이상으로 지연되거나 혹은 서두는 어깨너머쇼트의 행렬은 둘의 대화에 헛헛한 뒷맛을 남긴다. 하지만 이것은 대화의 실패가 아니라 실패가 계산된 대화이다. 둘이면서도 하나인 무대를 필사적으로 부여잡으려는 아슬아슬한 곡예인 것이다. 당신은 두 주체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자기 위주의 하나를 위해 상대의 어떤 부분을 배제한다는 의미 아닐까? 자기 입장을 멈추고 기꺼이 한 걸음씩 물러나는 태도, 물러나지만 하나의 무대만큼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 여전히 수용할 수 없는 상대의 입장을 인정하면서, 충실하게 상대의 입장에 귀 기울이겠다는 태도.



영화〈동주〉에서
〈동주〉는 사건의 마디 사이에 윤동주의 시를 포갠다. 저항의 시대, 서정이란 얼마나 사치스러운 감정인가. 하지만 동주도 이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시대의 차가운 공기에 비하면 시란 얼마나 쉽게 쓰이는 것인가? 그 고뇌가 영화의 표현 방식을 의아하게 만든다. 기어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몽규는 안타깝게도 투옥된다. 이 소식을 들은 동주는 곧장 면회를 간다.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인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들에게 그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다. 우리가 듣는 것은 동주의 차분한 목소리로 독백되는 시 「자화상」이다. 일제강점기의 냉기를 품은 형무소의 이미지 앞에서 자기감정에 점유된 서정적 문장들이 울려 퍼지는 것이다.

영화〈동주〉에서
차가운 감옥이라는 시각성, 물질성과 이에 대비되는 서정적 자기 고백, 청각성, 이 기이한 결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극중 동주가 쓴 시의 서정성을 문제 삼는 몽규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가상에 불과하다. 그 평가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지금 현재의 우리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 윤동주와 관련된 지식이란 그를 소개할 때 으레 첨부되는 흑백 사진 속 화사한 얼굴과 서정성으로 틀 지워진 진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때의 「자화상」이 몽규의 실천적 태도와 비교되는 동주의 자책감에 대한 은유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몽규에 대한 동주의 부채감이 곧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에서 카메라 시선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쇠창살을 가운데 둔 두 인물을 자로 잰 듯 균등하게 나눈다. 정황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이미지 상으로 둘은 부채감을 도무지 떠올릴 수 없는 수준으로 평등하다.

영화〈동주〉에서
차가운 이성으로 현실에 참여하는 것과 뜨겁게 자아를 성찰하는 것 사이의 위계를 확정할 수 있는가? 이 둘은 각각인가, 함께인가? 동주의 독백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면 현실 문제를 동반한 자기 성찰, 자기 성찰이 동반된 현실 투쟁이라는 〈동주〉의 비장한 의미화가 당신의 동의를 구하는데 성공했다는 증거이다. 우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돌아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마주하는 내면 성찰이 일제강점기의 서슬 시퍼런 시대성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진단은 그때 그 시절과 멀리 떨어진 지금 우리의 고정관념일 뿐이다.
〈동주〉 끝자리에서 우리는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부끄럽지 않으려는 의지를 본다. 그 의지가 식민과 피식민, 문명과 야만, 합법과 불법의 부당한 경계를 전복한다. 윤동주의 삶과 시세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크게 새로울 게 없는 내용들 아닌가? 현재 일본 극우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처사에 대한 직접적 발언을 자제한 것은 아닌가? 일리 있는 의견이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우리가 〈동주〉에서 본 것은 겨우 저 최종적 메시지인가? 현실 정치와 맞닿아 있지 않는 영화는 비윤리적인가? 최종적 메시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영화가 쌓아올린 치열한 표정들, 기존 일제강점기 영화들의 문법을 비틀고, 의심하고 재구현하는 영화적 질문들 보아야 한다. 엄혹한 세상에서 자기 성찰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던 어느 시인을, 시인과 닮은 성찰의 형식으로, 지금 이 자리에 되살리려는 태도. 이것이 우리가 영화 〈동주〉를 봐야 하는 이유다.

글 박우성(영화평론가) / 사진 〈동주〉 스틸컷.
동주산책: 〈동주〉 비평
오프닝에서 영화는 우리를 어느 평범한 시골마을로 안내한다. 간도, 조선의 경성, 일본의 교토, 도쿄, 후쿠오카를 횡단하는 〈동주〉의 첫 출발지인 바로 간도 땅의 용정, 만주 땅. 거대한 악, 일본군이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미명 하에 무고한 조선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간도참변의 장소, 영화 〈암살〉에서 독립군 스나이퍼로 양육된 임옥윤(전지현)이 어머니를 잃은 비극적 장소, 영화 〈밀정〉에서 일본군의 삼엄한 감시 하에 비밀 작전을 수행하던 끝 모를 벌판. 그러나 〈동주〉에서 만주는 흔하디흔한 시골 마을이다. 동주는 거악과 싸우거나, 비극을 맞이하거나, 대륙의 기운을 얻는 대신 부모님께 혼나고,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친구와 놀고, 동생을 돌보며 살아간다.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을 풍경들.
역사적 소명보다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일상이다, 아무것도 아닌 듯 던져지는 공간의 뉘앙스는 비슷한 시기를 다룬 기존의 영화들과 비교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이 〈동주〉에서 보는 만주는 정말 만주인가? 가족, 일상, 생활의 감각을 평범하게 포개면서 〈동주〉는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만주가 그때의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지금 시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적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영화〈동주〉에서
〈동주〉는 흑백 영화다. 이준익 감독은 제작비 때문에 흑백으로 찍었다 했지만, 감독 특유의 겸손으로 보는 게 옳다. 감독의 해명과 영화가 부딪칠 때 차라리 영화를 믿어야 한다. 〈동주〉의 흑백 조형미와 마주하며 제작비를 떠올리는 사람이 흔치 않을 테니까. 천연색 영화가 상용화된 후 일제강점기를 재현한 한국영화 중 흑백 화면을 사용한 영화는 없다. 과거를 회고하는 영화는 대체로 그때 그 시절을 시각적으로 복원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는 시각적 스펙터클을 장점으로 하는 매체고, 대중 역시 그러한 구경거리와 마주하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러면 〈동주〉는 왜 시각적 스펙터클을 포기했을까?
영화〈동주〉에서
기존 일제강점기 영화들은 특히 그때 그 시절의 백화점을 사랑한다. 그 덕에 우리는 초창기 근대 문물의 압축적 전시장의 현란한 율동을 넋 놓고 본다. 복원된 시각성을 기준으로 과거가 현재로 매개되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복원된 그때를 단지 ‘기술적’으로 탄복하는 사태, 태도는 온당한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시각적 스펙터클, 천연색이 탈색되면서 스크린 여기저기에 아로새겨지는 불균질한 징후들이다.
〈동주〉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론에 불과할 뿐, 〈동주〉는 그리 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동주가 시를 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투명하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 동주의 결단에 대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투명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분명히’ 시를 쓰고 싶었으나, ‘어쩌다’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목숨을 잃었다. 분명히, 어쩌다가, 결과적으로. 영화 곳곳에서 삐쳐 나오는 불화의 풍경을 천연색의 시각적 테크놀로지가 재현할 수 있는가? 그 현란한 시각적 전시는 오리혀 재현하기 까다로운 불균질한 정황을 제거하는 도구가 아닌가? 흑백을 선택하면서 〈동주〉는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주체의 형언할 수 없는 내심을 비로소 음미의 대상으로 격상시킨다. 가시화될 수 없는 불화의 내면은 시각적 스펙터클을 포기한 뒤에야 비로소 환기된다.
영화〈동주〉에서
동주에게는 몽규라는 동갑내기 사촌 형이자 둘도 없는 친구가 있다. 둘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몽규의 신춘문예 당선일 것이다. 시인을 꿈꾸는 이는 동주인데 정작 시인으로 등단하는 사람은 몽규이다. 몽규는 혹여나 동주가 마음을 다쳤을까 걱정하는 눈치고, 동주는 자신을 의식하는 몽규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애틋하다. 둘은 다정하게 서로를 격려하기도, 시대의 이슈를 두고 언쟁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경성, 도쿄, 후쿠오카로 이어지는 여행을 함께 하며 비슷한 시기에 죽음을 맞이한다.
몽규는 동주를 바라보며 동주의 시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진심인지 여부는 판명되지 않는다. 그 다음 이어지는 동주의 표정은 화답이 아니다. 불투명하다. 이론보다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몽규의 주장에 동주는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지지표명 내지는 동의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불투명하다. 필요 이상으로 지연되거나 혹은 서두는 어깨너머쇼트의 행렬은 둘의 대화에 헛헛한 뒷맛을 남긴다. 하지만 이것은 대화의 실패가 아니라 실패가 계산된 대화이다. 둘이면서도 하나인 무대를 필사적으로 부여잡으려는 아슬아슬한 곡예인 것이다. 당신은 두 주체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자기 위주의 하나를 위해 상대의 어떤 부분을 배제한다는 의미 아닐까? 자기 입장을 멈추고 기꺼이 한 걸음씩 물러나는 태도, 물러나지만 하나의 무대만큼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 여전히 수용할 수 없는 상대의 입장을 인정하면서, 충실하게 상대의 입장에 귀 기울이겠다는 태도.
영화〈동주〉에서
〈동주〉는 사건의 마디 사이에 윤동주의 시를 포갠다. 저항의 시대, 서정이란 얼마나 사치스러운 감정인가. 하지만 동주도 이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시대의 차가운 공기에 비하면 시란 얼마나 쉽게 쓰이는 것인가? 그 고뇌가 영화의 표현 방식을 의아하게 만든다. 기어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몽규는 안타깝게도 투옥된다. 이 소식을 들은 동주는 곧장 면회를 간다.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인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들에게 그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다. 우리가 듣는 것은 동주의 차분한 목소리로 독백되는 시 「자화상」이다. 일제강점기의 냉기를 품은 형무소의 이미지 앞에서 자기감정에 점유된 서정적 문장들이 울려 퍼지는 것이다.
영화〈동주〉에서
차가운 감옥이라는 시각성, 물질성과 이에 대비되는 서정적 자기 고백, 청각성, 이 기이한 결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극중 동주가 쓴 시의 서정성을 문제 삼는 몽규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가상에 불과하다. 그 평가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지금 현재의 우리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 윤동주와 관련된 지식이란 그를 소개할 때 으레 첨부되는 흑백 사진 속 화사한 얼굴과 서정성으로 틀 지워진 진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때의 「자화상」이 몽규의 실천적 태도와 비교되는 동주의 자책감에 대한 은유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몽규에 대한 동주의 부채감이 곧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에서 카메라 시선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쇠창살을 가운데 둔 두 인물을 자로 잰 듯 균등하게 나눈다. 정황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이미지 상으로 둘은 부채감을 도무지 떠올릴 수 없는 수준으로 평등하다.
영화〈동주〉에서
차가운 이성으로 현실에 참여하는 것과 뜨겁게 자아를 성찰하는 것 사이의 위계를 확정할 수 있는가? 이 둘은 각각인가, 함께인가? 동주의 독백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면 현실 문제를 동반한 자기 성찰, 자기 성찰이 동반된 현실 투쟁이라는 〈동주〉의 비장한 의미화가 당신의 동의를 구하는데 성공했다는 증거이다. 우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돌아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마주하는 내면 성찰이 일제강점기의 서슬 시퍼런 시대성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진단은 그때 그 시절과 멀리 떨어진 지금 우리의 고정관념일 뿐이다.
〈동주〉 끝자리에서 우리는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부끄럽지 않으려는 의지를 본다. 그 의지가 식민과 피식민, 문명과 야만, 합법과 불법의 부당한 경계를 전복한다. 윤동주의 삶과 시세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크게 새로울 게 없는 내용들 아닌가? 현재 일본 극우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처사에 대한 직접적 발언을 자제한 것은 아닌가? 일리 있는 의견이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우리가 〈동주〉에서 본 것은 겨우 저 최종적 메시지인가? 현실 정치와 맞닿아 있지 않는 영화는 비윤리적인가? 최종적 메시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영화가 쌓아올린 치열한 표정들, 기존 일제강점기 영화들의 문법을 비틀고, 의심하고 재구현하는 영화적 질문들 보아야 한다. 엄혹한 세상에서 자기 성찰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던 어느 시인을, 시인과 닮은 성찰의 형식으로, 지금 이 자리에 되살리려는 태도. 이것이 우리가 영화 〈동주〉를 봐야 하는 이유다.
글 박우성(영화평론가) / 사진 〈동주〉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