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만담]순례가 아니라도 만담이 아니래도

무덤 만담 #1



오랜 시간을 두고 이만하면 꽤 적절하다 싶은 이유를 만들어 놓았지만, 너무 공들인 티가 나서였을까? 누굴 만나도 먹히질 않았다. 꿈에 만난대도 말 한마디 못 나눌 외국인들의 무덤을 찾아다녔다. 유일하게 그들 손이 타지 않은 지상 마지막 흔적을 보러 비행기도 타고 기차도 타고 버스도 타고 했더랬다. 무덤의 주인들, 그러니까 대리석이나 흙 봉분 아래 유골들은 대개 고인이 되고 나서야 작품으로 알게 된 작가들이었다. 내게는 처음부터 그들 인생 자체가 작품이었던지라 무덤을 보기 전까지는 그들이 지구상의 공간을 점유하고 실존했던 육체라는 사실이 잘 와 닿지 않았다. 물론 머리로는 알았다. 머리로 아는 데는 익룡이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든 석가든 예수든 한계가 분명할수록 주변의 근심이 커질 테니까.


무덤을 찾아가 사흘 만에 부활하지 못한 육체가 끝내 안장되고 말던 순간을 되짚다 보면 그가 인간이었다는 면에서만큼은 나와 같았다는 것을 아주 약간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살아온 인생으로 봐서는 앞으로도 절대 기대해선 안 될 ‘인간의 위대한 삶’이란 게 정말로 실재하고 있었구나, 아무렴, 이 비루한 인생이 부활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들의 무덤 앞에서 나의 애석한 최후가 느닷없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삶이 온갖 순간적이고 쾌락적인 장치들로 눈앞을 홀려 나, 나의 가족, 심지어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음조차 믿을 수 없을 만치 허황된 거짓인 것처럼 꾸며대더라도, 위대한 인간의 묘비 앞에 서면 죽음만이 명백한 사실이었고, 삶은 허망, 허상이었다.


헨릭 입센, 사르트르, 고흐, 에디트 피아프, 나쓰메 소세키, 윤동주, 프란체스코, 세종, 허난설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가묘. 명절마다 할머니 묫자리를 헷갈려 하면서 먼 데서 먼저 가신 분들의 묘는 꼼꼼하게도 찾아냈다. 딱히 그 방문을 순례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수백 기는 넘을 듯한 공동묘지에서 비석 하나를 찾는 일만큼 절실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경험도 드물었고, 꼭 찾고 말겠다는 의지가 생기니 그 나름 경건해지기도 했다.


입센의 묘


사실 피상적인 경험을 넘어서는 여행을 다녀 본 적도 없다. 미술품을 보고 음악회를 가고 기품 있는 장소들을 지나치고. 명망 있는 수집품이 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항상 구내식당 식단 같은 나였고, 점진적인 퇴보를 늦추거나 감추고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세상 외피 단편들을 오해로 꿰맞춰 기억하기도 하고 기록하기도 하고 자랑도 하다 보니, 아 이제는 젊지 않구나, 불현듯 숫자의 습격을 받고 말았다. 그럼 이참에 이제까지의 일들을 다 순례로 둔갑시켜 보자, 어떠한가? 근데 뭐랄까, 나 자신이든 신이든 무엇을 섬기는 마음 같은 것 없이도 순례가 되는 걸까? 어쩐다, 더 늦기 전에 예수나 부처같이 다 이루었다 말하고 떠난 사람들의 무덤이라도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닐까? 그간 여행을 적게 다닌 것도 아니니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망설일 것 없이, 바야흐로 순례의 해를 살아보는 거다.


그러나 곧 내가 넘어설 수 없는 두 가지 난제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하나는 예수가 중동에서 죽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처가 인도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왜 하필 그 두 곳일까, 중동도 인도도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예수는 무덤이 없었고, 있어서도 안 됐다. 부활하시지 않았나. 할렐루야, 남북 긴장에 버금가는 생의 위협을 하나 더 추가해야 하는 근심이 사라졌다. 아직까지 별다른 계시가 없는 걸로 보아 신이 나를 요나처럼 긴요하게 쓰실 계획은 없으셨던 모양새다.


그러면 이제 부처가 입멸한 인도 쿠시나가르, 여기는 어쩔 것인가? 한 달 남짓 인도에서 심신이 곯다 돌아와 내방 침대에 엎어진 감격으로 베갯잇을 적시던 때가 겨우 13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연속되는 흥정, 공공연한 비명횡사, 훗날의 인연을 빙자한 무자비, 사기, 한계를 알 수 없는 연착. 절대 어느 것 하나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그런데 이것도 의외로 해결이 간단했다. 부처의 묘는 8만 4천 개나 되고, 한국에도 적멸보궁이라는 보증된 무덤이 다섯 곳이나 있다. 여차여차 설화를 갖다 붙인 뼈 무덤까지 하면 열 개는 족히 된다. 내가 일일이 접골을 할 것도 아니고 오대산 상원사, 양산 통도사, 정선 정암사, 영월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 다섯 곳이면 충분하다. 게다가 통도사, 상원사는 이미 다녀왔다. 더 나이 들어 느닷없이 산이 좋아질 날이 오기까지 설악산 봉정암 등반을 미뤄두면, 남은 곳은 정암사와 법흥사 두 곳뿐이다.


정암사 적멸궁


문밖을 나서는 순간 이러다 얼마 못 가 적멸하겠다 싶은 추위에 휩싸였던 1월 1일 오후, 정선군 고한 터미널에 내렸다. 당장 깁스를 하지 않으면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추위라 주위를 둘러볼 것도 없이 얼른 택시 뒷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첫 순례지, 정암사로 가달라 했다. 초하루니 절에 가면 절밥을 주지 않겠냐는 찐 감자 포슬포슬한 조언은 내 취향을 전혀 모르는 소리. 나는 이미 정선 장에 가서 배추전에 옥수수 막걸리를 마시며 순례의 참뜻을 되새겨 보겠다는 생각으로 설레고 있었다. 아우라지 옥산장 여관의 뜨끈한 방에 앉아 뭐라도 더 마시게 된다면 집 나온 지 일곱 시간, 객지의 울적한 회한도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처가 떠난 자리를 마주한 사람치고는 경박한 진행이 아니겠냐는 자각이 들 만큼 신실한 마음은 생겨나지 않으니 참으로 다복한 인생이다.


택시비 만 원, 산길을 달린 것치고는 다행스러운 금액이었다. 하루 두 대의 버스가 지나는 산골 어귀, 막차는 두 시에 떠났다. 앞 좌석에 적힌 아리랑콜 전화번호를 저장해 둔다. 몸이 식기 전에 얼른 수마노탑까지 올라갔다 오고 싶지만, 황태가 아니고선 적수가 없을 바람에 예상보다 일찍 몸이 식어 간다. 수마노탑은 섬세하고 아름다웠고, 추우면 꺼져 버리는 아이폰에 다시 온기를 불어넣어 사진을 찍기까지 몇 차례 경건한 공백을 지내야 했다.


정암사 수마노탑


부처의 진신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에는 불상을 두지 않는 법이라 빈 연화대만 마주하고 앉았기도 처음이었다. 사실 절에 와서 방에 앉는 것도 드문 일이다. 콜택시가 오려면 15분 정도를 기다려야 하니 순례가 착실해진다. 금박을 입힌 모카 빵 같은 부처가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 곳에서 욕망, 공포, 집착 가득한 기도를 올리다 보면 지레 멋쩍어질 법도 한데. 빈 연화대 위에 간절하고 불안하고 초라한 심정을 올려놓는다. 그대로 텅 비어 버릴 것 같다. 적막한 그대로가 쓸쓸하긴 해도 홀가분하다.


택시가 올 때쯤 되지 않았을까? 절 문 가까이 나가자 때맞춰 10분 뒤 도착한다는 전화가 온다. 온갖 안내 표지판을 두 번씩 읽었는데도 10분은 더디 흐르고, 자장, 자장, 한국의 적멸보궁은 부처가 아니라 신라 승려 자장의 행적을 기리는 곳이란 걸 알게 된다. 안내문마다 자장, 자장, 여기서 잠들면 죽어, 머리와 입으로 만담을 주고받으며 나의 무덤 순례 대상이 부처에서 자장으로 교체되어 간다. 자장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어쩐지 정암사 순례가 자장의 인생, 그 굴곡진 마디를 잘도 짚은 것 같다는 예감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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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 『도쿄적 일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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