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aipei |
타이베이에서 우리도 원칭(文青)이 되어보자
원칭(文青)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는지. 문화 청년(文化青年)의 줄임말로, 책과 음악, 영화를 사랑하며 아날로그적 감성을 소중히 여기는, 감성적이고 예술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이르는 대만의 유행어다. 원칭이 주로 머무는 공간은 소형 서점, 개인이 운영하는 카페, 소규모 전시회나 독립 영화관. 이들은 자신의 취향을 삶의 중심에 놓고 느리지만 소박하고, 감성적이면서도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즐긴다. 최근 ‘대만 감성’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타이베이야말로 이런 원칭들을 위한, 원칭들에 의한 도시가 아닐까.
대만의 원칭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문구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곳 타이베이에는 '문구점'이라는 단어 하나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가게들이 있다. 잡다한 상품을 빼곡히 진열해 놓은 일반 문구점과는 달리, 단 하나의 아이템에 집중하며 그 안에 담긴 취향과 이야기를 곱씹게 만드는 공간들이다. 만듦새 좋은 만년필, 손 글씨로 쓴 엽서, 감각적인 포스터,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도장으로 일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터.
오늘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기록하는 것을 사랑해 마지않는 원칭 여행자를 위한 문구 전문점들을 한데 모았다. 이 도시 구석구석에 숨겨진 문구를 사랑하는 이들의 아지트 속에서 마치 당신을 오래 기다려온 듯 조용히 숨어 있던 보물을 만나고, 자신의 취향을 천천히 되짚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소품아집
타이베이라는 도시에 살포시 책갈피를 끼워 둔 듯 소중한 공간이 있다. 다안구의 조용한 주택가 골목, 그 한켠에 자리 잡은 만년필 전문점 소품아집(小品雅集). ‘작고 소박한 물건(小品)’과 ‘우아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雅集)’를 뜻하는 가게의 이름처럼 이곳은 아름다우면서도 기능적인 만년필만을 오롯이 다루는 공간이다. 수만 자루에 이르는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기에 만년필 애호가들 사이에선 만년필계의 전문 백화점이라 불리는 곳.
소품아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공간의 사면을 가득 채운 유리 진열장 속 만년필들이 각자의 존재감을 뿜어낸다. 세계 각국의 명품 만년필부터, 초보자들도 접근하기 쉬운 브랜드, 희귀한 리미티드 에디션까지. 곳곳에는 펜촉 부품, 시필용 종이가 함께 놓여 있으며 만년필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 나누는 손님과 직원들이 어우러져 있어, 어쩐지 만년필 동호회에 온 듯한 기분마저 든다.
특히 인상적인 건 펜을 팔기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경험하게 하는 공간이라는 게 느껴진다는 점. 만년필을 직접 써볼 수 있는 시필 공간은 물론, 펜촉 조정, 세척, 수리까지 가능한 전문가 서비스도 운영한다. 시필을 요청하면 직원의 친절하고 전문적인 조언과 함께 원하는 펜을 마음껏 사용해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브랜드는 대만 브랜드인 트위스비(TWSBI). 투명한 보디가 시그니처인 트위스비 만년필은 잉크의 색과 양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시각적 만족감이 큰 데다가 가성비까지 뛰어나 입문자들에게 특히 사랑받는 브랜드. 인생 첫 만년필을 찾는 사람에게 손색이 없다. 만년필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하고 싶은 여행자라면 이곳 소품아집에서 트위스비를 시필해보는 경험을 놓치지 말길.

대만 브랜드 만년필 트위스비(TWSBI)
1층에서 만년필을 충분히 구경했다면, 지하로 향해보자. 소품아집의 지하는 마치 또 다른 세계처럼 종이와 잉크로 가득하다. 다양한 크기와 용도로 쓸 수 있는 노트는 물론, 세계 각국의 병잉크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다양한 잉크를 구경하니 한국 브랜드도 있다면서 직원이 소개해 준다. 보면서 마음에 드는 잉크가 있다면 직원에게 잉크 색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컬러차트를 보여달라고 하면 된다.

지하의 잉크 판매대
디지털 기록이 대세인 시대에도 오직 만년필 하나로 20년이 넘는 세월을 묵묵히 이어온 소품아집은 만년필이 지닌 본질적인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만년필은 빠르고 효율적인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천천히 생각하고, 느리게 써 내려가는 즐거움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빠름이 미덕이 된 시대, 느림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게 해주는 곳인 소품아집에 더 오래 머물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소품아집 (TY Lee Pens, 小品雅集)
주소 : 台北市大安區復興南路二段78巷76號一樓
영업 시간 : 오후 12:00~10:00 (일요일 휴무)
홈페이지 : www.tylee.tw

워즈의 입구
울창한 가로수가 그늘을 드리운 푸진제 거리. 낯익은 듯 평범한 3층짜리 아파트 앞 빨간 대문이 눈에 띈다. 간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2층 초인종을 누르자, 철컥-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린다. 조심스레 계단을 오르는 사이, 마음속엔 묘한 떨림이 느껴진다.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건 사장님의 유쾌한 인사. 풍성한 수염만큼이나 따뜻한 미소의 그는 내가 처음 온 손님임을 눈치채고는 유창한 영어로 이곳을 소개한다. 이 특별한 공간은 바로 대만 최대 규모의 엽서 전문점, 워즈(Words).

워즈의 내부
매장 안은 테마별로 정성스럽게 분류된 4,000여 종의 축하 카드와 엽서가 한가득이라 어디서부터 구경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다. 방대한 양의 엽서를 동식물, 화가, 캐릭터 등 주제별로 서랍에 정리해 놓았는데, 서랍마다 꼼꼼히 붙여 놓은 라벨링을 보면 주인이 얼마나 이 공간에 애정을 쏟았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다. 엽서만 있는 건 아니다. 주인의 수집욕은 펜, 잉크, 지우개 등 그 분야를 넘나든다. 매장을 구경하다 보면 100대가 넘는 연필깎이 컬렉션이 눈에 띄는데 그중 일부는 백 년 넘은 골동품이라고.
개인적으로 흥미를 끌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엽서가 아닌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향이었다. 평소 향을 즐겨 사는지라 매장을 둘러보다가 눈에 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했던 것. 3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교토의 로컬 향 브랜드인 송영당(松栄堂)으로, 향 덕후들 사이에선 이미 잘 알려진 송영당의 제품들이 뜻밖에도 엽서 전문점을 표방하는 이곳에 꽤 다양한 라인업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호기심에 주인에게 이유를 묻자, 뜻밖의 이야기가 돌아왔다. 미국 유학 시절 떠났던 일본 여행에서 송영당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주인. 그 이후 오랜 시간 애정을 이어오다, 매장을 열고 나서도 향만큼은 정말 좋아하는 브랜드를 직접 사용하고 싶었다고. 그렇게 이곳에서 송영당의 향을 다루기 시작한 지도 벌써 5년이 넘었단다.

워즈의 송영당 코너
향에 대한 공통된 애정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던 중, 주인은 류이치 사카모토가 생전에 특별히 아꼈다는 희귀한 향 ‘정각(正覚)’까지 선뜻 꺼내 보였다. 지금은 일본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그 향을 소중히 펼쳐 보이며 주인은 말했다. “예전에 송영당 관계자가 대만에 왔을 때, 미팅 자리에서 어렵사리 부탁해 한 상자를 받아뒀죠.” 엽서와 향,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아이템이지만, 자신만의 취향과 열정으로 빚어낸 이 공간 안에서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워즈에서 만난 송영당의 희귀한 향, 정각
다시 엽서 전문점이라는 제자리로 돌아와서 소개를 이어가자. 마음에 쏙 드는 엽서를 골랐다면 매장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푸진제의 싱그러운 녹음을 바라보며 천천히 글을 적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지. 다양한 종류의 펜을 무료로 빌려 쓸 수 있고, 원한다면 대리 우편 서비스까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디지털 메시지가 넘쳐나는 시대, 여행 중 누군가에게 손 글씨로 마음을 전하는 일은 어쩌면 고리타분한 낭만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심해서 고른 엽서 위에 펜촉이 닿는 감촉, 천천히 단어를 골라 쓰는 순간은 이곳에서만 가능한 유일무이한 경험이다. 그러니 잠시 멈추어 그 시간을 온전히 누려보시길.
워즈 (Words, 我思文創)
주소 : 台北市富錦街376號2樓
영업 시간 : 오후 3:30~8:00 (평일), 오후 1:00~7:00 (주말), 화/수 휴무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words_studio_tw/#
리소그라프 뮤지엄 (Risograph Museum)
|

리소그라프 뮤지엄 타이베이 입구
리소그라프 뮤지엄은 대만 타이중에 처음으로 문을 연 리소그라프 인쇄 전문 공간이다. 한글로 음차했을 때 표기가 같아 석판화(Lithograhy)와 혼동하기 쉬운 리소그라프(Risograph)는 일본 RISO사에서 개발한 디지털 공판인쇄기로 실크스크린처럼 색을 하나씩 겹쳐 종이에 전사하는 인쇄 방식을 말한다. 완벽하게 제어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독특한 질감과 예측할 수 없는 색의 조합을 만들어지며, 이로 인해 정교함보다는 우연성과 물성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리소그라프의 매력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를 유유히 넘나드는 그 불완전함에 있다. 색이 살짝 어긋나거나 번지고 잉크가 종이에 눅진하게 스며드는 모든 요소가 작품에 따뜻한 손맛을 더해 준다. 형광색, 금색 등 일반 인쇄에선 보기 어려운 강렬한 색감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소량 인쇄에 적합해 주로 엽서, 포스터, 독립 출판물을 제작하려는 독립 창작자들이 자주 찾는다.

리소그라프 뮤지엄 내부
중산역의 북적이는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난 조용한 골목에 자리한 리소그라프 뮤지엄. 이곳은 리소그라프 인쇄의 매력을 알리고 전 세계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이 각자의 감각으로 풀어낸 작품을 선보이는 문화 플랫폼이다. 방문객은 아티스트들의 손길이 담긴 독립출판물, 엽서, 포스터, 굿즈 등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들여다보며, 리소 특유의 감각적인 세계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모든 작품에는 넘버링이 되어 있어 소장하는 순간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함이 더해진다. 통통 뛰는 개성으로 가득한 리소그라프 작품들을 보다 보면 단순한 전시나 소비를 넘어, 개성 넘치는 창작자들에 대한 존중과 리소그라프에 대한 애정이 이 공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리소그라프 뮤지엄의 다양한 리소 인쇄 제품들
같은 골목엔 리소그라프 인쇄 공방도 있어 다양한 워크숍이 비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인쇄를 직접 체험해 보고 싶다면 인스타그램을 통해 워크숍 소식을 확인해 볼 것. 시간만 맞는다면 운 좋게 참여할 수도 있다. 거대한 인쇄기를 거쳐 나오는 종이 위에 우연히 겹친 잉크들의 아름다운 충돌이 당신을 사로잡을 이곳, 리소그라프 뮤지엄에서 디자인을 소비하기만 하는 뻔한 여행 대신, 내가 직접 창작의 주체가 되어 나만의 디자인을 만들어 보는 특별한 여행을 해 보는 건 어떨지.
리소그라프 뮤지엄 (Risograph Museum)
주소 : 台北市大同區延平北路一段69巷14號
영업 시간 : 오후 2:00~6:00 (수/목/일 휴무)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risomuseum/#
일간인쇄항 (aletterpress, 一間印刷行)
|

일간인쇄항(aletterpress) 외관
앞서 소개한 리소그라프 뮤지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곳을 찾기 위해 낯선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어딘가 낯익은 풍경과 마주친다. 먼 이국의 거리 한복판에서 문득 느껴지는 기시감은 어쩌면 서울 을지로를 닮은 거리의 표정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철물점, 생활 잡화점, 유리문 너머 어렴풋이 비치는 작업장들. 왠지 모르게 익숙한 풍경을 지나 조용한 골목 안으로 접어들면, 하얀 바탕에 검은 한자가 인상적인 간판을 내건 ‘일간인쇄항(一間印刷行)’이 모습을 드러낸다.

벽을 채운 금속 활자
직역하면 ‘한 칸짜리 인쇄소’라는 뜻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 칸 이상의 광활한 세계가 펼쳐진다. 공간을 가득 채운 건 정갈하게 정리된 금속 활자와 벽면 가득 촘촘히 붙어 있는 명함들. 종이 질감도, 글자 크기도, 글자체도 저마다 다르다. 한쪽에는 용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기계들이 걸려 있고, 공기 중에는 가게 한구석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인쇄기가 뿜어내는 은근한 기름 냄새가 배어 있는 듯하다.

벽에 붙여 놓은 명함들
일간인쇄항의 오너는 디지털 인쇄가 일상이 된 시대에 사라져가던 활판 인쇄를 다시 되살려 보고자 했다. 쉽지 않은 그 여정의 출발점은 같은 골목에 있는 ‘일성주자소(日星鑄字行)’. 1969년에 문을 연 이곳은 대만에 남아 있는 마지막 활자 주조소이자,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고딕체, 해체, 송체의 번체 활자를 만드는 곳이다. 그는 무수히 쌓인 일성주자소의 금속 활자 앞에서 컴퓨터 자판에선 느낄 수 없던 활자의 무게와 실체적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결국 누구나 쉽게 들고 다니며 인쇄할 수 있는 휴대용 활판 인쇄기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일간인쇄항의 오너가 앞서 열었던 활자 주조소 일성주자소. 전 세계 유일의 번체자 활자를 제작한다.
그렇게 만든 인쇄기는 매장에 전시되어 있으며 구입도 가능하다. 작은 나무 상자처럼 생긴 이 기기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 인쇄할 수 있다. 대만산 히노키 나무로 제작된 본체 안에 넣을 활자를 고르고, 잉크를 묻힌 뒤 롤러로 종이를 밀어내면 끝이다. 직원에게 부탁하면 사용법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설명을 따라 활자에 잉크를 묻히고 조심스레 밀어내니, ‘대만’이라는 한자와 대만 지도, 귀여운 파인애플 문양이 종이 위에 선명히 찍혀 나온다. 안의 글자는 자기 마음대로 조합이 가능하며, 활자는 일성주자소의 활자를 가져다 쓴다고 한다.

휴대용 활판 인쇄기
나중에 알고 보니 일간인쇄항의 오너는 휴대용 활판 인쇄기를 만들기 위해 근처에 있는 철물점 밀집 지역인 다톄제(打鐵街)의 골목을 직접 발로 뛰며 연마 장인, 목공, 금속 가공 기술자를 하나하나 찾아다녔다고 한다. 많은 장인의 도움으로 완성된 이 작은 상자는 단순한 인쇄기를 넘어 전통 인쇄 기술의 정수를 고스란히 담아낸 하나의 예술품이 되었다. 사라져가는 기억을 영원히 붙잡아 둔 이 인쇄기는 타이베이 여행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해줄 특별한 기념이 되기에 충분하다.

활자를 조합할 수 있다.
장인의 손끝에서 태어난 정교한 활자와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해진 인쇄기는 먼 이국땅에서 예상치 못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일간인쇄항을 찾는다는 것은 단지 옛 물건에 대한 향수에 젖기 위함이 아니라, 과거의 지혜 속에서 새로운 창작의 영감을 발견하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일간인쇄항 (aletterpress, 一間印刷行)
주소 : 台北市大同區太原路97巷12號1樓
영업 시간 : 오전 10:30~오후 6:00 (월/일 휴무)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aletterpress/#
글·사진 | 최보옥

대학 졸업 후, 한국을 떠나 대만에 살며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 10년차 한국어 강사, 채식주의자, 결혼 이민자. 대만 생활에서 길어 올린 글들을 블로그에 차곡차곡 모아두는 것이 취미다. <타이베이 산친구>를 썼다.
타이베이 산친구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9283241
blog.naver.com/choibo_ok
편집 | 이주호 · 신태진 에디터
| Taipei |
타이베이에서 우리도 원칭(文青)이 되어보자
원칭(文青)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는지. 문화 청년(文化青年)의 줄임말로, 책과 음악, 영화를 사랑하며 아날로그적 감성을 소중히 여기는, 감성적이고 예술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이르는 대만의 유행어다. 원칭이 주로 머무는 공간은 소형 서점, 개인이 운영하는 카페, 소규모 전시회나 독립 영화관. 이들은 자신의 취향을 삶의 중심에 놓고 느리지만 소박하고, 감성적이면서도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즐긴다. 최근 ‘대만 감성’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타이베이야말로 이런 원칭들을 위한, 원칭들에 의한 도시가 아닐까.
대만의 원칭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문구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곳 타이베이에는 '문구점'이라는 단어 하나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가게들이 있다. 잡다한 상품을 빼곡히 진열해 놓은 일반 문구점과는 달리, 단 하나의 아이템에 집중하며 그 안에 담긴 취향과 이야기를 곱씹게 만드는 공간들이다. 만듦새 좋은 만년필, 손 글씨로 쓴 엽서, 감각적인 포스터,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도장으로 일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터.
오늘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기록하는 것을 사랑해 마지않는 원칭 여행자를 위한 문구 전문점들을 한데 모았다. 이 도시 구석구석에 숨겨진 문구를 사랑하는 이들의 아지트 속에서 마치 당신을 오래 기다려온 듯 조용히 숨어 있던 보물을 만나고, 자신의 취향을 천천히 되짚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소품아집 (TY Lee Pens, 小品雅集)
소품아집
타이베이라는 도시에 살포시 책갈피를 끼워 둔 듯 소중한 공간이 있다. 다안구의 조용한 주택가 골목, 그 한켠에 자리 잡은 만년필 전문점 소품아집(小品雅集). ‘작고 소박한 물건(小品)’과 ‘우아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雅集)’를 뜻하는 가게의 이름처럼 이곳은 아름다우면서도 기능적인 만년필만을 오롯이 다루는 공간이다. 수만 자루에 이르는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기에 만년필 애호가들 사이에선 만년필계의 전문 백화점이라 불리는 곳.
소품아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공간의 사면을 가득 채운 유리 진열장 속 만년필들이 각자의 존재감을 뿜어낸다. 세계 각국의 명품 만년필부터, 초보자들도 접근하기 쉬운 브랜드, 희귀한 리미티드 에디션까지. 곳곳에는 펜촉 부품, 시필용 종이가 함께 놓여 있으며 만년필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 나누는 손님과 직원들이 어우러져 있어, 어쩐지 만년필 동호회에 온 듯한 기분마저 든다.
특히 인상적인 건 펜을 팔기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경험하게 하는 공간이라는 게 느껴진다는 점. 만년필을 직접 써볼 수 있는 시필 공간은 물론, 펜촉 조정, 세척, 수리까지 가능한 전문가 서비스도 운영한다. 시필을 요청하면 직원의 친절하고 전문적인 조언과 함께 원하는 펜을 마음껏 사용해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브랜드는 대만 브랜드인 트위스비(TWSBI). 투명한 보디가 시그니처인 트위스비 만년필은 잉크의 색과 양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시각적 만족감이 큰 데다가 가성비까지 뛰어나 입문자들에게 특히 사랑받는 브랜드. 인생 첫 만년필을 찾는 사람에게 손색이 없다. 만년필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하고 싶은 여행자라면 이곳 소품아집에서 트위스비를 시필해보는 경험을 놓치지 말길.
대만 브랜드 만년필 트위스비(TWSBI)
1층에서 만년필을 충분히 구경했다면, 지하로 향해보자. 소품아집의 지하는 마치 또 다른 세계처럼 종이와 잉크로 가득하다. 다양한 크기와 용도로 쓸 수 있는 노트는 물론, 세계 각국의 병잉크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다양한 잉크를 구경하니 한국 브랜드도 있다면서 직원이 소개해 준다. 보면서 마음에 드는 잉크가 있다면 직원에게 잉크 색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컬러차트를 보여달라고 하면 된다.
지하의 잉크 판매대
디지털 기록이 대세인 시대에도 오직 만년필 하나로 20년이 넘는 세월을 묵묵히 이어온 소품아집은 만년필이 지닌 본질적인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만년필은 빠르고 효율적인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천천히 생각하고, 느리게 써 내려가는 즐거움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빠름이 미덕이 된 시대, 느림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게 해주는 곳인 소품아집에 더 오래 머물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워즈 (Words, 我思文創)
워즈의 입구
울창한 가로수가 그늘을 드리운 푸진제 거리. 낯익은 듯 평범한 3층짜리 아파트 앞 빨간 대문이 눈에 띈다. 간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2층 초인종을 누르자, 철컥-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린다. 조심스레 계단을 오르는 사이, 마음속엔 묘한 떨림이 느껴진다.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건 사장님의 유쾌한 인사. 풍성한 수염만큼이나 따뜻한 미소의 그는 내가 처음 온 손님임을 눈치채고는 유창한 영어로 이곳을 소개한다. 이 특별한 공간은 바로 대만 최대 규모의 엽서 전문점, 워즈(Words).
워즈의 내부
매장 안은 테마별로 정성스럽게 분류된 4,000여 종의 축하 카드와 엽서가 한가득이라 어디서부터 구경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다. 방대한 양의 엽서를 동식물, 화가, 캐릭터 등 주제별로 서랍에 정리해 놓았는데, 서랍마다 꼼꼼히 붙여 놓은 라벨링을 보면 주인이 얼마나 이 공간에 애정을 쏟았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다. 엽서만 있는 건 아니다. 주인의 수집욕은 펜, 잉크, 지우개 등 그 분야를 넘나든다. 매장을 구경하다 보면 100대가 넘는 연필깎이 컬렉션이 눈에 띄는데 그중 일부는 백 년 넘은 골동품이라고.
개인적으로 흥미를 끌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엽서가 아닌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향이었다. 평소 향을 즐겨 사는지라 매장을 둘러보다가 눈에 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했던 것. 3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교토의 로컬 향 브랜드인 송영당(松栄堂)으로, 향 덕후들 사이에선 이미 잘 알려진 송영당의 제품들이 뜻밖에도 엽서 전문점을 표방하는 이곳에 꽤 다양한 라인업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호기심에 주인에게 이유를 묻자, 뜻밖의 이야기가 돌아왔다. 미국 유학 시절 떠났던 일본 여행에서 송영당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주인. 그 이후 오랜 시간 애정을 이어오다, 매장을 열고 나서도 향만큼은 정말 좋아하는 브랜드를 직접 사용하고 싶었다고. 그렇게 이곳에서 송영당의 향을 다루기 시작한 지도 벌써 5년이 넘었단다.
워즈의 송영당 코너
향에 대한 공통된 애정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던 중, 주인은 류이치 사카모토가 생전에 특별히 아꼈다는 희귀한 향 ‘정각(正覚)’까지 선뜻 꺼내 보였다. 지금은 일본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그 향을 소중히 펼쳐 보이며 주인은 말했다. “예전에 송영당 관계자가 대만에 왔을 때, 미팅 자리에서 어렵사리 부탁해 한 상자를 받아뒀죠.” 엽서와 향,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아이템이지만, 자신만의 취향과 열정으로 빚어낸 이 공간 안에서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워즈에서 만난 송영당의 희귀한 향, 정각
다시 엽서 전문점이라는 제자리로 돌아와서 소개를 이어가자. 마음에 쏙 드는 엽서를 골랐다면 매장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푸진제의 싱그러운 녹음을 바라보며 천천히 글을 적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지. 다양한 종류의 펜을 무료로 빌려 쓸 수 있고, 원한다면 대리 우편 서비스까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디지털 메시지가 넘쳐나는 시대, 여행 중 누군가에게 손 글씨로 마음을 전하는 일은 어쩌면 고리타분한 낭만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심해서 고른 엽서 위에 펜촉이 닿는 감촉, 천천히 단어를 골라 쓰는 순간은 이곳에서만 가능한 유일무이한 경험이다. 그러니 잠시 멈추어 그 시간을 온전히 누려보시길.
리소그라프 뮤지엄 (Risograph Museum)
리소그라프 뮤지엄 타이베이 입구
리소그라프 뮤지엄은 대만 타이중에 처음으로 문을 연 리소그라프 인쇄 전문 공간이다. 한글로 음차했을 때 표기가 같아 석판화(Lithograhy)와 혼동하기 쉬운 리소그라프(Risograph)는 일본 RISO사에서 개발한 디지털 공판인쇄기로 실크스크린처럼 색을 하나씩 겹쳐 종이에 전사하는 인쇄 방식을 말한다. 완벽하게 제어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독특한 질감과 예측할 수 없는 색의 조합을 만들어지며, 이로 인해 정교함보다는 우연성과 물성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리소그라프의 매력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를 유유히 넘나드는 그 불완전함에 있다. 색이 살짝 어긋나거나 번지고 잉크가 종이에 눅진하게 스며드는 모든 요소가 작품에 따뜻한 손맛을 더해 준다. 형광색, 금색 등 일반 인쇄에선 보기 어려운 강렬한 색감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소량 인쇄에 적합해 주로 엽서, 포스터, 독립 출판물을 제작하려는 독립 창작자들이 자주 찾는다.
리소그라프 뮤지엄 내부
중산역의 북적이는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난 조용한 골목에 자리한 리소그라프 뮤지엄. 이곳은 리소그라프 인쇄의 매력을 알리고 전 세계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이 각자의 감각으로 풀어낸 작품을 선보이는 문화 플랫폼이다. 방문객은 아티스트들의 손길이 담긴 독립출판물, 엽서, 포스터, 굿즈 등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들여다보며, 리소 특유의 감각적인 세계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모든 작품에는 넘버링이 되어 있어 소장하는 순간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함이 더해진다. 통통 뛰는 개성으로 가득한 리소그라프 작품들을 보다 보면 단순한 전시나 소비를 넘어, 개성 넘치는 창작자들에 대한 존중과 리소그라프에 대한 애정이 이 공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리소그라프 뮤지엄의 다양한 리소 인쇄 제품들
같은 골목엔 리소그라프 인쇄 공방도 있어 다양한 워크숍이 비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인쇄를 직접 체험해 보고 싶다면 인스타그램을 통해 워크숍 소식을 확인해 볼 것. 시간만 맞는다면 운 좋게 참여할 수도 있다. 거대한 인쇄기를 거쳐 나오는 종이 위에 우연히 겹친 잉크들의 아름다운 충돌이 당신을 사로잡을 이곳, 리소그라프 뮤지엄에서 디자인을 소비하기만 하는 뻔한 여행 대신, 내가 직접 창작의 주체가 되어 나만의 디자인을 만들어 보는 특별한 여행을 해 보는 건 어떨지.
일간인쇄항 (aletterpress, 一間印刷行)
일간인쇄항(aletterpress) 외관
앞서 소개한 리소그라프 뮤지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곳을 찾기 위해 낯선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어딘가 낯익은 풍경과 마주친다. 먼 이국의 거리 한복판에서 문득 느껴지는 기시감은 어쩌면 서울 을지로를 닮은 거리의 표정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철물점, 생활 잡화점, 유리문 너머 어렴풋이 비치는 작업장들. 왠지 모르게 익숙한 풍경을 지나 조용한 골목 안으로 접어들면, 하얀 바탕에 검은 한자가 인상적인 간판을 내건 ‘일간인쇄항(一間印刷行)’이 모습을 드러낸다.
벽을 채운 금속 활자
직역하면 ‘한 칸짜리 인쇄소’라는 뜻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 칸 이상의 광활한 세계가 펼쳐진다. 공간을 가득 채운 건 정갈하게 정리된 금속 활자와 벽면 가득 촘촘히 붙어 있는 명함들. 종이 질감도, 글자 크기도, 글자체도 저마다 다르다. 한쪽에는 용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기계들이 걸려 있고, 공기 중에는 가게 한구석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인쇄기가 뿜어내는 은근한 기름 냄새가 배어 있는 듯하다.
벽에 붙여 놓은 명함들
일간인쇄항의 오너는 디지털 인쇄가 일상이 된 시대에 사라져가던 활판 인쇄를 다시 되살려 보고자 했다. 쉽지 않은 그 여정의 출발점은 같은 골목에 있는 ‘일성주자소(日星鑄字行)’. 1969년에 문을 연 이곳은 대만에 남아 있는 마지막 활자 주조소이자,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고딕체, 해체, 송체의 번체 활자를 만드는 곳이다. 그는 무수히 쌓인 일성주자소의 금속 활자 앞에서 컴퓨터 자판에선 느낄 수 없던 활자의 무게와 실체적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결국 누구나 쉽게 들고 다니며 인쇄할 수 있는 휴대용 활판 인쇄기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일간인쇄항의 오너가 앞서 열었던 활자 주조소 일성주자소. 전 세계 유일의 번체자 활자를 제작한다.
그렇게 만든 인쇄기는 매장에 전시되어 있으며 구입도 가능하다. 작은 나무 상자처럼 생긴 이 기기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 인쇄할 수 있다. 대만산 히노키 나무로 제작된 본체 안에 넣을 활자를 고르고, 잉크를 묻힌 뒤 롤러로 종이를 밀어내면 끝이다. 직원에게 부탁하면 사용법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설명을 따라 활자에 잉크를 묻히고 조심스레 밀어내니, ‘대만’이라는 한자와 대만 지도, 귀여운 파인애플 문양이 종이 위에 선명히 찍혀 나온다. 안의 글자는 자기 마음대로 조합이 가능하며, 활자는 일성주자소의 활자를 가져다 쓴다고 한다.
휴대용 활판 인쇄기
나중에 알고 보니 일간인쇄항의 오너는 휴대용 활판 인쇄기를 만들기 위해 근처에 있는 철물점 밀집 지역인 다톄제(打鐵街)의 골목을 직접 발로 뛰며 연마 장인, 목공, 금속 가공 기술자를 하나하나 찾아다녔다고 한다. 많은 장인의 도움으로 완성된 이 작은 상자는 단순한 인쇄기를 넘어 전통 인쇄 기술의 정수를 고스란히 담아낸 하나의 예술품이 되었다. 사라져가는 기억을 영원히 붙잡아 둔 이 인쇄기는 타이베이 여행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해줄 특별한 기념이 되기에 충분하다.
활자를 조합할 수 있다.
장인의 손끝에서 태어난 정교한 활자와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해진 인쇄기는 먼 이국땅에서 예상치 못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일간인쇄항을 찾는다는 것은 단지 옛 물건에 대한 향수에 젖기 위함이 아니라, 과거의 지혜 속에서 새로운 창작의 영감을 발견하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글·사진 | 최보옥
대학 졸업 후, 한국을 떠나 대만에 살며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 10년차 한국어 강사, 채식주의자, 결혼 이민자. 대만 생활에서 길어 올린 글들을 블로그에 차곡차곡 모아두는 것이 취미다. <타이베이 산친구>를 썼다.
타이베이 산친구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9283241
blog.naver.com/choibo_ok
편집 | 이주호 · 신태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