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않고 돌을 쪼고 깎습니다. 마치 고행 같은 작업의 반복 끝에 형태를 갖춘 조각이 나타나지요. 대리석 작품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백진기 조각가에게는 조각이 곧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올 한 해 활발한 전시 활동을 거쳐왔고 현재는 정문규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백진기 조각가를 만나 돌과 조각의 세계에 관해 들어보았습니다.
백진기 조각가
어려서부터 돌 조각을 좋아했어요. 흙으로 상을 빚는 소조 작업은 캐스팅이라는 과정을 꼭 거쳐야 해요. 원본을 만든 다음 거푸집 같은 것을 떠서 그 형태로 주조하는 방식이지요. 반면 돌 조각은 망치를 놓는 순간 그 작품이 마감돼요. 작가가 완벽하게 그 시작과 종료를 결정지을 수 있는 예술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존경하는 은사님, 선배님들 중 이탈리아에서 공부하셨던 분들이 전 방위에 포진해 계시기도 했고, 이탈리아가 워낙 돌 조각으로 유명하다 보니 돌 다루는 사람으로서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어요. 아푸안 알프스 산맥 끝자락 카라라(Carrara)로 유학을 갔는데, 그곳이 대리석으로 유명한 지역이에요. 도시 전체가 대리석 산업과 연관되어 있어서 아버지가 산에서 돌을 캐면 어머니는 마을에서 석공들이 가는 식당을 운영하고, 아들은 학교에서 돌 조각을 배우는 식이에요. 돌 조각을 하면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쓰는데, 거기는 도시 전체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요. 석산의 압도적인 장엄함과 그 아래 사람들의 생활을 보며 저도 돌을 만지는 사람으로 평생 살아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Organic Movement #7〉, 2021
저는 주로 추상, 비구상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저 역시 처음엔 구상 작업을 했지만, 정해진 도상과 비례 안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제약을 받는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어요. 그래서 제 작품 세계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더 자유로운 쪽으로, 추상적으로 변화를 주게 된 것 같아요.
제 작품들은 저라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탐구하는 흐름 안에 있어요. 실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것을 시각적인 결과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바람과 파도가 바위를 계속 쳐서 풍화혈을 만들잖아요. 그걸 보면 시간이 오래 축적된 조각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럼 구멍 난 돌이 조각의 본질일까요, 아니면 쉴 새 없이 돌을 깎은 바람과 파도가 실질적인 예술의 주체일까요?
〈Continuous Movement〉, 2022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파도와 바람이 계속 바위를 때리지만, 그 순간에는 구멍이 나는지 안 나는지 알 수 없어요. 아주 긴 시간이 지나야 어떤 형태의 풍화혈이 눈앞에 나타나게 되지요. 하루하루 내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가도 한참 시간이 흘러 내가 걸어온 길, 마주해 온 돌들을 보면 아, 내가 이런 삶을 살았구나 알게 돼요. 그런 사유를 거쳐 〈러싱 윈드(Rushing Wind)〉라는 조각을 만들기도 했어요. 보기에는 구멍이 숭숭 나 있고 외압에 형태가 변한 풍화혈 같은데, 사실 저는 이 작품으로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요.

〈Rushing Wind〉, 2022 / 백진기 제공
비구상 작품을 하다 보니 어떤 의도, 어떤 주제로 만든 작품인지 물어보시는 경우가 많아요. 작품명을 어떻게 짓는지도요. 사실 제 작업의 본체는 어떤 형태를 조각한다기보다 끊임없이 갈고 깎고 뚫고 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거예요. 그런 행위를 거듭하는 게 작가로서의 제 미래를 결정지어 줄 거로 생각해요. 그런 작업 과정이 일종의 고행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하지만 작가로서 잘 사는 방법은 작업을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지요. 흔히들 “작품 활동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들 이야기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열심히 하는 것, 제 신체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뚫고 파는 것. 그 와중에 저만의 의도와 방향성을 잡아 보는 것. 예컨대 어떤 운동감을 획득한다든가, 방사형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저도 하루하루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작품이라도 어제 했던 것과 오늘 하는 것, 그리고 그다음에 할 것들이 계속 달라져요. 생각이 달라지고, 시간이 달라지는 게 작품에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무엇보다 물체의 성질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의도대로 되지 않아요. 파괴되는 모양, 깨져 나가는 모양이 예측을 벗어날 때도 많아요. 우연성이지요. 제가 대리석을 완벽히 제어한다기보다는 계속 벌어지는 상황 안에서 저와 대리석이 함께 결과물을 도출해 나가는 거예요. 컨트롤한 결과와 우연으로 발생한 결과가 공존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기도 하고요. 이 역시 삶과 비슷해요. 우연이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는 거지요.

제 뒤 벽에 걸린 이 작품도 가까이 보면 점을 찍는 형태를 무한 반복한 거예요. 어떻게 보면 계속 돌에다 상처만 낸 거죠. 하지만 판을 붙여 큰 원형을 구성하고, 작은 터치로 만들어진 질감 하나하나가 전체적인 하나의 덩어리 안에서 보일 때, 그 이질적인 형상들은 하나의 조각 작품으로 완성됩니다.
조각을 보통 땅이나 좌대 위에 세워두는 작품으로 생각하지요. 방금 이 작품처럼 저는 벽에 거는 조각도 만들고 있어요. 저는 이걸 ‘조각적 드로잉(Sculptural Drawing)’이라고 표현해요. 제가 돌덩어리나 판에 뭘 계속 새기고 파는 작업을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느 순간 그게 꼭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런 이름을 붙여 봤어요.
백진기 조각가의 벽에 거는 조각, Sculptural Drawing
이런 작품을 만들기까지는 몇 가지 경험이 있었어요. 유학을 다녀오고 처음 아트페어에 참여했을 때, 관람객들이 다들 시선 높이의 벽만 쳐다보며 관람하더라고요. 바닥이나 좌대에 올려두어야 하는 조각의 특성상 벽에 거는 회화보다 눈에 덜 띌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서 미술품을 사려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 집 벽에 걸 수 있는 작품을 찾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거지요. 조각에는 무게, 집이라는 공간에서 차지하는 부피, 이런 본질적인 제약이 있으니까요. 작가 생활 초기, 전시에 참여하려면 작품을 제 차에 싣고 옮겨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제가 사람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조각의 크기나 무게가 제가 들어서 옮기고 차에 실을 수 있는 크기나 무게로 한정되더라고요.

조각으로 회화의 영역에 들어가면 어떨까? 벽에 쉽게 걸고 뗄 수 있는 조각은 어떨까? 계속 연구하고 보완하면서 세우는 입체적인 조각과 벽에 거는 조각을 두 트랙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여기 벽에 걸린 작품도 지름이 180cm로 150호가 넘는 크기이지만 아홉 개의 판으로 나누어 무게를 분산시켰고, 벽에 이어 붙여서 한 작품처럼 설치한 거예요. 이게 익숙해지니 조각을 이용한 공간 실험, 영역 실험도 하게 됐어요. 조각이라고 계속 좌대 위에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공중에 떠 있을 수도 있고, 바닥을 꽉 채워서 올라올 수도 있고. 이번 전시회에 전시한 〈갤럭시〉 같은 작품이 그래요. 조각으로 공간 연출을 하여 주제를 드러내 봤어요.

〈Galaxy〉
이탈리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대리석 산지가 있어요. 처음에는 작품 설명에 재료를 전부 ‘마블(대리석)’로만 썼는데, 지금은 산지까지 모두 표기하고 있어요. 산지마다 특징이 있거든요. 한국 대리석은 엄청 단단해서 화강석에 가까워요. 대리석은 원래 물을 흡수하는 흡수율이 높아서 오염이나 변질에 좀 취약한 편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 대리석은 딱딱해서 내구성이 높아요. 그만큼 경도 때문에 조각하기가 어렵지만요.
과테말라 대리석은 밀도가 아주 높아요. 그래서 굉장히 얇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합니다. 내구성도 좋고요. 이탈리아 대리석은 모든 수치가 표준이에요. 깎기도 좋고 변질도 잘 안 되고, 무엇보다 무늬가 굉장히 고르고 예뻐요. 원석 어떤 부분에 마블링이 모여 있고 어디에는 없고, 이런 게 없어요. 포르투갈 대리석은 분홍빛이 돌고, 인도산 대리석은 노란빛이 도는 게 특징에요.
작품을 만들 때 이런 대리석의 성질을 반영해요. 끊어지면 안 되는 섬세한 표현을 해야 하면 과테말라 대리석을 쓰고, 광택을 내고 예쁜 무늬를 보여주고 싶으면 이탈리아 대리석을 쓰고, 색감이 필요한 작품을 만들려면 포르투갈이나 인도 대리석을 쓰는 거지요.
포르투갈산 분홍빛 대리석을 쓴 조각
작품을 만들다 보면 거대한 돌도 다루게 되는데, 그럴 땐 건축 공법을 정확히 따라야 해요. 건축 장비와 도구를 확실히 익히고, 작업의 안정성을 위한 루틴을 만들어야 해요. 가끔 너무 몰입하다 보면 안전에 둔감해져서, 아, 이러다 큰일 나겠구나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많아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요.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왔지만, 아직 해 보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게 많아요. 끊임없이 뭔가를 갈구해야 하는 직업이니까요. 물론 프로젝트가 활발히 이루어지면 혼이 나가는 것 같고 작업이 곧 노동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하루하루 기계적으로 가서 망치질을 하다 보면 이게 내가 꿈꿔왔던 작업이 맞기는 한가 의문이 들기도 해요. 매너리즘에 빠지는 거죠.
그런데 일단 프로젝트가 정리되면 또 불안감이 엄습해요. 이제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으면 어쩌지? 이렇게 편하게 지내도 될까? 그런 마음이 드니까 휴가 같은 거 없이 작업장으로 나와 돌을 깎지요.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불안함이 저의 큰 원동력이에요. 미래를 알 수 없으니 우리가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 아닐까요? 더 이상 공구 도구를 들 수 없을 때까지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언젠가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조각을 하지 못하면, 그때까지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고요.

인터뷰 이주호, 신태진
쉬지 않고 돌을 쪼고 깎습니다. 마치 고행 같은 작업의 반복 끝에 형태를 갖춘 조각이 나타나지요. 대리석 작품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백진기 조각가에게는 조각이 곧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올 한 해 활발한 전시 활동을 거쳐왔고 현재는 정문규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백진기 조각가를 만나 돌과 조각의 세계에 관해 들어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돌 조각을 좋아했어요. 흙으로 상을 빚는 소조 작업은 캐스팅이라는 과정을 꼭 거쳐야 해요. 원본을 만든 다음 거푸집 같은 것을 떠서 그 형태로 주조하는 방식이지요. 반면 돌 조각은 망치를 놓는 순간 그 작품이 마감돼요. 작가가 완벽하게 그 시작과 종료를 결정지을 수 있는 예술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존경하는 은사님, 선배님들 중 이탈리아에서 공부하셨던 분들이 전 방위에 포진해 계시기도 했고, 이탈리아가 워낙 돌 조각으로 유명하다 보니 돌 다루는 사람으로서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어요. 아푸안 알프스 산맥 끝자락 카라라(Carrara)로 유학을 갔는데, 그곳이 대리석으로 유명한 지역이에요. 도시 전체가 대리석 산업과 연관되어 있어서 아버지가 산에서 돌을 캐면 어머니는 마을에서 석공들이 가는 식당을 운영하고, 아들은 학교에서 돌 조각을 배우는 식이에요. 돌 조각을 하면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쓰는데, 거기는 도시 전체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요. 석산의 압도적인 장엄함과 그 아래 사람들의 생활을 보며 저도 돌을 만지는 사람으로 평생 살아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저는 주로 추상, 비구상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저 역시 처음엔 구상 작업을 했지만, 정해진 도상과 비례 안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제약을 받는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어요. 그래서 제 작품 세계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더 자유로운 쪽으로, 추상적으로 변화를 주게 된 것 같아요.
제 작품들은 저라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탐구하는 흐름 안에 있어요. 실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것을 시각적인 결과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바람과 파도가 바위를 계속 쳐서 풍화혈을 만들잖아요. 그걸 보면 시간이 오래 축적된 조각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럼 구멍 난 돌이 조각의 본질일까요, 아니면 쉴 새 없이 돌을 깎은 바람과 파도가 실질적인 예술의 주체일까요?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파도와 바람이 계속 바위를 때리지만, 그 순간에는 구멍이 나는지 안 나는지 알 수 없어요. 아주 긴 시간이 지나야 어떤 형태의 풍화혈이 눈앞에 나타나게 되지요. 하루하루 내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가도 한참 시간이 흘러 내가 걸어온 길, 마주해 온 돌들을 보면 아, 내가 이런 삶을 살았구나 알게 돼요. 그런 사유를 거쳐 〈러싱 윈드(Rushing Wind)〉라는 조각을 만들기도 했어요. 보기에는 구멍이 숭숭 나 있고 외압에 형태가 변한 풍화혈 같은데, 사실 저는 이 작품으로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요.
비구상 작품을 하다 보니 어떤 의도, 어떤 주제로 만든 작품인지 물어보시는 경우가 많아요. 작품명을 어떻게 짓는지도요. 사실 제 작업의 본체는 어떤 형태를 조각한다기보다 끊임없이 갈고 깎고 뚫고 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거예요. 그런 행위를 거듭하는 게 작가로서의 제 미래를 결정지어 줄 거로 생각해요. 그런 작업 과정이 일종의 고행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하지만 작가로서 잘 사는 방법은 작업을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지요. 흔히들 “작품 활동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들 이야기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열심히 하는 것, 제 신체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뚫고 파는 것. 그 와중에 저만의 의도와 방향성을 잡아 보는 것. 예컨대 어떤 운동감을 획득한다든가, 방사형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저도 하루하루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작품이라도 어제 했던 것과 오늘 하는 것, 그리고 그다음에 할 것들이 계속 달라져요. 생각이 달라지고, 시간이 달라지는 게 작품에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무엇보다 물체의 성질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의도대로 되지 않아요. 파괴되는 모양, 깨져 나가는 모양이 예측을 벗어날 때도 많아요. 우연성이지요. 제가 대리석을 완벽히 제어한다기보다는 계속 벌어지는 상황 안에서 저와 대리석이 함께 결과물을 도출해 나가는 거예요. 컨트롤한 결과와 우연으로 발생한 결과가 공존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기도 하고요. 이 역시 삶과 비슷해요. 우연이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는 거지요.
제 뒤 벽에 걸린 이 작품도 가까이 보면 점을 찍는 형태를 무한 반복한 거예요. 어떻게 보면 계속 돌에다 상처만 낸 거죠. 하지만 판을 붙여 큰 원형을 구성하고, 작은 터치로 만들어진 질감 하나하나가 전체적인 하나의 덩어리 안에서 보일 때, 그 이질적인 형상들은 하나의 조각 작품으로 완성됩니다.
조각을 보통 땅이나 좌대 위에 세워두는 작품으로 생각하지요. 방금 이 작품처럼 저는 벽에 거는 조각도 만들고 있어요. 저는 이걸 ‘조각적 드로잉(Sculptural Drawing)’이라고 표현해요. 제가 돌덩어리나 판에 뭘 계속 새기고 파는 작업을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느 순간 그게 꼭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런 이름을 붙여 봤어요.
이런 작품을 만들기까지는 몇 가지 경험이 있었어요. 유학을 다녀오고 처음 아트페어에 참여했을 때, 관람객들이 다들 시선 높이의 벽만 쳐다보며 관람하더라고요. 바닥이나 좌대에 올려두어야 하는 조각의 특성상 벽에 거는 회화보다 눈에 덜 띌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서 미술품을 사려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 집 벽에 걸 수 있는 작품을 찾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거지요. 조각에는 무게, 집이라는 공간에서 차지하는 부피, 이런 본질적인 제약이 있으니까요. 작가 생활 초기, 전시에 참여하려면 작품을 제 차에 싣고 옮겨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제가 사람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조각의 크기나 무게가 제가 들어서 옮기고 차에 실을 수 있는 크기나 무게로 한정되더라고요.
조각으로 회화의 영역에 들어가면 어떨까? 벽에 쉽게 걸고 뗄 수 있는 조각은 어떨까? 계속 연구하고 보완하면서 세우는 입체적인 조각과 벽에 거는 조각을 두 트랙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여기 벽에 걸린 작품도 지름이 180cm로 150호가 넘는 크기이지만 아홉 개의 판으로 나누어 무게를 분산시켰고, 벽에 이어 붙여서 한 작품처럼 설치한 거예요. 이게 익숙해지니 조각을 이용한 공간 실험, 영역 실험도 하게 됐어요. 조각이라고 계속 좌대 위에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공중에 떠 있을 수도 있고, 바닥을 꽉 채워서 올라올 수도 있고. 이번 전시회에 전시한 〈갤럭시〉 같은 작품이 그래요. 조각으로 공간 연출을 하여 주제를 드러내 봤어요.
이탈리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대리석 산지가 있어요. 처음에는 작품 설명에 재료를 전부 ‘마블(대리석)’로만 썼는데, 지금은 산지까지 모두 표기하고 있어요. 산지마다 특징이 있거든요. 한국 대리석은 엄청 단단해서 화강석에 가까워요. 대리석은 원래 물을 흡수하는 흡수율이 높아서 오염이나 변질에 좀 취약한 편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 대리석은 딱딱해서 내구성이 높아요. 그만큼 경도 때문에 조각하기가 어렵지만요.
과테말라 대리석은 밀도가 아주 높아요. 그래서 굉장히 얇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합니다. 내구성도 좋고요. 이탈리아 대리석은 모든 수치가 표준이에요. 깎기도 좋고 변질도 잘 안 되고, 무엇보다 무늬가 굉장히 고르고 예뻐요. 원석 어떤 부분에 마블링이 모여 있고 어디에는 없고, 이런 게 없어요. 포르투갈 대리석은 분홍빛이 돌고, 인도산 대리석은 노란빛이 도는 게 특징에요.
작품을 만들 때 이런 대리석의 성질을 반영해요. 끊어지면 안 되는 섬세한 표현을 해야 하면 과테말라 대리석을 쓰고, 광택을 내고 예쁜 무늬를 보여주고 싶으면 이탈리아 대리석을 쓰고, 색감이 필요한 작품을 만들려면 포르투갈이나 인도 대리석을 쓰는 거지요.
작품을 만들다 보면 거대한 돌도 다루게 되는데, 그럴 땐 건축 공법을 정확히 따라야 해요. 건축 장비와 도구를 확실히 익히고, 작업의 안정성을 위한 루틴을 만들어야 해요. 가끔 너무 몰입하다 보면 안전에 둔감해져서, 아, 이러다 큰일 나겠구나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많아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요.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왔지만, 아직 해 보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게 많아요. 끊임없이 뭔가를 갈구해야 하는 직업이니까요. 물론 프로젝트가 활발히 이루어지면 혼이 나가는 것 같고 작업이 곧 노동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하루하루 기계적으로 가서 망치질을 하다 보면 이게 내가 꿈꿔왔던 작업이 맞기는 한가 의문이 들기도 해요. 매너리즘에 빠지는 거죠.
그런데 일단 프로젝트가 정리되면 또 불안감이 엄습해요. 이제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으면 어쩌지? 이렇게 편하게 지내도 될까? 그런 마음이 드니까 휴가 같은 거 없이 작업장으로 나와 돌을 깎지요.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불안함이 저의 큰 원동력이에요. 미래를 알 수 없으니 우리가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 아닐까요? 더 이상 공구 도구를 들 수 없을 때까지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언젠가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조각을 하지 못하면, 그때까지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고요.
인터뷰 이주호, 신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