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동베를린에서 온 사진가, 아르노 피셔 사진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 평화 대신 냉전의 시대가 열렸다. 패전국 독일은 미국과 소련 진영에 의해 서독과 동독으로 양분되었다. 수도였던 베를린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린은 지리상 동독 영토에 속해 있었지만, 다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나뉘며 한 도시에 두 정권이 들어섰다.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대립은 베를린을 일상의 공간이 아니라 첨예한 이념의 전장으로 만들었다. 1961년 동독 정부가 기습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세우면서 동베를린은 영영 ‘철의 장막’ 너머로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도대체 장벽 너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종로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아르노 피셔 – 동베를린의 사진가〉 展은 1950년대부터 동베를린에서 활약한 사진가 아르노 피셔의 작품을 소개한다. 아르노 피셔는 20세기 후반 사진사를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이름이지만, 대중에게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동독을 기반으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전시는 ‘베를린 상황’, ‘뉴욕’ ‘여행’, ‘패션’, ‘정원’ 다섯 개 테마로 구성된다. 여기서 울림이 가장 큰 테마는 1953년부터 10년 동안 동서로 분단된 베를린의 모습을 기록한 ‘베를린 상황’일 것이다.


동베를린, 1989년 12월 31일 ⓒEstate Arno Fischer, ifa / 전시 포토월에서 


아르노 피셔는 1957년까지 공식적인 사진 교육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전공은 조각이었다. 하지만 1943년 연합군의 공습으로 불타오르는 베를린을 사진으로 남겼을 정도로 그는 포토그래피라는 예술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알아보았고, 아마추어 시절부터 촬영에 열의를 보였다.


불길에 휩싸인 베를린, 1943 ⓒEstate Arno Fischer, ifa / 전시 포토월에서 


‘베를린 상황’은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부터 이념이 갈라버린 베를린 풍경을 있는 그대로 담는다. 포탄을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거나 곧 반으로 쪼개질 듯 금이 간 건물 안에서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 시민들, 공사장, 폐허, 시위대의 모습들, 부유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의 흑백사진은 20세기 중반 독일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것은 물론, 근접 촬영, 과감한 구도,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순발력, 애잔하면서도 위트가 느껴지는 시선이 더해져 작품 그 자체로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Estate Arno Fischer, ifa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피셔는 무엇보다 프레임 속 사람들이 맺는 관계에 집중한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까지 그의 사진이 감상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한편 ‘뉴욕’과 ‘여행’ 테마에서는 그가 뉴욕과 동유럽 국가를 비롯한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촬영한 사진을 만날 수 있다. 화려함보다는 그 도시에서 빚어지는 소외에 주목한 ‘뉴욕’은 같은 도시에서 활동한 미국의 거리 사진가들의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오히려 엄연히 여행자 입장이었음에도 이토록 도시의 내밀한 장면을 포착했다는 데 놀라울 정도다.


부다페스트, 1960 ⓒEstate Arno Fischer, ifa / 전시 포토월에서 


뉴욕, 1984 ⓒEstate Arno Fischer, ifa / 전시 포토월에서 


아르노 피셔가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촬영한 사진 역시 그가 서구권의 매그넘 사진가들 못지않게 당시 ‘제3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그의 활동 무대가 동독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그에 관해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르노 피셔 또한 동독을 탈출해 자유 진영으로 넘어오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도망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¹며 동독에 남았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에서 벌어진 전쟁과 분단, 통일까지 모두 지켜본 예술가가 되었고, 그의 사진은 그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아르노 피셔 ⓒWerner Bethsold


아르노 피셔 전시의 기획자이자 그와 절친했던 마티아스 플뤼게는 피셔를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기성 권력에 맞서는 아방가르디스트’라고 묘사한다. 실제로 ‘패션’ 파트에서 볼 수 있는 그의 패션 사진들은 지금 보아도 혁신적인 느낌을 준다.


그는 ‘독일의 보그’라 불리던 패션 잡지 「지빌레」에서 패션 사진 작업을 하는데, 전쟁의 흉터가 남은 거리, 공업 지대를 배경으로 화사한 모델과 화려한 의상을 촬영한다. 감각적이며, 모델과 배경의 대비는 도발적이다.


동베를린, 쇠네펠트 공항 :「지빌레」1968년 1월 ⓒEstate Arno Fischer, ifa / 전시 포토월에서 


공산 정권하 동독에서 이런 상업적인, 혹은 도발적인 사진을 실은 잡지가 나올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 놀랍다. 그는 「스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아마도 강요받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이념 선전 사진을 찍을 필요가 없었기에 예술적 자유를 지킬 수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오늘날 베를린은 경제 성장은 조금 더딜지 몰라도 자유와 예술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세계적인 도시로 자리 잡고 있다. 사진가로도 활동했지만, 무엇보다 오랫동안 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친 아르노 피셔 역시 베를린의 예술적 부상에 얼마간 일조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독일이 분단을 극복한 이후, 유럽의 강대국으로 다시 부상하는 동안 아르노 피셔는 어떤 작업을 했을까. 그것은 마지막 ‘정원’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아내와 함께 1978년부터 베를린에서 북쪽으로 70Km가량 떨어진 곳에 소박한 농가를 구입한 후 2011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거주한다. 그는 아내와 정원을 가꾸며 전원생활을 꾸려 가는데,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30년에 걸쳐 집과 정원의 사진을 찍었다.


이번 전시에서 유일하게 컬러로 된 폴라로이드 사진은 작지만, 세 장씩 짝지어진 하나의 작품으로 세상에 공개된다. 아르노 피셔는 연대나 장소가 아닌, 저만의 기준으로 세 장을 한 쌍으로 묶었다고 한다.


ⓒEstate Arno Fischer, ifa


도구들, 울타리들, 꽃과 나무들이 멀리서 혹은 클로즈업되어 찍혀 있다. 어떤 명확한 기준을 찾기보다는 함께 붙은 세 장의 사진들이 전해주는 30년의 응축된 시간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가 평범하지만 꽤나 충만한 삶을 산 것 같다고, 이 동베를린에서 온 사진가가 남긴 삶의 조각에 얼마간 아련해 지기도 한다.



아르노 피셔 - 동베를린의 사진가
- 6/23 ~ 8/21
- 성곡미술관
- 관람료 10,000원


주 1) https://www.spiegel.de/kultur/gesellschaft/ddr-fotograf-arno-fischer-ans-abhauen-habe-ich-nie-gedacht-a-592629.html




글/사진 신태진

매거진 브릭스의 에디터. 『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www.instagram.com/ecrire_lire_vivr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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