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로마로 가는 길 - 김혜지 작가 인터뷰

종교적인 목적이 아니라 삶의 전환점을 찾기 위해 순례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장 널리 알려졌지요. 그런데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관통하는 순례길도 있다는 사실 아시나요? 영국부터 로마 바티칸까지 이어지는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는 도버 해협 구간을 제외하고도 길이 2,000km에 달하며, 서유럽 국가의 알려지지 않는 소도시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줍니다.


7년째 이탈리아에 살며 ‘이태리부부’라는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는 김혜지 작가가 비아 프렌치제나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탈리아 토스카나 구간과 라치오 구간을 걸었습니다. 이 여정을 다룬 책 『로마로 가는 길』과 함께 베네치아에 사는 작가이자 유튜버 김혜지 님과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김혜지 작가의 『로마로 가는 길』


김혜지 작가



Q. 어떻게 비아 프란치제나 순례길을 걷게 되셨나요?


이탈리아에서 여행업에 종사하는 남편이 코로나로 일이 끊긴 지 1년이 훌쩍 넘은 시점이었어요. 기억하시겠지만 코로나 발생 초기 이탈리아는 여러 국가 중에서도 특히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점점 괜찮아지겠지 싶다가도 새로운 변이가 줄줄 나타났고요. 거기에 외국에서 살아가며 제 존재가 사라져 버린 것 같다는 자존감 하락까지 겹치며 무기력해지고 삶이 허무해졌어요.


그때, 남편이 비아 프란치제나라는 순례길에서 딱 이탈리아 토스카나 구간 200km만 걷고 오자고 제안했어요. 저희 부부에게 삶의 전환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저도 곧바로 응했지요.


순례자 여권



Q. 본래 루카부터 라디코파니까지 토스카나 구간만 걷기로 하셨지요. 하지만 눈물이 나올 만큼 가장 힘든 구간을 지나 라디코파니에 도착하신 후, 계속 걸어 로마까지 가기로 하셨습니다. 그렇게 결심하신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첫째 날 아무것도 모른 채 40km를 걷고 나서 우리의 종착지가 ‘로마’겠구나 직감했어요. 극한의 고통 끝에 느껴지는 희열이 있었거든요. 여러 번 주저앉아도 우리는 결국 로마를 만나겠구나, 확신이 생겼다고 할까요. 누가 먼저 입 밖으로 꺼내느냐가 관건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머뭇거리던 우리는 토스카나 구간의 종착지인 라디코파니의 요새에 올라 다른 이유를 찾지 말고 계속 걷자고 답을 내렸어요. 한참 울고 나서 생각해 보니 걷는 것보다 멈추어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더 두려웠던 것 같아요.


가장 힘든 구간이었던 라디코파니로 가는 길 / 라디코파니



Q. 본래 여행으로 가시던 도시가 순례 루트에 들어가 있었지요. 여행자로 본 도시와 순례자로 본 도시는 어떻게 달랐나요?


일반적인 순례자들과는 다르게 이탈리아는 저희가 오랫동안 살아온 나라였고, 순례길에서 만난 도시 대부분 여러 번 여행했던 곳이었어요. 여행객에서 순례자로 신분이 바뀌면서 도시를 마주하는 감정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시의 번화함이 낯설어지고, 빨리 흙길로 빠져나가 무작정 걷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에나, 산퀴리코 도르차, 특히 로마 같은 번화한 관광지들이 순례길로 거쳐 가는 도시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했어요. 맛집, 관광명소를 찾지 않고 순례길에서 느꼈던 내 감정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산 미니아토 / 시에나



Q. 꼭 이탈리아 순례길이 아니더라도, 토스카나주를 걷는 건 도전해 볼 만한 여정 같습니다. 순례 루트 중 여행으로서 걸을 만한 구간을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유네스코에 지정된 발 도르차(Val d’Orcia) 평원을 가로지르는 토스카나 전 구간을 추천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35번 구간, 부온콘벤토(Buonconvento)에서 반뇨 비뇨니(Bagno Vignoni) 구간을 꼭 걸어보셨으면 좋겠어요.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을 지나 토스카나 구릉을 걷다가 족욕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코스이기 때문에 걷기의 즐거움과 동시에 오감 만족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포도밭 / 반뇨 비뇨니의 아침



Q. 책에 그려진 작가님과 남편분의 성격이 상반되어 보였어요. 걸으면서 벌어졌던 다툼도 솔직하게 그리셨고요.


저는 극단적이고 즉흥적이기까지 해서 일단 한번 꽂히면 시도하고야 마는 성격이고, 남편은 신중하게 오랫동안 고민하는 조심스러운 사람입니다. 남편이 “한 번 가볼까?” 하고 던진 말에 반드시 지금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수백 가지 만들어 내면서 급하게 떠난 것도 제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났던 순례길에서, 오롯이 두 사람이 400km를 걸으면서 느꼈던 감정과 경험은 평생을 곱씹을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극단적인 저는 출발과 동시에 포기를 운운했는데, 결국에는 묵묵히 옆을 지켜준 남편 덕분에 여러 번 고꾸라지면서도 몸을 일으켜 끝까지 걸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 열흘을 함께 걷는 것은 십 년을 함께 산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표현은 잘 못하지만 인터뷰를 빌어 남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순례자들과 함께



Q. 순례 중에 사정상 차량으로 이동하거나 무거운 배낭 없이 걸었던 순간이 있었죠. 그때 몸은 편해도 ‘순례자’에서 벗어난 것 같다고 느끼며 마음이 무겁다고 하셨습니다. 순례가 일종의 자신과의 약속이어서 그랬을까요? 


순례자들 사이에서 ‘진짜 순례자란 무엇일까’에 대한 설전이 자주 오가는데요, 저도 걷기 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야만 순례자로 인정한다는 말에 동의했습니다. 마냥 행복하기 위해 시작한 여정이 아니고,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 또는 삶의 전환점에서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기 위해 떠나는 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중간에 10km 버스를 타야 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 몹시 괴롭고 죄책감에 시달렸어요. 그러나 비아 프란치제나 공식 가이드북의 저자 모니카 다티의 말에 위로를 받았어요.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곧 성지에 도착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순례자는 도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출발하는 사람과 걷는 사람입니다.” 




Q. 혹시 책에 다 담지 못한, 순례길 위에서의 에피소드가 있나요?


힘든 순간에 길 위에서 저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와인과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8일 차 길에서 벗어난 날, 죄책감이라는 감정에 대해 서술했는데, 그날은 기왕 일탈을 한 것 버스를 타고 근교 소도시로 벗어나 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온콘벤토 숙소에 짐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버스를 타고 몬탈치노(Montalcino)라는 소도시로 향했습니다. 토스카나에서도 최고의 와인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유명한데요, 그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마음껏 마셨던 날이 생각납니다.


비아 프란치제나는 걸으면서 정말 매력적인 이탈리아의 여러 소도시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순례길로서의 여정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소도시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에게도 추천하는 이유입니다. 특히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토스카나 소도시의 거점이 되는 부온콘벤토에서 며칠 머물면서 주변의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 피엔차(Pienza) 등을 여행하는 것도 추천합니다.


물안개 낀 산 지미냐노



Q. 이탈리아에서 7년을 살아도 자신이 이방인 같았는데, 코로나 시대에 처음으로 이탈리아 사람들과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끼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이방인에서 이웃이 되셨나요?


이탈리아에서 평생 살아도 우리는 이방인이겠구나 생각하며 제 스스로도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고 살아왔어요. 그러다 코로나 시대가 오며 관광객과 짧게 머물던 사람들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어요. 대신 이곳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만 남아 매일 발코니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며 봉쇄 기간을 이겨냈습니다.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던 사람들과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고, 마스크 한 장 구하기 어려운 시기에 귀한 마스크를 선뜻 나누어주기도 했어요. 힘든 시기를 함께 겪자 동지애를 넘어 소속감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슬픔을 함께 아파해 준 이웃들의 품 안에서 나를 감싸고 있던 벽이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여기가 내 삶의 터전이고, 이 사람들이 이웃이구나 하면서요.




Q. 유투브 채널 ‘이태리부부’를 남편분과 함께 운영하고 계십니다.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해외에 살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나 환경이 한정적이고, 부부가 유일한 친구이자 반려자로서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아야 멈추지 않고 계속 발전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부부가 함께할 수 있는 취미생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유튜브 채널을 함께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둘 다 네이버 블로그 운영 10년 차인 만큼 기록은 체화된 사람들이었지만, 영상 기록은 처음이라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여행 정보가 필요한 분들에게 글보다 생생한 현지 소식을 전하고 싶기도 했고요. 2년 동안 핸드폰 하나로 영상을 찍어 올리다가 코로나를 겪으면서 본의 아니게 유튜버로서 생업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유튜브 활동을 지속해 온 덕분에 해외에 사는 저희에게도 온라인 세상에서의 기회도 많이 찾아왔고, 마음을 나눌 좋은 친구들도 여럿 생겼습니다. 이제는 유튜브가 취미 생활이나 수익의 수단,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 것 같아요. 


바티칸에서



Q. 유튜브 채널 ‘이태리부부’에는 이 책의 순례 여정이 영상으로 올라와 있지요. 이 책과 ‘이태리부부’ 순례 영상이 지닌 각각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또, 걷는 것만도 힘드셨을 텐데 영상까지 찍으실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요?


처음부터 책을 쓰고자 하는 목적으로 길을 걸은 것은 아니지만, 영상으로는 반드시 기록을 남기고 싶었어요.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정보나 유튜브 영상은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비아 프란치제나에 대한 영상은 아주 귀하거든요.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겨서 앞으로 이 길을 걷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1일 차부터 20일 차까지 열심히 찍었습니다. 그때의 영상 기록이 책을 쓰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어요. 글을 쓰다가 그날의 감정이 생각나지 않는 날에는 저도 계속해서 영상을 돌려보았거든요. 생각해보면 글을 쓰는 내내 걷는 마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영상으로 기록해둔 덕분인 것 같습니다.


영상은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모든 스토리텔링의 기본은 활자이듯 글에서는 영상으로 담을 수 없었던 날것의 느낌과 길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담았습니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이탈리아 순례길인 만큼 열심히 준비했고요, 앞으로 비아 프란치제나를 걷는 분들이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Q. 현재는 베네치아에 거주하고 계시죠. 코로나 시대도 고비를 넘긴 지금, 요즘 여행지로서의 베네치아 분위기는 어떤가요?


베네치아는 부활절이 있던 4월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었어요. 길었던 2년의 터널이 완전히 끝이구나 싶어 북적이는 관광객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던 날이 기억납니다. 혹시 그 2년이 꿈은 아니었을까 볼을 꼬집어보기까지 했어요. 이제 텅 빈 베네치아는 볼 수 없겠구나 조금 아쉽기도 했습니다.


다시 코로나 이전처럼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것은 물론이고, 코로나 상황으로 잠정 연기되었던 여러 축제들, 특히 베니스 비엔날레 덕분에 발길 닿는 모든 곳이 예술의 향연인 요즘입니다. 원래도 대체 불가능한 매력을 지닌 도시였지만, 코로나라는 역병을 겪은 후에 마주한 도시는 훨씬 더 빛이 나고, 다시 사랑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애틋하기도 하고요. 여행의 허들이 사라지고, 많은 여행객들이 마음 편히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고, 저와 같은 설렘의 감정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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