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인물들과 삶을 들여다보는 이래은 연출가 #2

이래은 연출과의 인터뷰 1편을 먼저 읽어보세요!



Q. 선호하는 연기 스타일이 있나요?

배우를 캐스팅의 대상으로 타자화할 수는 없어서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작품에 따라, 캐스팅 앙상블에 따라 수많은 가능성으로 달라져서 선호하는 연기 스타일이라기보다는, 같이 일하고 싶은 동료가 있기는 해요. 저는 관객과 배우가 무대에서 서로의 온기, 냄새, 목소리나 박수의 진동, 숨소리 등등의 감각으로 만나고 교류하는 것이 공연 예술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라 여겨요. 그래서 그런 진실 되고 생생한 순간을 무대에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수많은 방법들을 꾸준하게 찾고 실험하고 연구하고 시도하는 배우 분들을 존경하고 그런 분들과는 또 같이 작업하고 싶어지죠.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의 공연 장면 / 국립극단 제공



Q. 첫 연출 작품 〈고양이가 말했어〉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요?

고독한 11살 아이 지영이가 고양이 야옹이를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12살이 되는 이야기에요. ‘몰라’와 ‘잘 몰라’라는 두 사람이 기억의 다락방에서 발견한 지영이와 야옹이의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들려주고 ‘알 수 없어’라는 악사가 공연 내내 소리를 만들고 음악을 연주하는 공연이었어요. 3년 동안 40여명의 예술가가 함께 작업했고 국내와 해외에서 100여 회 공연했어요. 어린이 관객, 어른 관객 할 것 없이 다 같이 즐겨주셨어요. 그때 극장에 왔던 어린이 관객들이 지금은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이 되었을 거예요. 어린이였을 때 이 공연을 보고 기억하는 관객 분을 만나면 정말 행복할 거 같아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연극으로 시도하고 그 과정을 동료들과 만들고 그 결과를 관객들이 좋아해 줄 수 있다는 것이 ‘현실’이 된 첫 경험이었어요. 공연 마지막은 지영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인데요, 하늘에 떠 있는 새털구름보면서 “야옹이 털 같애”라면서 야옹이를 기억하거든요. 초연 마지막 날 동료들과 축하파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하늘에 새털구름이 떠 있었어요, 고양이 털 같은. 내가 연극으로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고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며 같은 공간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작업이에요.


〈고양이가 말했어〉의 공연 장면



Q. 청소년극단 ‘달과 아이’를 운영하고 계시지요. 

달과아이는 청소년극단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아요. ‘운영’되는 극단도 아니고요. 이전 세대 ‘운영’되는 극단들은 가족 공동체 같았고, 연출을 중심으로 가부장적인 위계가 있었어요. 지금은 문화와 흐름이 달라졌어요. 달과아이는 각자 자기 색깔대로 작업하면서 유기적으로 모였다 흩어져요. ‘달과 아이’는 〈고양이가 말했어〉 공연 전후로 모인 동료 그룹이에요. 동료들의 놀이터 같은 곳이지요. 각자 활발히 활동하다가 마음 맞고 뜻 맞는 작업이 있으면 같이 해요. 든든하고 항상 마음을 의지하는 동료들이에요. 


예전에 청소년극 작업하는 연극 동료들과 함께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한 청소년 관객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청소년극 안 본다. 그냥 연극도 안 보는데 청소년극이라고 하면 더 볼 생각이 없다”.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청소년극’이란 말에 대해 다시 생각했고, 그 일이 8년 전인데, 아직도 생각하고 있어요. 청소년극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회가 ‘청소년’이란 글자로 수많은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사회가 타자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단단한 생각을 예술이 뒤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아직은 어리다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미루게 하는 사회, 동시대 청소년들 삶의 다양함과 층위를 얄팍하게 만드는 사회에 다른 시선과 질문을 던지는 시도를 예술이 해야지요. 


제가 작업하는 청소년극은 청소년들이 감각하고 사유하는 연극이면 좋겠어요. 어른들도 함께요. 그리고 저에게는 지금 청소년들의 현실이 담겨야 의미 있어요. 동시대성을 담고 비추는 것은 예술이 지금껏 해 온 일이니까요.


이래은 연출가



Q. 청소년, 소수자, 약자들의 이야기를 하려면 그런 역할이 등장해야 하잖아요. 그러면 주제가 너무 도르라지는 제약이 있을 것도 같아요. 

극의 주제가 그 사람의 삶 자체에 있다면 소수자성의 단면만 도드라지지 않고 입체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소수자성은 딱 하나가 아니잖아요. 한 사람 안에 수없이 다양한 소수자성과 다수자성이 교차하고 뒤엉켜 있으니까요. 혹시 특권체크리스트라고 본 적 있으세요? 2016년에 스브스에서 올린 ‘청년’이란 이름으로 교차하는 수많은 소수자성에 대한 영상도 있었고요.(https://youtu.be/AaLZ3bmCb_k)  


한 인물에게 딱 하나의 정체성만 있는 게 아니니 중첩된 다양한 층위를 섬세하게 보여주면 한계나 제약에 머물지 않을 것 같아요. 한 사람이 ‘우주’만큼 복잡하잖아요. 연극에서는 한 면만 보여줄 수 없어요. 기능적으로는 보여줄 수는 있어요. 그런 인물을 보통 ‘전형적’이라고 하지요. 매력도 없고, 실제로 전형적인 사람이 현실에 얼마나 있겠어요. 한 사람을 파고, 파고, 또 파면 복잡하고 무한한 우주 같을 거예요.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공연 포스터



Q. 인형을 비롯한 소품을 특별하게 선택하고 다루시는 이유가 있나요? 

인형! 재밌잖아요! 생명이 없는 물체인데, 배우가 움직임을 주면 살아나지요. 심지어 인형이 배우를 이끌기도 해요, 먼저 움직이면서. 허구와 실제가 겹쳐지고 뒤엉켜 있는 그 마법 같은 순간이 너무너무 좋아요. 그리고 인형들은 너무너무 웃기고 재밌어요. 뻔뻔하달까, 자기가 가짜인 것 알면서 그 가짜의 성질을 가지고 관객들과 놀아준달까. 인형은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래요. 『인형 예술의 재발견』이라는 책에서 인형극 연기에 대해 벤스키라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무기물이라는 외적인 진실과 그에게 불어넣어 주는 인간성의 내적인 진실 사이에 조종자와 관객이 공모하여 표현하는 환상에의 욕구.” 저는 ‘조종자와 관객의 공모’라는 표현을 좋아해요. 관객과 조종자가 공모해서 진실들 사이에 환상을 만드는데, 그 환상은 그 무대에서 구현되는 순간 현실이 돼요. 마법처럼. 놀라워요. 



Q. 〈서울도심의 개천에서도…〉 공연에서도 빈 공간에서 배우의 움직임만으로 재활용 쓰레기 분류장 같은 공간을 연출하셨는데요, 대사 말고 몸의 언어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신가요?

대사에도 물론 관심이 많아요. 대사도 몸의 말이니까요. 제가 지금 ‘대사도 몸’이라고 하는 걸 보니, 몸의 움직임, 감각에 관심이 많긴 하네요. 제가 말을 잘 못하고 말하는 게 괴롭고 힘든데, 몸을 움직이는 건 좋아해요. 몸으로 움직이면 상황이나 공간에 대한 이해가 생각으로 하는 것보단 빠르거나 풍성하다고 느껴지고, 그런 점이 좋아요. 텍스트만으로는 내용만 알 수 있지만, 말을 어떻게 하느냐는 몸/움직임에 담겨 있어요. 텍스트를 둘러싼 수많은 몸의 감각들을 찾아내는 게 제 연출 작업의 주요한 일이기도 해요.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의 공연 포스터



Q. 새 작품에 들어가실 때는 어떤 마음이신가요? 

알 수 없는 숲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에요. 어떤 생명들이 살고 있는지, 볕은 얼마만큼 드는지, 지형은 어떤지, 전혀 모르는 곳으로 탐험하러 가는 것 같아요. 엄청 무섭고, 엄청 설레고 그래요. 대본 없이 콘셉트에서 시작하는 작업도 있는데, 그럴 때는 백지에서 시작해서 사진처럼 보이는 세밀화를 그려나가는 느낌이에요. 점 하나, 선 하나로 시작해 수천수만의 점, 선을 채우는 긴 시간의 그림을 그리는 느낌이랄까요. 영화 〈매트릭스〉의 하얀 세계, 나조차도 없는 세계에 서 있는 느낌? 그래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연출하는 것이 덜 자유롭다고 느끼진 않아요. 한계가 있을 때 만나는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서 넉넉히 자유로울 만큼 할 수 있는 게 많으니까요. 


새 작품 들어가기전엔 체력을 단단히 준비해요. 체력소모가 크니까요. 한약과 온갖 영양제도 평소에 열심히 먹고 있어요. 예전에는 체력소모뿐만 아니라 감정 소모도 컸는데, 이제는 최소화하기 위해 일의 시스템을 견고히 만드는 것을 프리프로덕션 때 미리미리 준비해요. 연출부와 프로덕션 전체 일을 늘어놓고 순서와 분담을 정하고, 예상되는 진행의 그림을 여러 개 그려놓고 이리저리 시뮬레이션을 해 봐요.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 막막함의 강도를 줄이기 위해서예요. 자료 준비를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많이 하고 공부해서 공연 제작 과정 중 자원이 고갈되지 않을 수 있게 준비하려 해요. 그리고 배우스텝동료들과 이런저런 놀거리를 생각해 둡니다. 〈서울도심의 개천에서도…〉 때는 공연에 등장하는 개천가를 같이 산책했어요. 준비를 다양한 방식으로 많이 해 두면 체력도 감정도 좀 더 잘 다룰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의 공연 장면 / 국립극단 제공



Q.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앞으로의 계획은요?

7월에 서울시청 근처에 있는 정동세실 극장에서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를 공연해요. 작년 말 낭독극을 했던 공연인데, 사랑이야기지만 사랑 이야기가 아니에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인데, 퀴어이기 때문에 평범하지 않은, 두 개의 성질이 겹쳐지는 이야기에요. 


앞으로는 코미디 연출을 하고 싶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웃기는 코미디 연극. 남 괴롭히지 않으면서 웃길 수 있고, 서늘하고 아릿한 시선을 가진 연극, 웃으면서 눈물 줄줄 나는 연극을 만들고 싶어요.




인터뷰 이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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