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연남천 풀다발』이라는 그림책 한 권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수채화로 홍제천에 자라는 야생의 풀들을 담은 이 책은 많은 사랑을 받으며 전소영 작가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렸지요. 이후로 그림책 『적당한 거리』, 『아빠의 밭』을 낸 전소영 작가가 이번엔 에세이 『그리는 마음』을 펴냈습니다. 자연물을 중심으로 작업하는 작가를 파주 문산 작업실에서 만났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듯, 가만 보고 있으면 숲속에 들어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전소영 작가
Q. 첫 그림책 『연남천 풀다발』은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오래 전 망원동에서 친구와 함께 카페를 연 적이 있어요. 그때는 일을 하느라 작업을 못 했어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그래서 작업을 할 정신적인 여유도 없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면서 제 존재를 확인해 왔는데 그때가 그림을 그리지 않은 유일한 시간이었어요. 그림을 못 그리니까 제 존재를 잃어버린 것 같았어요. 그 시간을 지나며 제가 얼마나 그리는 행위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제가 그림으로 뭔가를 해야겠다거나 성공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계속 그려야겠다, 그 생각밖에는 없었어요. 어떻게든 그려야겠다, 연남동에서 정말 땀띠 나도록 틈틈이 풀을 그렸던 거지요. 많이 울었고요. 내가 이걸 왜 하려고 하는지, 저 혼자 그리고 말아도 되는데 왜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보이려 하는지 스스로 질문을 굉장히 많이 했고, 그래서 마음을 접으려고도 했다가 또 힘을 냈다가 그런 시간들이 계속 쌓여 왔어요.
『연남천 풀다발』 중에서
Q. 그런데 왜 전시가 아니라 책이었나요?
제가 회화 전공이니까 전시를 먼저 떠올리긴 했는데, 풀이 가진 속성과 책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도 사람들한테 씨앗처럼 날아가서 각자의 흙에 정착해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잖아요. 또, 어느 작가분께서 책은 캔버스랑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큰 화면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에 굉장히 공감이 갔어요. 책만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물성을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게 하는 게 제가 풀을 그리며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Q. 이미 그려진 그림을 이야기 구성 안에 배치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나요?
네, 그림책은 그 특성상 서사가 있어야 해요. 『연남천 풀다발』은 그림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그림책을 목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어서 처음에는 서사성이 없었어요. 그래서 기존 그림책 문법과 다르고 대상 연령도 부정확해 많은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제가 3년 동안 자연을 관찰하며 그린 그림이었기 때문에 계절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담겨 있었어요. 책장을 넘기며 그 흐름도 전해지길 바랐고, 장에 따라 느낌을 더 강하게 줘야 하면 그림을 추가로 그리거나 수정하기도 했어요. 특히 가을이 담고 있는 어떤 '시작'이 눈에 띄어서 이야기를 가을로부터 출발시켰지요.
전소영 작가의 책들
Q. 풀을 그리기 이전에는 어떤 작업을 하셨나요?
그전에도 눈길이 가고 주로 그렸던 소재가 자연물이었어요. 졸업 작품도 120호 캔버스에 버드나무 한 그루만 그렸어요. 어느 날 갑자기 풀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건 아니고 저한테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맞는 소재를 찾다 보니 그게 어릴 때부터 꾸준히 좋아하고 바라보던 대상인 자연물이었던 거지요. 겉으로는 여리여리 힘없이 쓰러질 것 같아도 끈질긴 생명력에 동질감, 일종의 위안을 받았어요. 그림 그리는 순간들 자체가 상념과 갖가지 고민, 걱정거리를 비워내는 과정이었어요.

Q. 식물 공부를 아주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사실 공부는 그림을 다 그려 놓고 했어요. 제가 식물을 잘 알아서 시작한 게 아니라 직관적으로 닿는 풀들을 그날그날 산책하면서 그렸는데, 이름도 모르고 언제 피는지도 확실히 몰랐어요. 그려 놓고 보니까 이름이 뭘까 궁금해지는 거예요. 그걸 알아내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어요. 다 비슷하게 생기고, 종도 너무 많고, 제가 모르는 세계가 있었지요. 지금도 모르는 게 많고 잊어버린 것도 많아요. 물론 이름을 불러주고, 이름을 붙여주고, 찾아주는 것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는 제가 풀을 그리면서 충분히 교감했던 시간들이 있었고, 그러면서 이 존재들의 소중함을 좀 더 깊숙이 느끼지 않았나 싶어요.


Q. 두 번째 그림책인 『적당한 거리』는 기르는 화초에 관한 내용인데요, 천변의 식물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연남천 풀다발』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이고, 집안 식물들은 인간의 손을 빌려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이잖아요. 천변 풀들이 도인 같다면 키우는 식물은 도시 안에서 길러지고 성장하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요. 대신 집에 있는 아이들은 조금 더 편하게 그릴 수 있지요. 제가 매일 보살피는 대상이니까요. 야생의 풀들은 지금껏 몰랐던 대상을 알아간다는 느낌, 뭔가를 배운다는 느낌이 커요.
Q. 시들고 변색된 그대로를 다 그리시는 것 같아요.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대상을 관찰하면서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함이라서 자연물을 이쪽에서도 보고 저쪽에서도 보고 위에서도 보고 밑에서도 보면서 시간에 따라 계속 변하는 모습을 살펴요. 시들기도 하고 숨이 죽기도 하고, 과일이면 멍이 들거나 찍힌 자국이 있고, 풀 다발에도 끝이 타들어갔다든지, 벌레 먹은 자국이 있다든지, 관찰하다 보면 반드시 그런 게 보여요.
사실은 그런 걸 표현하기 위해 과일이나 풀을 그리지 않았나 싶어요. 같은 생물 안에서도 변화하는 모습이 항상 관찰되는데, 그런 게 자연의 모습이고, 저는 그런 자연의 모습을 포착해서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기준으로 보기에 매끈하거나 아름답거나 딱 정돈된 모습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자연 그대로를 어떨 때는 풀로 표현하고 어떨 때는 과일로 표현해요. 그런 상처 난 부분들을 그리다 보면 그 자체로도 너무 예뻐요. 상처 없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게 우리 모습 아닐까 해요.

Q. 이번에 내신 『그리는 마음』은 그림책이 아닌 그림이 있는 에세이입니다.
그동안 그림책에 들어가는 글도 써 왔는데, 출판사에서 긴 글을 쓰면 어떨지 제안하셨어요. 처음에는 좀 망설였지만, 그림책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들, 예전부터 일기처럼 수첩에 적어놨던 것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보자는 생각이 들어 시작하게 됐어요. 회화 작업을 하며 하루에 몇 시간씩 쓰는 시간을 정해 꾸준히 작업했어요.
Q. 『그리는 마음』은 그림책 작가가 아니라 처음부터 글을 쓰신 분이 출간한 책 같아요.
아,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고, 쓰는 것도 좋아해서 늘 수첩이 이만큼씩 쌓여 있었어요. 그런 게 훈련이 된 게 아니었을까요. 수첩은 항상 제 옆에 있고 자려고 누웠을 때도 생각나는 말이 있으면 벌떡 일어나 적어 두는데, 다음 날 읽어보면……, 아시지요? 뭔가 표현하고 열망, 그런 게 항상 있었나 봐요.
전소영 작가의 에세이 『그리는 마음』
Q. 『그리는 마음』에서도 자연의 변화, 사라짐을 이야기하신 듯해요.
선조들이 난을 치고 사군자를 그린 이유가 그림을 그려내기 위한 것도 있지만, 대상을 더 잘 보기 위한 행위였다고 해요. 자기 덕을 쌓으며 사물의 참모습을 알아가고요. 저도 그림을 그리며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계절을 나누지만, 작년에 나왔다가 쓰러져 죽은 식물과 올해 나온 식물이 같이 있고, 그 옆에는 재작년에 나왔다 아직 썩지 않은 풀들이 있어요. 그런 게 사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Q. 그림책은 수채화로 작업하셨습니다. 유화도 그리시나요?
유화도 하고, 아크릴도 하고, 목탄도 하고, 때에 따라 잘 맞는 재료들을 선택해서 작업해요. 『연남천 풀다발』 작업할 때가 정말 오랜만에 수재화를 그려 본 거였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지겨워서 안 그리다가 집에서는 유화를 하기 힘들어 수채화를 꺼내든 거였어요. 의외로 풀이랑 잘 어울렸고 그 뒤로 수채화를 계속하게 됐어요.

Q. 태블릿 같은 디지털 매체로도 작업을 하시나요?
저는 손으로 하는 게 제일 편하고 태블릿, 디지털 작업은 어렵더라고요. 약간 고지식한 면일 수도 있지만, 사람 손을 통과해 나오는 것만이 가지는 힘이 있다고 믿어요. 내 몸을 통과해서 나온 힘으로 작업을 하는 게 저의 성향이랑 더 잘 맞는 같아요.
Q. 인물 작업은 잘 안 하시나요?
시기의 문제도 있는 것 같은데요, 지금 시기에는 제가 사람과 대면해서 그릴 만한 힘이 없어요. 인물에는 사회, 문화 같은 좀 더 복잡한 것들이 있어서 경험이 더 쌓이고 나이가 더 들고, 제가 사람을 좀 더 편안하게 관조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싶어요. 지금 저한테 필요한 게 자연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사람을 그린다는 것이 자연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건 아니에요. 과일 안에서도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풀을 그리면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이 사람한테서 온다고도 할 수 있어요.
저는 저 혼자 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주변의 영향을 품고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게 그림 안에 다 들어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Q. 대학 때부터 줄곧 거주하던 마포구를 떠나 이곳 파주에 정착한 이유가 뭘까요?
꿈이라고 해야 될지, 기회가 되면 복잡한 데를 떠나 꼭 시골에 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때마침 코로나가 터지고 더 이상은 서울에서 버티기 어렵게 되었어요. 처음부터 문산으로 올 계획은 없었고, 제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사정에 맞으면 어디로든 가자 생각했어요. 제주도까지 전국을 알아봤어요. 20년 넘은 이 집은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었어요. 가격도 굉장히 저렴하고, 보자마자 그냥 여기로 오기로 했어요.
막상 오고 나서 보니까 인연들이 있더라고요. 아는 신부님이 계신 성당이 근처에 있고, 임진강이 가까이 있어서 산책을 다니다 보니 이걸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고. 우연이라고 하면 우연이지만, 이 땅과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생각해요.

Q.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현재는 나무에 관한 그림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회화로는 9월 초 오두산 전망대에서 전시가 있어요. 임진강이나 문산 풍경들을 그리고 있지요. 큰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계기가 되었어요. 공장, 집의 형태, 이런 풍경을 자연물과 함께 담고 기록하는 데서 의미를 찾아가고 있어요. 마을 풍경 안에는 항상 시대성이 있어서 지금 익숙한 풍경이 10년, 20년이면 아주 다르게 보일 테니까요.


그런데 회화라는 게 고정된 화면이잖아요. 고정된 틀 안에 제가 느낀 다양한 시점이나 다양한 감정, 장면을 같이 보여주고 싶어서 같은 공간인데 다른 시간대의 장면이라든가, 다른 시점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같이 넣어보고 있어요. 우리가 풍경이나 대상을 부분만 보는 게 아니라 하늘도 보고 강도 보고 옆에도 보고 부피로 인식하잖아요. 다양한 것들이 회화 안에서 총체 감각적으로 느껴지게 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주호, 신태진
2018년 『연남천 풀다발』이라는 그림책 한 권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수채화로 홍제천에 자라는 야생의 풀들을 담은 이 책은 많은 사랑을 받으며 전소영 작가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렸지요. 이후로 그림책 『적당한 거리』, 『아빠의 밭』을 낸 전소영 작가가 이번엔 에세이 『그리는 마음』을 펴냈습니다. 자연물을 중심으로 작업하는 작가를 파주 문산 작업실에서 만났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듯, 가만 보고 있으면 숲속에 들어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Q. 첫 그림책 『연남천 풀다발』은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오래 전 망원동에서 친구와 함께 카페를 연 적이 있어요. 그때는 일을 하느라 작업을 못 했어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그래서 작업을 할 정신적인 여유도 없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면서 제 존재를 확인해 왔는데 그때가 그림을 그리지 않은 유일한 시간이었어요. 그림을 못 그리니까 제 존재를 잃어버린 것 같았어요. 그 시간을 지나며 제가 얼마나 그리는 행위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제가 그림으로 뭔가를 해야겠다거나 성공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계속 그려야겠다, 그 생각밖에는 없었어요. 어떻게든 그려야겠다, 연남동에서 정말 땀띠 나도록 틈틈이 풀을 그렸던 거지요. 많이 울었고요. 내가 이걸 왜 하려고 하는지, 저 혼자 그리고 말아도 되는데 왜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보이려 하는지 스스로 질문을 굉장히 많이 했고, 그래서 마음을 접으려고도 했다가 또 힘을 냈다가 그런 시간들이 계속 쌓여 왔어요.
Q. 그런데 왜 전시가 아니라 책이었나요?
제가 회화 전공이니까 전시를 먼저 떠올리긴 했는데, 풀이 가진 속성과 책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도 사람들한테 씨앗처럼 날아가서 각자의 흙에 정착해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잖아요. 또, 어느 작가분께서 책은 캔버스랑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큰 화면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에 굉장히 공감이 갔어요. 책만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물성을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게 하는 게 제가 풀을 그리며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Q. 이미 그려진 그림을 이야기 구성 안에 배치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나요?
네, 그림책은 그 특성상 서사가 있어야 해요. 『연남천 풀다발』은 그림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그림책을 목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어서 처음에는 서사성이 없었어요. 그래서 기존 그림책 문법과 다르고 대상 연령도 부정확해 많은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제가 3년 동안 자연을 관찰하며 그린 그림이었기 때문에 계절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담겨 있었어요. 책장을 넘기며 그 흐름도 전해지길 바랐고, 장에 따라 느낌을 더 강하게 줘야 하면 그림을 추가로 그리거나 수정하기도 했어요. 특히 가을이 담고 있는 어떤 '시작'이 눈에 띄어서 이야기를 가을로부터 출발시켰지요.
Q. 풀을 그리기 이전에는 어떤 작업을 하셨나요?
그전에도 눈길이 가고 주로 그렸던 소재가 자연물이었어요. 졸업 작품도 120호 캔버스에 버드나무 한 그루만 그렸어요. 어느 날 갑자기 풀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건 아니고 저한테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맞는 소재를 찾다 보니 그게 어릴 때부터 꾸준히 좋아하고 바라보던 대상인 자연물이었던 거지요. 겉으로는 여리여리 힘없이 쓰러질 것 같아도 끈질긴 생명력에 동질감, 일종의 위안을 받았어요. 그림 그리는 순간들 자체가 상념과 갖가지 고민, 걱정거리를 비워내는 과정이었어요.
Q. 식물 공부를 아주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사실 공부는 그림을 다 그려 놓고 했어요. 제가 식물을 잘 알아서 시작한 게 아니라 직관적으로 닿는 풀들을 그날그날 산책하면서 그렸는데, 이름도 모르고 언제 피는지도 확실히 몰랐어요. 그려 놓고 보니까 이름이 뭘까 궁금해지는 거예요. 그걸 알아내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어요. 다 비슷하게 생기고, 종도 너무 많고, 제가 모르는 세계가 있었지요. 지금도 모르는 게 많고 잊어버린 것도 많아요. 물론 이름을 불러주고, 이름을 붙여주고, 찾아주는 것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는 제가 풀을 그리면서 충분히 교감했던 시간들이 있었고, 그러면서 이 존재들의 소중함을 좀 더 깊숙이 느끼지 않았나 싶어요.
Q. 두 번째 그림책인 『적당한 거리』는 기르는 화초에 관한 내용인데요, 천변의 식물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연남천 풀다발』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이고, 집안 식물들은 인간의 손을 빌려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이잖아요. 천변 풀들이 도인 같다면 키우는 식물은 도시 안에서 길러지고 성장하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요. 대신 집에 있는 아이들은 조금 더 편하게 그릴 수 있지요. 제가 매일 보살피는 대상이니까요. 야생의 풀들은 지금껏 몰랐던 대상을 알아간다는 느낌, 뭔가를 배운다는 느낌이 커요.
Q. 시들고 변색된 그대로를 다 그리시는 것 같아요.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대상을 관찰하면서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함이라서 자연물을 이쪽에서도 보고 저쪽에서도 보고 위에서도 보고 밑에서도 보면서 시간에 따라 계속 변하는 모습을 살펴요. 시들기도 하고 숨이 죽기도 하고, 과일이면 멍이 들거나 찍힌 자국이 있고, 풀 다발에도 끝이 타들어갔다든지, 벌레 먹은 자국이 있다든지, 관찰하다 보면 반드시 그런 게 보여요.
사실은 그런 걸 표현하기 위해 과일이나 풀을 그리지 않았나 싶어요. 같은 생물 안에서도 변화하는 모습이 항상 관찰되는데, 그런 게 자연의 모습이고, 저는 그런 자연의 모습을 포착해서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기준으로 보기에 매끈하거나 아름답거나 딱 정돈된 모습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자연 그대로를 어떨 때는 풀로 표현하고 어떨 때는 과일로 표현해요. 그런 상처 난 부분들을 그리다 보면 그 자체로도 너무 예뻐요. 상처 없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게 우리 모습 아닐까 해요.
Q. 이번에 내신 『그리는 마음』은 그림책이 아닌 그림이 있는 에세이입니다.
그동안 그림책에 들어가는 글도 써 왔는데, 출판사에서 긴 글을 쓰면 어떨지 제안하셨어요. 처음에는 좀 망설였지만, 그림책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들, 예전부터 일기처럼 수첩에 적어놨던 것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보자는 생각이 들어 시작하게 됐어요. 회화 작업을 하며 하루에 몇 시간씩 쓰는 시간을 정해 꾸준히 작업했어요.
Q. 『그리는 마음』은 그림책 작가가 아니라 처음부터 글을 쓰신 분이 출간한 책 같아요.
아,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고, 쓰는 것도 좋아해서 늘 수첩이 이만큼씩 쌓여 있었어요. 그런 게 훈련이 된 게 아니었을까요. 수첩은 항상 제 옆에 있고 자려고 누웠을 때도 생각나는 말이 있으면 벌떡 일어나 적어 두는데, 다음 날 읽어보면……, 아시지요? 뭔가 표현하고 열망, 그런 게 항상 있었나 봐요.
Q. 『그리는 마음』에서도 자연의 변화, 사라짐을 이야기하신 듯해요.
선조들이 난을 치고 사군자를 그린 이유가 그림을 그려내기 위한 것도 있지만, 대상을 더 잘 보기 위한 행위였다고 해요. 자기 덕을 쌓으며 사물의 참모습을 알아가고요. 저도 그림을 그리며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계절을 나누지만, 작년에 나왔다가 쓰러져 죽은 식물과 올해 나온 식물이 같이 있고, 그 옆에는 재작년에 나왔다 아직 썩지 않은 풀들이 있어요. 그런 게 사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Q. 그림책은 수채화로 작업하셨습니다. 유화도 그리시나요?
유화도 하고, 아크릴도 하고, 목탄도 하고, 때에 따라 잘 맞는 재료들을 선택해서 작업해요. 『연남천 풀다발』 작업할 때가 정말 오랜만에 수재화를 그려 본 거였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지겨워서 안 그리다가 집에서는 유화를 하기 힘들어 수채화를 꺼내든 거였어요. 의외로 풀이랑 잘 어울렸고 그 뒤로 수채화를 계속하게 됐어요.
Q. 태블릿 같은 디지털 매체로도 작업을 하시나요?
저는 손으로 하는 게 제일 편하고 태블릿, 디지털 작업은 어렵더라고요. 약간 고지식한 면일 수도 있지만, 사람 손을 통과해 나오는 것만이 가지는 힘이 있다고 믿어요. 내 몸을 통과해서 나온 힘으로 작업을 하는 게 저의 성향이랑 더 잘 맞는 같아요.
Q. 인물 작업은 잘 안 하시나요?
시기의 문제도 있는 것 같은데요, 지금 시기에는 제가 사람과 대면해서 그릴 만한 힘이 없어요. 인물에는 사회, 문화 같은 좀 더 복잡한 것들이 있어서 경험이 더 쌓이고 나이가 더 들고, 제가 사람을 좀 더 편안하게 관조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싶어요. 지금 저한테 필요한 게 자연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사람을 그린다는 것이 자연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건 아니에요. 과일 안에서도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풀을 그리면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이 사람한테서 온다고도 할 수 있어요.
저는 저 혼자 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주변의 영향을 품고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게 그림 안에 다 들어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Q. 대학 때부터 줄곧 거주하던 마포구를 떠나 이곳 파주에 정착한 이유가 뭘까요?
꿈이라고 해야 될지, 기회가 되면 복잡한 데를 떠나 꼭 시골에 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때마침 코로나가 터지고 더 이상은 서울에서 버티기 어렵게 되었어요. 처음부터 문산으로 올 계획은 없었고, 제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사정에 맞으면 어디로든 가자 생각했어요. 제주도까지 전국을 알아봤어요. 20년 넘은 이 집은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었어요. 가격도 굉장히 저렴하고, 보자마자 그냥 여기로 오기로 했어요.
막상 오고 나서 보니까 인연들이 있더라고요. 아는 신부님이 계신 성당이 근처에 있고, 임진강이 가까이 있어서 산책을 다니다 보니 이걸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고. 우연이라고 하면 우연이지만, 이 땅과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생각해요.
Q.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현재는 나무에 관한 그림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회화로는 9월 초 오두산 전망대에서 전시가 있어요. 임진강이나 문산 풍경들을 그리고 있지요. 큰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계기가 되었어요. 공장, 집의 형태, 이런 풍경을 자연물과 함께 담고 기록하는 데서 의미를 찾아가고 있어요. 마을 풍경 안에는 항상 시대성이 있어서 지금 익숙한 풍경이 10년, 20년이면 아주 다르게 보일 테니까요.
그런데 회화라는 게 고정된 화면이잖아요. 고정된 틀 안에 제가 느낀 다양한 시점이나 다양한 감정, 장면을 같이 보여주고 싶어서 같은 공간인데 다른 시간대의 장면이라든가, 다른 시점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같이 넣어보고 있어요. 우리가 풍경이나 대상을 부분만 보는 게 아니라 하늘도 보고 강도 보고 옆에도 보고 부피로 인식하잖아요. 다양한 것들이 회화 안에서 총체 감각적으로 느껴지게 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주호, 신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