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정과 사람들] 인생이라는 예술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건축가, 고해석 인터뷰

2026-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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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조은정과 사람들 #11


<조은정과 사람들>이 2026년 새해이자 열 번째 인터뷰를 기념하며 특별한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바로 뉴욕의 건축가들을 만나는 시간이지요.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뉴욕의 퍼킨스 이스트만에서 고해석 건축가를 만납니다. '엘리, 뉴욕은 원래 독해'를 운영하며 만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20년차 건축가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bfa30bf3e2a8d.jpg고해석 건축가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고해석이라고 합니다. ‘엘리, 뉴욕은 원래 독해!(이하 엘뉴원독)’에서 닉네임 ‘독해’로 활동하고 있고요. 저도 앞서 인터뷰한 윤성환 건축가처럼 X세대입니다. 뉴저지의 레오니아라는 동네에 살며 뉴욕으로 출퇴근하고 있는 20년차 설계사무실 직장인이지요.


Q. 미국에 정착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성환 님도 그랬겠지만, 90년대 학번에 건축 유학을 가는 사람이 정말 많았습니다. 영화나 방송에 비춰진 건축하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펌프질 됐던 면도 있겠고, 소위 건축 유학 1세대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세대교체가 이뤄졌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저희 세대는 그들로부터 유학 경험을 많이 듣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건축업은 비참하기 그지없던 시기였지요.


제가 학부를 졸업한 게 한국이 IMF를 극복하고 막 정상으로 올라가려던 시기였어요. 여전히 취업문은 좁았지만, 3학년 이후 꾸준히 실무 경험을 쌓고 공모전에 참여한 덕분에 취업 자체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취업을 하자마자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현업은 학생 때의 실무 경험과 전혀 달랐어요. 제가 그간 학생이어서 많이 봐준 거였다는 걸 깨달았지요.


그때 잠시 몸담았던 사무실 팀장님이 유학파 출신이셨는데, 그분을 보며 학부만 졸업하고 제일 바닥에서부터 시작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팀장님처럼 유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실무 몇 년 하다가 귀국해서 팀장이 되고 여기저기 출강도 나가는 거였지요. 그런데 ‘미국에서의 몇 년 실무’라는 것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는지 일을 하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는 와중 아이들이 태어나고 여러 현실적인 문제를 맞닥트리며 결국 남는 놈이 강자라는 사실을 매일같이 느끼며 오늘까지 오게 됐습니다.


50a8975ebc2ae.jpg방송 중인 고해석 건축가


Q. 고해석 님도 아이비리그 출신이시더라고요. 유학 과정은 어떠셨나요?

트럼프 2기에 들어오면서 별짓을 다하고 있잖아요. 그중 하나가 건축과 교육을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으로 보지 않는다는 내용을 포함한 ‘The One, Big, Beautiful Bill Act’라는 행정 명령이에요. 건축을 Professional School의 학위로 분류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러면 교육비에 대한 대출 상한선과 세금 혜택이 줄어들게 되지요. 물론 미국 건축가 협회의 로비 능력과 정권 교체 여부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긴 하지만요.


아무튼 이런 배경을 이해한다면, 아이비리그 건축 전공이라는 공식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라는 걸 아시게 될 거예요. 여태껏 미국에서의 건축 교육은 Professinal School에서 담당했으며 여기에는 의대, 법대, MBA 과정이 포함됩니다. 한국과 다른 점은 이런 분야는 학부에서의 전공과는 큰 상관없이 내가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지원이 가능하다는 것이에요. 전문직 교육이 대학원 형식으로 운영되고, 졸업을 하게 되면 Master라는 석사학위로 그 전문성을 인정해 줍니다. 하지만 이게 라이선스와 관련되니까 중앙 정부 입장에서는 이들의 숫자를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 학교나 하겠다고 허가를 내주면 관리가 안 되니까 인허가 제도로 건축과가 있는 학교를 제한하는 거예요. 그래서 종합대라고 불리는 학교임에도 건축과가 없는 학교들이 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사는 뉴저지는 건축학과 과정이 있는 학교가 두 곳밖에 없어요.


그래서 역사가 오래되고 전통 있는 학교들에 이런 Professional School들이 몰려 있게 되고, 동부에서는 결국 아이비리그가 주축이 되는 겁니다. 주변에 건축한다는 분들 중 한국 기준으로 봤을 때 ‘헉’ 소리 나는 출신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처럼 유학생은 한국 학부에서의 교육을 어느 정도 인정받기 때문에 비전공상태에서 지원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이기도 하고요.


뭐, 그래도 아이비리그니까 쉽지는 않습니다. 학교별로 특성과 장점이 있으니까 결국 내가 어느 길로 갈 것이냐가 학교 결정에 큰 몫을 하고요. 전 개인적으로 건축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디자인 툴과 실험 정신도 좋지만, 역사가 길어서 그 흐름을 읽을 수 있는 학교들을 찾다 보니 동부에 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역사와 이론이라는 것도 많이 읽어야 하고, 그림이나 모형 같은 결과물보다는 입으로 털어야 하는 일이 잦아 유학생 입장에서 배움이 쉽진 않긴 했습니다.


cf9e81b4ac66b.jpg방송 준비 중인 고해석, 윤성환 건축가


Q. 앞서 인터뷰한 윤성환 님과 같은 회사인 ‘퍼킨스 이스트만’에 근무하시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는 일은 윤성환 님이 하는 일과 많이 다릅니다. 덩치가 워낙 큰 회사다 보니 안 하는 것 없이 다하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곳이라고 할까요? 비싸고 맛있는 건 별로 없는, 그냥 미국식 대형 설계 사무실입니다.


윤성환 님이 일하는 분야가 거시적인 거라면, 전 그 커다란 덩치 한 구석에 들어선 건물과 상대하는 일을 주로 맡고 있습니다. ‘종합선물세트’답게 성격이 전혀 다른 프로젝트를 하는데 저희는 같은 부서에 속해 있지요.


아무튼 이 회사는 1981년에 가업 경영 같은 성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주로 도시 프로젝트를 받아서 실시 설계는 물론 시공사 감리까지 전부 하는 분야에 초점을 맞춘 사무실이었죠. 뉴욕에 있는 사무실들은 크게 두 분야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글로벌한 영역에 있으면서도 본사는 뉴욕에 있어야지 해서 뉴욕에 있는 경우, 뉴욕을 기반으로 한 로컬 프로젝트를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뉴욕에 있는 경우. 퍼킨스 이스트만은 후자의 모델로 시작한 사무실인데,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겪으면서 생존을 위해 사업을 다각화 해야겠다는 창립자의 의지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외 오피스도 생겼고, M&A를 통해 안 하던 프로젝트도 맡으며 포트폴리오를 늘렸죠. 그래서 요즘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을 보면 어중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이라는데, 웬만한 평지풍파는 이겨낼 맷집을 키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로컬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했던 사무실이라 그 분야에선 확실히 강점을 보입니다. 설계 사무실이면 당연한 게 아닌가 생각하실 수 있지만, 로컬에서 일어나는 프로젝트에 관여해서 디자인 단계부터 마무리까지 다 경험하고 팀을 이끄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18f8943d0be3b.jpg건설 현장에서


Q. 포트폴리오를 보니 호텔 프로젝트를 많이 맡으셨더군요. 업무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네, 지금은 호텔 프로젝트가 다수를 차지해요. 처음은 고층 주거로 시작했는데,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로 호텔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주거든 호텔이든 뉴욕에서의 프로젝트는 비슷합니다.


호텔은 대부분 사이트(site)가 정해진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요구하는 것도 분명하고 스케줄도 굉장히 공격적이죠. 클라이언트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스케줄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는데, 알면서도 일단 그렇게 던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게 네고의 방법이기도 하고요.


여태 겪었던 클라이언트들은 프로그램에 대한 양보는 없습니다. 주거인 경우 요구가 50세대이면 어떻게든 50가구를 만들어내야 하고요, 호텔의 경우 180 객실을 요구하면 무조건 180개의 객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만큼 그들도 철저한 분석을 한 뒤 요구하는 거니까요. 저는 이 시작 단계에서부터 관여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디자인팀을 관리하고, 다른 전문가들과의 협업도 관리하고, 디자인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클라이언트에게 정기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그걸로 피드백을 받으면 다시 디자인팀에게 전달하여 방향을 지시하고 검토하고…… 이 과정을 쭉 이어갑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10명 안팎의 디자인 팀과 100여 명의 전문가들을 조율하고 움직여서 실시설계까지 이어갑니다. 그 와중에 뉴욕시 건축과에 인허가 신청도 해야 하고요, 프로젝트 규모와 프로그램에 따라 보건당국이나 문화재 관리청 같은 곳과의 인허가 문제도 풀어 나가야 하지요.


길고 긴 인허가 과정이 끝나고 실시설계를 마무리하고 납품이 되면, 그때부터는 클라이언트가 건설사를 선정합니다. 공사 시작이지요. 종종 실시설계 과정과 건설사 선정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기도 하고요.


a8218a0dfe590.jpg건설 현장에서


미국은 한국과는 다르게 무한 책임을 집니다. 납품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디자인했던 당사자가 공사 중의 감리까지 하는 시스템이에요. 공사가 시작되면 디자인 단계보다 1/10 정도로 관리하고 협약해야 하는 당사자가 줄기는 합니다만, 이제부터는 건설사와의 싸움이 시작되는 겁니다. 공사 중 발생하는 현장의 문제, 건설 사고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납품한 실시설계도에서 잘못된 점이나 누락된 정보들을 메꾸고 채우는 것도 저의 일입니다. 실시도면이 완성되어도 실제로 지으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누락된 정보가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런 정보를 채워줄 때 묘한 줄타기도 해야 합니다. 나의 실수를 깨끗이 인정할 것이냐, 아니면 어떻게 든 건설사 탓으로 돌릴 것이냐… 결국엔 누가 책임지고 비용을 지불하느냐는 돈의 문제인 거죠. 


보통 2년에서 길게는 지금 10년째 하는 프로젝트도 있어요. 긴 시간의 줄타기가 끝나면 화려한 오프닝 초대를 끝으로 그 프로젝트는 완료되고, 다시 새 프로젝트로 옮겨갑니다.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요. 다만 요즘은 경기가 좋지 않아 프로젝트에서 프로젝트로 계속 이어지기보다는 과정 무시하고 필요한 곳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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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터넷 방송 ‘엘리, 뉴욕은 원래 독해!’도 운영하고 계신데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엘뉴원독의 시작은 2018년 5월이었습니다. 벌써 8년차인데요. 개인적으로 엘뉴원독 시작 전에 ‘뉴욕 노가리’라는 팟캐스트를 3년 정도 운영했어요. 그때는 주로 건축 이야기만 했었죠. 어느 날 갑자기 CP가 방송을 접겠다고 선언해서 그만두었는데, 허탈감에 빠졌던 제게 우리끼리 방송을 만들자고 격려해주고 응원해 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준 사람이 제 집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한국에서 사업 중인 엘리와 집사람, 그리고 저, 세 사람이 엘뉴원독을 시작했죠. 그러다 보니 아직도 집사람이 뭘 하라고 하면 그냥 합니다. 원래 노사갈등이라는 건 어디든 존재하는데 이건 노와 사의 관계가 아닌 까라면 까는 조직과도 같아요. (웃음) 게다가 뉴욕씨(엘뉴원독의 뉴요커 게스트를 일컫는 말)라는 조직원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이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 좀처럼 예상 불가예요.


전 모든 이의 인생은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사는, 혹은 그냥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고 있는 우리들 각자의 인생이 예술이라고 보는 거지요. 방송에서 뉴욕씨를 만나는 것은 그들의 분야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하지만, 생활인으로서의 전해 듣는 그들의 이야기들은 결국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의 일들이라 공감할 부분이 참 많습니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고해석 건축가가 자택에서 열었던 뉴욕씨와의 송년회 파티


유학을 와서 한 전문 분야에만 20년 넘게 매진하다 보면 깊어질 수는 있으나 어느 순간 넓게 보는 것을 멈추게 되더라고요. 엘뉴원독의 ‘뉴욕씨를 만나다’라는 코너는 주변을 둘러보는 일을 다시 시작하게 도와줘요.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나와 비슷한 고민과 갈등과 노력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다는 걸 체감할 수 있는…… 그래서 방송을 떠나 뉴욕씨들과 만나서 어울려 떠들고 먹고 마시는 시간이 참 소중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저희들에게 방송 한두 회분 채우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출연자분들께서도 아시면 좋겠어요.


엘뉴원독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누군가가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무언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려면 엘뉴원독에 한 번쯤 출연해야 한다’는 기준점이 됐으면 한다는 거랄까요? 그러니 많은 연락 부탁드립니다. (웃음)


5dba4dbce4c9a.jpg고해석, 윤성환 건축가


Q. 건축가의 눈에 보이는 뉴욕은 어떤가요? 

뉴욕은 바로 저입니다. 굉장히 수줍음을 많이 타지만 그 속에는 불기둥이 타오르고 있는, 단지 표현을 하지 않거나 못할 뿐, 열정이 없는 것이 아닌 그 무엇.


이 도시는 수많은 열정이 모여서 그 변화를 멈추지 않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뉴욕으로 여행왔다가 뉴욕앓이를 하신다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뉴욕앓이를 하는지 물어보면 구체적이거나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답을 듣지 못해요. 그냥 좋답니다. 우리가 유럽 여행을 가서 느끼는 그 좋음과는 상당히 다르고요.


이스트 빌리지 어딘가에서 먹은 일본식 선술집의 안주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MoMA 콜렉션을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이스트 빌리지와 MoMA의 중간 어딘가를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걸어 다니며 구경했던 화려한 쇼윈도를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틀 묵었던 센트럴 파크 근처 호텔에서 보았던 뷰를 다시 보고 싶다며 이 도시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 기억의 포인트가 너무나도 달라서 도대체가 공통점을 찾기 힘들어 보이기도 하지만, 건축을 하는 저로서는 이 기억들이 전부 이 도시를 만들어가는 욕망의 투영이라 봅니다. 블록 하나하나가 같은 욕망을 가진 자본과 만나 행선지를 만들고 이벤트를 만듭니다. 그 업에 있는 저로서는 그 다이나믹함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이성적입니다. 물론 자칫 악의적으로 들릴 수 있는 ‘자본주의’를 살짝 포장하여 도시의 낭만처럼 만드는 작업도 필요하고요. 그런 포장에 놀아나는 유행을 볼 때도 즐겁고, 그런 유행을 만들기 위해 포장하는 작업도 즐겁습니다.


Q. 여가활동이 궁금합니다. 함께 진행하시는 인터넷 방송 외에 각자의 시간엔 어떤 키워드에 열광하고, 애정을 쏟으시는지요? 

엘뉴원독을 통해 많이 알려진 저의 취미이기도 한데요, 전 빈티지 오디오 시스템(Antique Audio System)에 관심이 많습니다. 50년대를 기준으로 그 이후에 생산된 오디오 기기들을 10년 단위로 묶어서 모으고 있어요. 이게 돈과 시간이 필요한 여가생활인지라 요즘은 한동안 웅크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슬슬 2000년대로 넘어 와야 하는데 나름 기준을 세운 것이 ‘Antique’인지라 넘어 오는 게 쉽지 않네요.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고해석 건축가가 수집하는 오디오 시스템


또 하나, 축구에 열광합니다. 이젠 나이가 나이인지라 직접 하는 건 무리가 있고 관전을 좋아해요. 손흥민 선수가 있던 토트넘을 무지하게 응원했습니다만 LA로 넘어간 뒤 축구가 재미가 없어져 약간 우울한 상태입니다. 월드컵이 미국에서 열리는데 왜 우울하냐 하실 분들이 있으실 것 같은데, 진정한 축구팬들이라면 그 이유를 아실 것 같고, 공감도 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Q.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요?

일단은 2년 더해서 엘뉴원독 10년을 채우는 것이 단기 목표이고요, 10주년에는 뉴욕씨에 응해주셨던 분들을 전부 초대해서 배꼽 빠지게 재미난 파티를 하고 싶어요.


전 제 인생이 성공이든 실패이든 드라마틱하길 원하기보다는, 주변의 예술 같은 인생을 옆에서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생각나는 사람, 털어놓고 얘기하고 싶은 사람, 응원 받으면 힘 날 것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되는 게 인생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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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앞으로 미국으로 이민 올 미래의 후배들을 위해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내 것’ 또는 ‘내 것과 비슷한 것’ 아니면 이민생활 하면서 눈 돌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살아내기 바빠 죽겠는데 그럴 마음의 여유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없어져서 그 소중함을 느끼게 되면 그때부터의 모든 것들은 인위적인 의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가짜들이 많다는 걸 염두에 두셨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Q. 마지막으로 이 글을 보실 많은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20대에 유학을 나오면서 세상을 씹어 먹겠다는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오만방자했지요. 세상을 씹어 먹는 게 힘들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찌어찌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아빠가 되고, 어른이 되어가는 30대가 됐을 때, 유학을 나오며 다짐했던 나의 꿈을 이룰 수도 있겠구나 싶은 기회가 찾아왔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냥 눌러 앉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40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제는 돌이키기에도 너무 늦은 나이. 녹음 장소도 변변치 않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팟캐스트를 시작했고,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20대의 나처럼 세상을 씹어 먹겠다는 친구도 있었고 앞으로의 일이 너무 기대가 되는 30대도 있었으며, 이제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다른 사람을 지도 편달하는 40대는 물론이요, 타국 생활, 비자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상담해주며 눈물을 흘리는 50대도 있었습니다.


이때가 내가 무엇을 잘하고 어떻게 밥벌이를 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시기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각자 인생에 대한 진지함, 치열함을 보고 배웠으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 그리고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동시에 고민하는 시기였습니다.


이 인터뷰를 보고 계실 독자분들께서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인생은 롤러코스터 같은 것인지라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다는 건 압니다. 지금의 모습은 당신의 인생을 예술로 만드는 과정일 뿐 절대로 당신을 정의하는 절대값은 될 수 없어요. 그러니 지금 당신의 모습, 그대로를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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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조은정
사진 제공 |  고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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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2개월에 한 번은 비행기를 타줘야 제대로 된 행복한 인생이라고 믿는 여행교 교주. <미국 서부 셀프트래블>, <뉴욕 셀프트래블> 외 여러 권의 저서가 있는 베스트셀러 직딩 여행작가. 현재 뉴욕에서 지내고 있다.
https://blog.naver.com/eiff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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