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시나요? 가을 들판, 논둑을 가로지르는 농부, 동네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천,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커다란 버드나무, 뒷산의 밤나무, 시원한 계곡.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일 때 자연스럽게 농촌이라는 낭만적인 공간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실도 그럴까요? 전직 영화기자, 현직 농부인 안효원 작가는 몇 년 전 농촌총각이라는 이름으로 브릭스 매거진에 농촌 적응기 이야기를 연재하기도 했는데요, 농촌에서의 삶을 유쾌하게 그렸으나 결코 유쾌할 수만은 없었던 과정을 신간 『아파서 시골에 왔습니다』에 담았습니다.

안효원 작가
Q. 책 제목처럼 몸이 아파서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그 이야기부터 해주세요.
서른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한 대형 서점 북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었는데 하루 출퇴근 시간이 왕복 5시간이었어요. 1년 정도 그 생활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점점 살이 빠지고 피로하고 이유 없이 몸에 통증이 있었어요. 1년 넘게 많은 병원을 다녔지만 병명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병원에서 온 몸을 샅샅이 훑고 난 다음에 내려진 병명이 근무력증이라는 희귀난치성 질환이었습니다. 겨우 병명을 찾아서 기뻤는데 가슴을 여는 수술을 해야 했어요. 수술을 마치고도 숨을 쉬기가 어려워서 다시 입원해 중환자실에서 뜬 눈으로 9일을 보냈어요. 처음에는 ‘내가 뭘 그리 잘못했나?’ 싶었는데, 막판에는 ‘왜?’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남더라고요.
Q. 지금은 꽤 건강한 농부처럼 보이네요.
네, 근무력증은 다 나았습니다. 대신 논과 밭에서 허리를 숙이고 일을 하느라 허리가 안 좋아졌어요. 아팠던 기억은, 지금은 잘 생각나지도 않아요. 농촌 삶도 은근히 바쁘거든요. 아, 그 당시 아픈 와중에도 5주 연속 소개팅을 했는데 한 번도 애프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흑역사가 떠오르네요.

Q. 어릴 적 살던 곳이긴 하지만 오랜 도시 생활 이후 시골 생활에 다시 적응하는 데 어렵지는 않았나요?
적응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어요. 2년 정도 지날 때까지 몸이 성치 않아서 주변에서 ‘살아만 있어라’하는 분위기였거든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니 세상 편하고 좋더라고요. 고향으로 내려간 거라 그리 낯설지는 않았어요.
Q. 몸이 나아지며 다시 도시로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저희 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씀이에요. 아버지는 평생 농사를 지으며 온갖 고생을 다 하셨으니 저를 다시 도시로 보내고 싶어 하셨지요. ‘내가 너 농부로 키우려고 도시까지 보내 공부시켰겠냐?’ 그랬던 거지요. 저로서는, 몸이 낫는 것보다 먼저 마음이 더 좋아졌고, 그래서 서울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았어요.
Q. 뭘 하면서 먹고 살면 되겠다 하는 계획이 있었나요?
농사일을 할 체력은 안 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 독서 지도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제가 나온 초등학교에서 인턴 교사 일을 제안해 주셔서 사람 구실을 하게 됐는데, 어른들 사이에서 신체 능력 레벨 최하위였는데, 아이들 사이에서는 ‘최고’였어요. 아이들은 저를 ‘아픈 사람’이 아니라 ‘능력자’로 봐 줬어요.
생활에 대한 고민이야 없을 수가 없지만, 많은 부분 아버지가 해결해주셨어요. 몸이 더 좋아지면 아버지 농사를 도울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게 농사니까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일을 전혀 안 시켰어요. 공부만 하라고. 그런데 몸이 좀 나으니까 엄청 시키더라고요.

Q. 농사일이 생각처럼 쉽게 되던가요?
실수투성이였지요. 그렇다고 지금은 실수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에요. 한번은 아버지가 밭에 반짝이는 줄을 치라고 했어요. 봄에 콩을 심었는데 싹이 나오면 새가 엄청 달려들거든요. 최대한 보기 좋게 줄을 치고 있는데 콩밭에 옥수수 싹이 보이더라고요. 그냥 뽑았죠. 콩밭에는 콩만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옥수수가 옆에 또 있는 거예요. 심지어 줄을 맞춰서요. 일일이 다 뽑다 보니 아 뭔가 잘못됐다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는 이미 옥수수의 팔 할이 다 사라진 후였어요. 그해에는 눈치가 보여 옥수수를 조금밖에 못 먹었어요.
‘아무 일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지난봄에 볍씨 싹을 틔우는데, 볍씨를 따뜻한 물에 담가야 해요. 그래서 가열기를 켰는데 제가 실수로 코드를 잘못 끼워서 온도조절기가 작동을 안 했어요. 일정 온도가 되면 꺼져야 하는데 쉬지 않고 끓이니 볍씨가 아주 푹 익어버렸지요. 축 늘어진 볍씨 다 버리고 부랴부랴 새로 시작하느라 난리법석을 피웠어요.
Q. 농사가 나와 안 맞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안 들던가요?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다니, 그런 자책을 많이 했지요. 제가 다른 사람들 실수하는 건 잘 받아들이는데 제 실수는 잘 못 받아들여요. 그러다 마흔 넘으며 이건 약간 억울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괜찮아, 천천히, 한 번 더 하면 되지. 그런 말을 되뇌고는 하지요.
아파서 시골에 내려오고 15년이 지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게 한 가지 있어요. 나만큼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은 없다! 사실 저 20대, 30대 때는 사람들이 저한테 관심이 많은 줄 알았어요. 제가 마음 쓰는 만큼 돌려받는 게 관계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살면 살수록, 어른이 되면 될수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안효원 작가와의 인터뷰 2편 이어서 읽기
인터뷰 | 이주호
사진 | 안효원
‘농촌’ 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시나요? 가을 들판, 논둑을 가로지르는 농부, 동네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천,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커다란 버드나무, 뒷산의 밤나무, 시원한 계곡.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일 때 자연스럽게 농촌이라는 낭만적인 공간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실도 그럴까요? 전직 영화기자, 현직 농부인 안효원 작가는 몇 년 전 농촌총각이라는 이름으로 브릭스 매거진에 농촌 적응기 이야기를 연재하기도 했는데요, 농촌에서의 삶을 유쾌하게 그렸으나 결코 유쾌할 수만은 없었던 과정을 신간 『아파서 시골에 왔습니다』에 담았습니다.
안효원 작가
Q. 책 제목처럼 몸이 아파서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그 이야기부터 해주세요.
서른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한 대형 서점 북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었는데 하루 출퇴근 시간이 왕복 5시간이었어요. 1년 정도 그 생활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점점 살이 빠지고 피로하고 이유 없이 몸에 통증이 있었어요. 1년 넘게 많은 병원을 다녔지만 병명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병원에서 온 몸을 샅샅이 훑고 난 다음에 내려진 병명이 근무력증이라는 희귀난치성 질환이었습니다. 겨우 병명을 찾아서 기뻤는데 가슴을 여는 수술을 해야 했어요. 수술을 마치고도 숨을 쉬기가 어려워서 다시 입원해 중환자실에서 뜬 눈으로 9일을 보냈어요. 처음에는 ‘내가 뭘 그리 잘못했나?’ 싶었는데, 막판에는 ‘왜?’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남더라고요.
Q. 지금은 꽤 건강한 농부처럼 보이네요.
네, 근무력증은 다 나았습니다. 대신 논과 밭에서 허리를 숙이고 일을 하느라 허리가 안 좋아졌어요. 아팠던 기억은, 지금은 잘 생각나지도 않아요. 농촌 삶도 은근히 바쁘거든요. 아, 그 당시 아픈 와중에도 5주 연속 소개팅을 했는데 한 번도 애프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흑역사가 떠오르네요.
Q. 어릴 적 살던 곳이긴 하지만 오랜 도시 생활 이후 시골 생활에 다시 적응하는 데 어렵지는 않았나요?
적응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어요. 2년 정도 지날 때까지 몸이 성치 않아서 주변에서 ‘살아만 있어라’하는 분위기였거든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니 세상 편하고 좋더라고요. 고향으로 내려간 거라 그리 낯설지는 않았어요.
Q. 몸이 나아지며 다시 도시로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저희 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씀이에요. 아버지는 평생 농사를 지으며 온갖 고생을 다 하셨으니 저를 다시 도시로 보내고 싶어 하셨지요. ‘내가 너 농부로 키우려고 도시까지 보내 공부시켰겠냐?’ 그랬던 거지요. 저로서는, 몸이 낫는 것보다 먼저 마음이 더 좋아졌고, 그래서 서울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았어요.
Q. 뭘 하면서 먹고 살면 되겠다 하는 계획이 있었나요?
농사일을 할 체력은 안 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 독서 지도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제가 나온 초등학교에서 인턴 교사 일을 제안해 주셔서 사람 구실을 하게 됐는데, 어른들 사이에서 신체 능력 레벨 최하위였는데, 아이들 사이에서는 ‘최고’였어요. 아이들은 저를 ‘아픈 사람’이 아니라 ‘능력자’로 봐 줬어요.
생활에 대한 고민이야 없을 수가 없지만, 많은 부분 아버지가 해결해주셨어요. 몸이 더 좋아지면 아버지 농사를 도울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게 농사니까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일을 전혀 안 시켰어요. 공부만 하라고. 그런데 몸이 좀 나으니까 엄청 시키더라고요.
Q. 농사일이 생각처럼 쉽게 되던가요?
실수투성이였지요. 그렇다고 지금은 실수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에요. 한번은 아버지가 밭에 반짝이는 줄을 치라고 했어요. 봄에 콩을 심었는데 싹이 나오면 새가 엄청 달려들거든요. 최대한 보기 좋게 줄을 치고 있는데 콩밭에 옥수수 싹이 보이더라고요. 그냥 뽑았죠. 콩밭에는 콩만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옥수수가 옆에 또 있는 거예요. 심지어 줄을 맞춰서요. 일일이 다 뽑다 보니 아 뭔가 잘못됐다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는 이미 옥수수의 팔 할이 다 사라진 후였어요. 그해에는 눈치가 보여 옥수수를 조금밖에 못 먹었어요.
‘아무 일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지난봄에 볍씨 싹을 틔우는데, 볍씨를 따뜻한 물에 담가야 해요. 그래서 가열기를 켰는데 제가 실수로 코드를 잘못 끼워서 온도조절기가 작동을 안 했어요. 일정 온도가 되면 꺼져야 하는데 쉬지 않고 끓이니 볍씨가 아주 푹 익어버렸지요. 축 늘어진 볍씨 다 버리고 부랴부랴 새로 시작하느라 난리법석을 피웠어요.
Q. 농사가 나와 안 맞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안 들던가요?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다니, 그런 자책을 많이 했지요. 제가 다른 사람들 실수하는 건 잘 받아들이는데 제 실수는 잘 못 받아들여요. 그러다 마흔 넘으며 이건 약간 억울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괜찮아, 천천히, 한 번 더 하면 되지. 그런 말을 되뇌고는 하지요.
아파서 시골에 내려오고 15년이 지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게 한 가지 있어요. 나만큼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은 없다! 사실 저 20대, 30대 때는 사람들이 저한테 관심이 많은 줄 알았어요. 제가 마음 쓰는 만큼 돌려받는 게 관계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살면 살수록, 어른이 되면 될수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안효원 작가와의 인터뷰 2편 이어서 읽기
인터뷰 | 이주호
사진 | 안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