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책방, 카페, 전시장에서 동네, 지자체, 국가 단위까지 각종 행사, 이벤트가 우리의 SNS 화면을 채웁니다. 전시, 음악회, 영화제, 마켓 같은 익숙한 행사부터 걷거나, 눕거나, 책을 읽기도 하고, 공연장에서 각자 헤드폰을 끼고 춤을 추거나 바람 부는 광장에서 레고 블럭을 맞추기도 하는 낯선 행사까지, 정말이지 매일이 축제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보고 듣고 뛰어들 행사들이 늘어갈수록 이 모든 일의 과정을 기획하고, 만들고, 진행하는 사람들의 수요가 늘어갑니다. 이른바 문화기획자. 창작이 아니라 문화를 기획한다는 게 과연 어떤 일인지, 문화기획자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뉴욕, 서울, 제주를 하나로 엮어 우리 삶에 문화 자산을 증식해 주는 사람, 차은실 문화기획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았습니다.

차은실 문화기획자
지난 주말 제주 일년서가에서 행사가 있으셨지요.
네. ‘일년서가’ 시즌2 오프닝이 4월 25일 오후에 있었어요. 저는 제주에서 하루 종일 손님맞이를 하고 왔고요. 일년서가는 책방 이름인데요, 1년만 해보자 해서 일년서가였어요. 그런데 2025년 1년을 운영해 보니, 책방지기 님들이 1년으로는 아쉽다고 느끼셔서 1년을 더 해 보기로 한 거예요. 2026년 책방 운영에 제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환경과생명문화재단 이다’가 운영진으로 속해 있어서 저도 일원으로 참여하게 됐어요. 우리끼리의 오프닝 행사가 아니라 좀 다양한 분들이 함께하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해서 출판업을 하거나 책방을 운영하시는 분들이 아니더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누구나 편히 오시도록 했어요.
일년서가는 처음 어떻게 꾸려지게 된 건가요?
제주에 살고 있지 않은 출판사, 책방지기 분들이 제주살이 로망을 갖고 잠깐 살아 볼까 해서 함께 공간을 마련하고, 일주일씩 돌아가며 운영해 보는 방식으로 1년을 지냈어요. 그리고 올해 새로운 구성원이 모였지요. 책방 전체 규모가 40평 정도로 꽤 커요. 거기에 구역을 나눠서 각자 큐레이션을 했고요. 책방이 책만 파는 공간은 아니잖아요. 각자의 색깔을 담은 행사와 전시를 하고 있고, 북토크와 인형극 등 다양한 이벤트를 상시로 진행하고 있어요. ‘환경과생명문화재단 이다’의 경우는 생명권행동지원사업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지원했는데, 올해 영화들을 함께 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일년서가에서
일년서가 말고도 원래 제주도에서 개인 공간을 운영하셨지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제가 좋아서 선택해 살았던 곳은 뉴욕이에요. 도시가 아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 보고 싶어서 한국으로 돌아와 선택한 곳이 제주고요. 누구나 한번쯤 살아보고 싶어 하는 곳들에 다 살아 볼 수 있어서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제주 공간은 처음부터 건물을 짓고 그 공간을 채웠는데, 제 인생에서 엄청난 경험이었어요. 뉴욕에서 인연을 맺은 한국 현대미술 작가님들이 한국에 왔을 때 편하게 머무르면서 작업과 전시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공간을 디자인했어요.
그리고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님과 인문학 공부 공간으로도 꾸려가고 싶었기에 다양한 네트워킹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고전 공부하시는 분들, 예술가들과 모임, 전시, 이벤트를 함께 진행하기도 했어요. 공간이름은 ‘서귀포 인문예술공간 환이정(이하 환이정)’입니다.
‘환이정’이라는 이름은 고미숙 선생님께서 지어주셨어요. 주역 64괘 중 흩어질 ‘환’을 써서 근심 걱정을 흐트러뜨린다, 날려버린다,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뜻이에요. 실제로 야외 정원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제가 좋아하는 현대미술 작품들을 보여줄 수 있도록 공을 많이 들였고요.
2020년부터 2023년까지 꼬박 제주에 살면서 ‘환이정’을 우선순위에 두고 일을 했어요. 그 안에서 좋은 경험을 많이 했지요. 지금은 잠시 쉬어가는 기간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언제 재개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제 에너지가 회복될 때 다시 시작할 생각입니다.
2023년에 제주 활동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올라오신 건가요?
지금까지 살면서 계획한 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어요. 지나고 보면 아, 이렇게 되려고 그랬던 거구나 하는 일이 참 많더라고요. 그런데 항상 사는 곳을 바꾸며 큰 변화를 줄 때 다음 단계가 자연스럽게 열리기도 해요. 2023년이 그랬어요. 뭔가 변화가 필요해서 결정이 필요했고, 서울과 제주를 왔다 갔다 하면서 뭔가를 더 해보고 싶었어요. 그때가 마침 제가 문화예술교육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해서 학기 중에는 서울에 있고, 방학에는 제주에 있자는 계획을 세웠어요. 거주지가 바뀌면서 상대적으로 제주보다 서울에서 더 많이 체류하게 되었지만, 제게 제주는 묘하게 마음속 고향처럼 여겨져요.
처음 사회 경력은 공연, 뮤지컬 기자이셨지요?
사람 만나고 말을 하는 것은 좋아하는데 글을 쓰는 것은 안 좋아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늘 학교신문사에서 활동했어요. 제가 처음에 지원하는 곳은 언제나 방송부였는데 이상하게 신문부에 배정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대학교에 가서는 그냥 처음부터 학교 신문을 만드는 학보사에 들어갔어요. 내 일이 이건가 보다 하고 적극적으로 선택해 본 거지요. 전공은 아동복지였는데, 부전공으로 문화 마케팅을 했어요. 신문사에서도 처음에는 사회부에 배정이 됐다가 문화부를 같이 하게 됐고요. 그러다 편집장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 기회가 주어졌는데, 졸업 전 몇 군데에서 제안을 받았어요. 그중 공연 티켓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티켓링크’에서 콘텐츠 팀을 새로 만들며 웹 기획과 현장 취재 기자를 모집했는데, 그게 제 사회생활의 시작이 되었어요.
이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홍보팀장으로 일하다가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최고 규모의 영화제로 성장하던 시기 홍보팀 언론담당으로 합류하게 됐어요. 보도 자료를 받아서 기사를 작성하던 일에서 직접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배포하는 역할을 맡게 된 거예요.
문화마케팅 일에 생각만큼 수월하게 적응되던 가요?
티켓링크는 그야말로 티켓 판매가 중심이다 보니까 잘 팔리는 상품들을 어떻게 프로모션 할 것인가가 중요했어요. 그런데 영화제 홍보 일은 언론과 기자들의 성향을 파악해서 편하게 소통하고, 영화인들과 공무원들의 중간 역할을 해야 했어요. 영화인, 공무원, 이 두 부류는 같은 한국말을 하면서도 굉장히 다른 뜻으로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에요. 이 둘 사이를 통역해야 하는 것도 제 주요 업무였는데, 당시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위원장님을 수행하면서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많이 보고 배웠어요. 정말 좋은 어른을 만난 게 일뿐만 아니라 제 인생에서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뉴욕은 언제 가시게 된 건가요?
영화제 일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에 일을 그만 둘 생각은 없었어요. 영화제 일을 하며 쉬는 기간에는 1년에 1~2달 정도 여행을 했어요. 뉴욕은 가장 좋아하는 도시였기에 매년 갔는데 2006년 크리스마스에 여행을 하다가, 영화제는 행사 기간에 6개월 정도만 일해도 되니까 공부를 병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정말 ‘일놀놀일(일하면서 놀고 놀면서 일하고)’을 하러 뉴욕으로 갔어요. 그런데 운이 좋게 영주권 신청을 할 수 있는 회사가 연결이 돼서 워크 퍼밋을 받을 수 있었고, 불운하게도 서브프라임 리만브라더스 사태가 터지면서 미국 밖을 나가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매주 동료가 해고되는 살벌한 삶의 현장을 지켜보며 직장 생활을 이어가게 됐지요.
뉴욕에서 처음 일한 곳은 한국 교민들을 위한 온라인 포털 서비스인데, 뉴욕의 네이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미국 유학생이나 뉴욕에서 생활해 보신 분들은 다 아는 사이트일 거예요. 그곳에서 콘텐츠 관리와 운영을 담당하다가 뉴욕 브로드웨이, 라스베가스 태양의 서커스, 런던 웨스트엔드 티켓을 관리하는 회사에서 한국 담당 마케팅을 하게 됐어요. 나라는 바뀌었는데 신기하게도 한국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뉴욕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했던 회사는 하이엔드 치아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곳이었어요. 뉴욕과 두바이 지사를 운영하며 한국 치과 그룹의 교육을 의뢰받아 운영하고 있었어요. 저는 한국 마케팅 업무를 하면서 뉴욕 회사 직원들의 문화예술교육을 담당했어요.
처음 뉴욕에 갔을 때는 한국과 다른 경험을 해보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여러 상황으로 10년 넘게 머무르게 되었고, 연봉을 올리고 영주권 신분을 유지하는 일에 힘쓰며 더, 더, 더 많은 것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시기를 보냈지요.
현대미술 관련 일을 그때 시작하게 되신 거군요.
뉴욕은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미술관이 포진한 곳이고, 특히 제가 살았던 맨해튼 어퍼이스트는 뮤지엄 마일이라고 해서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소더비경매장, 뉴욕현대미술관(MoMA) 모두 연결되는 지역이었어요. 자연스럽게 미술을 접할 일이 많았고,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을 후원하는 미술재단과도 연이 닿으면서 뉴욕의 전시를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 작가들의 뉴욕 전시를 후원하는 일을 했지요. 그런 일이 자연스럽게 제주까지 이어지게 됐던 거고요.
한국에 다시 오신 건 언제인가요?
2017년 휴가를 한국으로 왔어요. 그때 전국을 한 바퀴 돌았어요. 다양한 곳을 다녔는데 통영, 경주, 제주가 특히 좋았어요. 특별한 계획은 없었지만 제주에서 뭔가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상의 후 짧은 고민 끝에 6개월 만에 뉴욕 생활을 정리했어요.
환이정에서 문화기획자로서의 경력이 시작된다고 봐야 하나요?
직장에 다닐 때는 직책을 부르면 됐는데 이제는 뭐라고 명명은 해야겠는데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된 거예요. 저는 그냥 차은실, 이름을 부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지만 한국 문화에서는 아직 어색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환이정’에서 기획을 담당하고 있었으니 저를 기획실장이라 소개했는데, 계속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기획자’로 불리게 됐어요.
문화기획자로서 제주에서 가장 먼저 만드신 행사는 뭔가요?
코로나 시기, 교류를 한다는 게 아주 조심스럽고, 또 외부인을 초대한다는 것 자체가 우려되던 시기에 환이정 넓은 정원에서 파머스마켓 행사를 진행했어요. 마켓 행사에 클래식 공연과 현대미술 전시, 숲 해설 등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더했고, 고맙게도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어요. 마켓이 흥행하며 환이정에 있던 밭을 활용하여 연계 프로그램으로 농부학교도 만들었어요. 생산과 판매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지요. 다양한 매스컴에서 관심을 가져 주시고, 모범적인 사례로 많은 곳에 소개되었어요.
정부에서 지정하는 문화도시 사업이 있는데, 서귀포가 지정이 되면서 마을문화공간 네트워킹이라는 사업이 시작되었고, 거기서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게 되었어요. 카페, 갤러리, 책방 같은 마을 문화 공간들을 엮는 연결자 역할을 하게 되었어요. 마을이라는 인식 없이 본래 각자 자기 공간을 운영하던 분들을 모은다는 게 쉽지 않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저도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보니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했고, 부딪쳐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일단 만나러 다녔어요. 처음에는 귀찮다고 버럭버럭 화내시는 분도 있었고 잡상인 취급하시는 분도 많았지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며 잘 마무리 되었어요.

그 네트워크 안에서 특별한 행사 같은 건 없었나요?
서귀포 주민들의 문화 향유 욕구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가장 원하는 문화 활동이 놀랍게도 영화였어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 당시 서귀포에는 영화관이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서울과 뉴욕에서는 영화 보는 게 일인가 싶었는데 서귀포는 영화 보는 게 행사가 되는 지역이더라고요. 그러면 영화제를 만들어 보는 게 가장 좋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대규모 영화제가 동네 정서에 맞지는 않았어요. 한 번에 큰 이벤트를 하는 것보다 각각의 공간들을 이용한다는 취지가 더 중요했지요.
10명 미만으로 각 마을 문화 공간에서 오붓하게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설정했고, 그래서 행사명을 ‘서귀포 시네마 라운지’라고 지었어요. 각 공간마다 시간대가 겹치지 않게 배치를 하고 타임 테이블에 맞춰서 각자 가고 싶은 장소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보게 했어요. 영화만 보는 게 아니라 공간에 맞춰서 불멍도 하고, 산책도 하고, 티타임도 하고, 그런 플러스알파 이벤트를 넣었고요. 공간 운영자 분들이 모객이나 평상시 운영에 부담을 느끼면 안 되니까 홍보는 문화도시 서귀포에서 대행해 드렸어요.
지원금을 직접 수령하는 걸 원하는 분들은 없었나요?
제가 가장 거리를 두는 방식이 돈 안 주면 안 해, 그런 건데, 정말 최악이지요. 나중에 지원금이 없어지더라도 자체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마음을 내도록 하는 게 굉장히 중요했어요. 공간을 운영하다 보면 내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굳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순간이 오는데, 그러면 의지가 꺾이고 동시에 내가 꿈꾸던 공간이 감옥이 되는 걸 느껴요. 그런 최악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은 다른 사람들과 공통분모를 찾아 네트워킹을 만들었을 때예요. 모였을 때 이런 좋은 기회가 생기는구나, 그걸 느껴야 해요.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제가 알려드리고 싶었던 게 이런 부분이었어요.
지금도 마을문화공간 네트워킹 사업이 자생하고 있나요?
먼저 공간은 부동산과 직접 연결돼 있는 문제가 있어요. 제주는 보통 연세이거나 전세 계약 기간이라 해도 1년, 2년 단위예요. 제주 생활을 길게 보지 않고 오시는 분들이 많고, 무엇보다 카페, 책방, 갤러리는 돈을 벌 수 있는 업종이 아니에요. 그냥 한번 본인의 로망을 실현하는 공간이지 그걸로 부자가 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 기간 동안 경제 자본을 버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이제껏 해 보지 않은 다른 경험으로 자본을 쌓아 가시라 말씀 드렸어요. 경제 자본을 뛰어넘는 관계 자본, 문화 자본으로 부자가 되시도록 유도했던 거지요.

환이정을 떠나 서촌에 자리잡고 환경과생명문화재단 이다 소속 활동을 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2021년도 이다 재단이 만들어질 때 환이정도 함께했어요. 이것도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분절돼 있는 건 하나도 없어요. 제 인생이 하나씩 하나씩 뭔가 다 겹치고 연결되면서 여기까지 온 것 같네요.
이다 소속 말고 개인 문화기획자로서 서촌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요즘은 제안 주시는 것들은 거의 다 받아들이면서 하고 있어요. 혼자 연구하는 것 못지않게 강의를 하거나 공부하시는 분들과 만나 일을 해보는 것도 엄청난 트레이닝이 돼요. 그래서 주제와 대상을 달리 하며 ‘서울시민대학’에서 다양한 강의를 하고 있고, 커뮤니티 모임 ‘넷플연가’에서 주니어 문화기획자를 위한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어요.
생각해 보면, 이런 활동을 통해 ‘문화기획자’라는 포지션이 주어진 것 같아요. 워크숍에서는 문화 기획에 흥미를 느끼는 20~30대 친구들이나 실제 문화 기획 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모여 뭐가 뭔지 모른 채로 세상 탓도 하고 서로 응원도 하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끼고 있어요.
직업으로서의 문화기획자는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나요?
연극이나 영화는 제작, 연출과가 있지만 문화 기획에는 전공과목이 따로 있지도 않고,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흔히 문화 기획을 한다고 하면 각 지역별 문화 예술 단체, 재단과 연계한 일이 많고요. 그래서 어떤 조건을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많이 경험하고 일상에서 트레이닝을 하셔야 해요. 저는 문화 기획은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지금의 우리는 모두가 기획자라고 생각해요. 문화라는 것 자체가 우리의 일상 의식주를 지칭하잖아요. 경계를 두지 말고 모두가 문화기획자가 되어야 하는 시기인 것 같기도 하고요.
문화기획자 차은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모든 일을 다르게 보려고 하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하면 흥미로운 일을 재미있게,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을까. 흥미, 재미는 혼자서도 되는데 의미까지 있으려면 둘 이상은 돼야 해요. 나만 좋아서는 안 되고 이왕이면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누리자, 그게 기획자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 의미는 거기서 생겨나고, 그런 기획을 했을 때 좋은 문화기획자가 되는 것 같아요.
문화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요?
자본이지요. 그런데 문화기획자라면 자본을 좀 더 세분화시켜야 해요. 기획이라는 단어에는 칼 도(刀)자가 들어 있어요. 여러 업무의 흐름은 자연스러워야 하지만, 흐름이 정확하게 이어지려면 잘라서 세분화시켜야 해요. 경제 자본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관계 자본과 문화 자본이 있어야 돈 이상의 관계로 풀어 낼 수 있어요. 행사장 홍보물 배치하고 기념품 리본 묶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사실 문화 자본은 엄청난 감각이에요.
의외로 한국은 문화 기획하기에 좋은 곳이에요. 지원 사업들이 꽤 있거든요. 내 돈 들이지 않고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요. 미국은 문화부가 없습니다. 다 자기 돈으로 해야 돼요. 지원금이란 건 나중에는 독이 되기도 하지만, 의지만 있다면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사업으로 시작은 할 수 있어요.
올해 어떤 일들을 앞두고 계신가요?
몇 군데에서 제안 받은 프로젝트들이 하반기에 몰려 있어요. 9월, 10월에 서울, 경기에서 전시와 축제가 있어요. 제 성향상 또 여기저기 연결을 시키고 싶어서 어디가 좋을지 고민 중입니다. 여기서만 하면 재미없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 때문에 새로운 공간들을 찾고 있어요. 전시가 메인이고요, 축제는 마켓이나 이벤트 형식을 벗어나 보고 싶어서 ‘축제’라는 이름을 쓰지 않은 축제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 이주호
사 진 | 신태진
개인 책방, 카페, 전시장에서 동네, 지자체, 국가 단위까지 각종 행사, 이벤트가 우리의 SNS 화면을 채웁니다. 전시, 음악회, 영화제, 마켓 같은 익숙한 행사부터 걷거나, 눕거나, 책을 읽기도 하고, 공연장에서 각자 헤드폰을 끼고 춤을 추거나 바람 부는 광장에서 레고 블럭을 맞추기도 하는 낯선 행사까지, 정말이지 매일이 축제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보고 듣고 뛰어들 행사들이 늘어갈수록 이 모든 일의 과정을 기획하고, 만들고, 진행하는 사람들의 수요가 늘어갑니다. 이른바 문화기획자. 창작이 아니라 문화를 기획한다는 게 과연 어떤 일인지, 문화기획자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뉴욕, 서울, 제주를 하나로 엮어 우리 삶에 문화 자산을 증식해 주는 사람, 차은실 문화기획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았습니다.
차은실 문화기획자
지난 주말 제주 일년서가에서 행사가 있으셨지요.
네. ‘일년서가’ 시즌2 오프닝이 4월 25일 오후에 있었어요. 저는 제주에서 하루 종일 손님맞이를 하고 왔고요. 일년서가는 책방 이름인데요, 1년만 해보자 해서 일년서가였어요. 그런데 2025년 1년을 운영해 보니, 책방지기 님들이 1년으로는 아쉽다고 느끼셔서 1년을 더 해 보기로 한 거예요. 2026년 책방 운영에 제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환경과생명문화재단 이다’가 운영진으로 속해 있어서 저도 일원으로 참여하게 됐어요. 우리끼리의 오프닝 행사가 아니라 좀 다양한 분들이 함께하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해서 출판업을 하거나 책방을 운영하시는 분들이 아니더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누구나 편히 오시도록 했어요.
일년서가는 처음 어떻게 꾸려지게 된 건가요?
제주에 살고 있지 않은 출판사, 책방지기 분들이 제주살이 로망을 갖고 잠깐 살아 볼까 해서 함께 공간을 마련하고, 일주일씩 돌아가며 운영해 보는 방식으로 1년을 지냈어요. 그리고 올해 새로운 구성원이 모였지요. 책방 전체 규모가 40평 정도로 꽤 커요. 거기에 구역을 나눠서 각자 큐레이션을 했고요. 책방이 책만 파는 공간은 아니잖아요. 각자의 색깔을 담은 행사와 전시를 하고 있고, 북토크와 인형극 등 다양한 이벤트를 상시로 진행하고 있어요. ‘환경과생명문화재단 이다’의 경우는 생명권행동지원사업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지원했는데, 올해 영화들을 함께 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일년서가에서
일년서가 말고도 원래 제주도에서 개인 공간을 운영하셨지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제가 좋아서 선택해 살았던 곳은 뉴욕이에요. 도시가 아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 보고 싶어서 한국으로 돌아와 선택한 곳이 제주고요. 누구나 한번쯤 살아보고 싶어 하는 곳들에 다 살아 볼 수 있어서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제주 공간은 처음부터 건물을 짓고 그 공간을 채웠는데, 제 인생에서 엄청난 경험이었어요. 뉴욕에서 인연을 맺은 한국 현대미술 작가님들이 한국에 왔을 때 편하게 머무르면서 작업과 전시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공간을 디자인했어요.
그리고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님과 인문학 공부 공간으로도 꾸려가고 싶었기에 다양한 네트워킹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고전 공부하시는 분들, 예술가들과 모임, 전시, 이벤트를 함께 진행하기도 했어요. 공간이름은 ‘서귀포 인문예술공간 환이정(이하 환이정)’입니다.
‘환이정’이라는 이름은 고미숙 선생님께서 지어주셨어요. 주역 64괘 중 흩어질 ‘환’을 써서 근심 걱정을 흐트러뜨린다, 날려버린다,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뜻이에요. 실제로 야외 정원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제가 좋아하는 현대미술 작품들을 보여줄 수 있도록 공을 많이 들였고요.
2020년부터 2023년까지 꼬박 제주에 살면서 ‘환이정’을 우선순위에 두고 일을 했어요. 그 안에서 좋은 경험을 많이 했지요. 지금은 잠시 쉬어가는 기간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언제 재개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제 에너지가 회복될 때 다시 시작할 생각입니다.
2023년에 제주 활동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올라오신 건가요?
지금까지 살면서 계획한 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어요. 지나고 보면 아, 이렇게 되려고 그랬던 거구나 하는 일이 참 많더라고요. 그런데 항상 사는 곳을 바꾸며 큰 변화를 줄 때 다음 단계가 자연스럽게 열리기도 해요. 2023년이 그랬어요. 뭔가 변화가 필요해서 결정이 필요했고, 서울과 제주를 왔다 갔다 하면서 뭔가를 더 해보고 싶었어요. 그때가 마침 제가 문화예술교육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해서 학기 중에는 서울에 있고, 방학에는 제주에 있자는 계획을 세웠어요. 거주지가 바뀌면서 상대적으로 제주보다 서울에서 더 많이 체류하게 되었지만, 제게 제주는 묘하게 마음속 고향처럼 여겨져요.
처음 사회 경력은 공연, 뮤지컬 기자이셨지요?
사람 만나고 말을 하는 것은 좋아하는데 글을 쓰는 것은 안 좋아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늘 학교신문사에서 활동했어요. 제가 처음에 지원하는 곳은 언제나 방송부였는데 이상하게 신문부에 배정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대학교에 가서는 그냥 처음부터 학교 신문을 만드는 학보사에 들어갔어요. 내 일이 이건가 보다 하고 적극적으로 선택해 본 거지요. 전공은 아동복지였는데, 부전공으로 문화 마케팅을 했어요. 신문사에서도 처음에는 사회부에 배정이 됐다가 문화부를 같이 하게 됐고요. 그러다 편집장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 기회가 주어졌는데, 졸업 전 몇 군데에서 제안을 받았어요. 그중 공연 티켓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티켓링크’에서 콘텐츠 팀을 새로 만들며 웹 기획과 현장 취재 기자를 모집했는데, 그게 제 사회생활의 시작이 되었어요.
이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홍보팀장으로 일하다가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최고 규모의 영화제로 성장하던 시기 홍보팀 언론담당으로 합류하게 됐어요. 보도 자료를 받아서 기사를 작성하던 일에서 직접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배포하는 역할을 맡게 된 거예요.
문화마케팅 일에 생각만큼 수월하게 적응되던 가요?
티켓링크는 그야말로 티켓 판매가 중심이다 보니까 잘 팔리는 상품들을 어떻게 프로모션 할 것인가가 중요했어요. 그런데 영화제 홍보 일은 언론과 기자들의 성향을 파악해서 편하게 소통하고, 영화인들과 공무원들의 중간 역할을 해야 했어요. 영화인, 공무원, 이 두 부류는 같은 한국말을 하면서도 굉장히 다른 뜻으로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에요. 이 둘 사이를 통역해야 하는 것도 제 주요 업무였는데, 당시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위원장님을 수행하면서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많이 보고 배웠어요. 정말 좋은 어른을 만난 게 일뿐만 아니라 제 인생에서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뉴욕은 언제 가시게 된 건가요?
영화제 일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에 일을 그만 둘 생각은 없었어요. 영화제 일을 하며 쉬는 기간에는 1년에 1~2달 정도 여행을 했어요. 뉴욕은 가장 좋아하는 도시였기에 매년 갔는데 2006년 크리스마스에 여행을 하다가, 영화제는 행사 기간에 6개월 정도만 일해도 되니까 공부를 병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정말 ‘일놀놀일(일하면서 놀고 놀면서 일하고)’을 하러 뉴욕으로 갔어요. 그런데 운이 좋게 영주권 신청을 할 수 있는 회사가 연결이 돼서 워크 퍼밋을 받을 수 있었고, 불운하게도 서브프라임 리만브라더스 사태가 터지면서 미국 밖을 나가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매주 동료가 해고되는 살벌한 삶의 현장을 지켜보며 직장 생활을 이어가게 됐지요.
뉴욕에서 처음 일한 곳은 한국 교민들을 위한 온라인 포털 서비스인데, 뉴욕의 네이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미국 유학생이나 뉴욕에서 생활해 보신 분들은 다 아는 사이트일 거예요. 그곳에서 콘텐츠 관리와 운영을 담당하다가 뉴욕 브로드웨이, 라스베가스 태양의 서커스, 런던 웨스트엔드 티켓을 관리하는 회사에서 한국 담당 마케팅을 하게 됐어요. 나라는 바뀌었는데 신기하게도 한국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뉴욕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했던 회사는 하이엔드 치아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곳이었어요. 뉴욕과 두바이 지사를 운영하며 한국 치과 그룹의 교육을 의뢰받아 운영하고 있었어요. 저는 한국 마케팅 업무를 하면서 뉴욕 회사 직원들의 문화예술교육을 담당했어요.
처음 뉴욕에 갔을 때는 한국과 다른 경험을 해보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여러 상황으로 10년 넘게 머무르게 되었고, 연봉을 올리고 영주권 신분을 유지하는 일에 힘쓰며 더, 더, 더 많은 것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시기를 보냈지요.
현대미술 관련 일을 그때 시작하게 되신 거군요.
뉴욕은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미술관이 포진한 곳이고, 특히 제가 살았던 맨해튼 어퍼이스트는 뮤지엄 마일이라고 해서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소더비경매장, 뉴욕현대미술관(MoMA) 모두 연결되는 지역이었어요. 자연스럽게 미술을 접할 일이 많았고,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을 후원하는 미술재단과도 연이 닿으면서 뉴욕의 전시를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 작가들의 뉴욕 전시를 후원하는 일을 했지요. 그런 일이 자연스럽게 제주까지 이어지게 됐던 거고요.
한국에 다시 오신 건 언제인가요?
2017년 휴가를 한국으로 왔어요. 그때 전국을 한 바퀴 돌았어요. 다양한 곳을 다녔는데 통영, 경주, 제주가 특히 좋았어요. 특별한 계획은 없었지만 제주에서 뭔가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상의 후 짧은 고민 끝에 6개월 만에 뉴욕 생활을 정리했어요.
환이정에서 문화기획자로서의 경력이 시작된다고 봐야 하나요?
직장에 다닐 때는 직책을 부르면 됐는데 이제는 뭐라고 명명은 해야겠는데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된 거예요. 저는 그냥 차은실, 이름을 부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지만 한국 문화에서는 아직 어색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환이정’에서 기획을 담당하고 있었으니 저를 기획실장이라 소개했는데, 계속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기획자’로 불리게 됐어요.
문화기획자로서 제주에서 가장 먼저 만드신 행사는 뭔가요?
코로나 시기, 교류를 한다는 게 아주 조심스럽고, 또 외부인을 초대한다는 것 자체가 우려되던 시기에 환이정 넓은 정원에서 파머스마켓 행사를 진행했어요. 마켓 행사에 클래식 공연과 현대미술 전시, 숲 해설 등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더했고, 고맙게도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어요. 마켓이 흥행하며 환이정에 있던 밭을 활용하여 연계 프로그램으로 농부학교도 만들었어요. 생산과 판매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지요. 다양한 매스컴에서 관심을 가져 주시고, 모범적인 사례로 많은 곳에 소개되었어요.
정부에서 지정하는 문화도시 사업이 있는데, 서귀포가 지정이 되면서 마을문화공간 네트워킹이라는 사업이 시작되었고, 거기서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게 되었어요. 카페, 갤러리, 책방 같은 마을 문화 공간들을 엮는 연결자 역할을 하게 되었어요. 마을이라는 인식 없이 본래 각자 자기 공간을 운영하던 분들을 모은다는 게 쉽지 않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저도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보니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했고, 부딪쳐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일단 만나러 다녔어요. 처음에는 귀찮다고 버럭버럭 화내시는 분도 있었고 잡상인 취급하시는 분도 많았지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며 잘 마무리 되었어요.
그 네트워크 안에서 특별한 행사 같은 건 없었나요?
서귀포 주민들의 문화 향유 욕구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가장 원하는 문화 활동이 놀랍게도 영화였어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 당시 서귀포에는 영화관이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서울과 뉴욕에서는 영화 보는 게 일인가 싶었는데 서귀포는 영화 보는 게 행사가 되는 지역이더라고요. 그러면 영화제를 만들어 보는 게 가장 좋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대규모 영화제가 동네 정서에 맞지는 않았어요. 한 번에 큰 이벤트를 하는 것보다 각각의 공간들을 이용한다는 취지가 더 중요했지요.
10명 미만으로 각 마을 문화 공간에서 오붓하게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설정했고, 그래서 행사명을 ‘서귀포 시네마 라운지’라고 지었어요. 각 공간마다 시간대가 겹치지 않게 배치를 하고 타임 테이블에 맞춰서 각자 가고 싶은 장소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보게 했어요. 영화만 보는 게 아니라 공간에 맞춰서 불멍도 하고, 산책도 하고, 티타임도 하고, 그런 플러스알파 이벤트를 넣었고요. 공간 운영자 분들이 모객이나 평상시 운영에 부담을 느끼면 안 되니까 홍보는 문화도시 서귀포에서 대행해 드렸어요.
지원금을 직접 수령하는 걸 원하는 분들은 없었나요?
제가 가장 거리를 두는 방식이 돈 안 주면 안 해, 그런 건데, 정말 최악이지요. 나중에 지원금이 없어지더라도 자체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마음을 내도록 하는 게 굉장히 중요했어요. 공간을 운영하다 보면 내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굳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순간이 오는데, 그러면 의지가 꺾이고 동시에 내가 꿈꾸던 공간이 감옥이 되는 걸 느껴요. 그런 최악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은 다른 사람들과 공통분모를 찾아 네트워킹을 만들었을 때예요. 모였을 때 이런 좋은 기회가 생기는구나, 그걸 느껴야 해요.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제가 알려드리고 싶었던 게 이런 부분이었어요.
지금도 마을문화공간 네트워킹 사업이 자생하고 있나요?
먼저 공간은 부동산과 직접 연결돼 있는 문제가 있어요. 제주는 보통 연세이거나 전세 계약 기간이라 해도 1년, 2년 단위예요. 제주 생활을 길게 보지 않고 오시는 분들이 많고, 무엇보다 카페, 책방, 갤러리는 돈을 벌 수 있는 업종이 아니에요. 그냥 한번 본인의 로망을 실현하는 공간이지 그걸로 부자가 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 기간 동안 경제 자본을 버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이제껏 해 보지 않은 다른 경험으로 자본을 쌓아 가시라 말씀 드렸어요. 경제 자본을 뛰어넘는 관계 자본, 문화 자본으로 부자가 되시도록 유도했던 거지요.
환이정을 떠나 서촌에 자리잡고 환경과생명문화재단 이다 소속 활동을 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2021년도 이다 재단이 만들어질 때 환이정도 함께했어요. 이것도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분절돼 있는 건 하나도 없어요. 제 인생이 하나씩 하나씩 뭔가 다 겹치고 연결되면서 여기까지 온 것 같네요.
이다 소속 말고 개인 문화기획자로서 서촌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요즘은 제안 주시는 것들은 거의 다 받아들이면서 하고 있어요. 혼자 연구하는 것 못지않게 강의를 하거나 공부하시는 분들과 만나 일을 해보는 것도 엄청난 트레이닝이 돼요. 그래서 주제와 대상을 달리 하며 ‘서울시민대학’에서 다양한 강의를 하고 있고, 커뮤니티 모임 ‘넷플연가’에서 주니어 문화기획자를 위한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어요.
생각해 보면, 이런 활동을 통해 ‘문화기획자’라는 포지션이 주어진 것 같아요. 워크숍에서는 문화 기획에 흥미를 느끼는 20~30대 친구들이나 실제 문화 기획 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모여 뭐가 뭔지 모른 채로 세상 탓도 하고 서로 응원도 하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끼고 있어요.
직업으로서의 문화기획자는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나요?
연극이나 영화는 제작, 연출과가 있지만 문화 기획에는 전공과목이 따로 있지도 않고,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흔히 문화 기획을 한다고 하면 각 지역별 문화 예술 단체, 재단과 연계한 일이 많고요. 그래서 어떤 조건을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많이 경험하고 일상에서 트레이닝을 하셔야 해요. 저는 문화 기획은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지금의 우리는 모두가 기획자라고 생각해요. 문화라는 것 자체가 우리의 일상 의식주를 지칭하잖아요. 경계를 두지 말고 모두가 문화기획자가 되어야 하는 시기인 것 같기도 하고요.
문화기획자 차은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모든 일을 다르게 보려고 하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하면 흥미로운 일을 재미있게,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을까. 흥미, 재미는 혼자서도 되는데 의미까지 있으려면 둘 이상은 돼야 해요. 나만 좋아서는 안 되고 이왕이면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누리자, 그게 기획자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 의미는 거기서 생겨나고, 그런 기획을 했을 때 좋은 문화기획자가 되는 것 같아요.
문화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요?
자본이지요. 그런데 문화기획자라면 자본을 좀 더 세분화시켜야 해요. 기획이라는 단어에는 칼 도(刀)자가 들어 있어요. 여러 업무의 흐름은 자연스러워야 하지만, 흐름이 정확하게 이어지려면 잘라서 세분화시켜야 해요. 경제 자본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관계 자본과 문화 자본이 있어야 돈 이상의 관계로 풀어 낼 수 있어요. 행사장 홍보물 배치하고 기념품 리본 묶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사실 문화 자본은 엄청난 감각이에요.
의외로 한국은 문화 기획하기에 좋은 곳이에요. 지원 사업들이 꽤 있거든요. 내 돈 들이지 않고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요. 미국은 문화부가 없습니다. 다 자기 돈으로 해야 돼요. 지원금이란 건 나중에는 독이 되기도 하지만, 의지만 있다면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사업으로 시작은 할 수 있어요.
올해 어떤 일들을 앞두고 계신가요?
몇 군데에서 제안 받은 프로젝트들이 하반기에 몰려 있어요. 9월, 10월에 서울, 경기에서 전시와 축제가 있어요. 제 성향상 또 여기저기 연결을 시키고 싶어서 어디가 좋을지 고민 중입니다. 여기서만 하면 재미없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 때문에 새로운 공간들을 찾고 있어요. 전시가 메인이고요, 축제는 마켓이나 이벤트 형식을 벗어나 보고 싶어서 ‘축제’라는 이름을 쓰지 않은 축제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 이주호
사 진 | 신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