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야기를 시각적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 - 넷플릭스 시리즈 <들쥐>의 미술감독, 정서안 #2

2026-10-01


정서안 미술감독과의 두 번째 인터뷰에서는 넷플릭스 시리즈 <들쥐>를 중심으로 그의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한 철학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처음으로 공개되는 <들쥐>의 세트장 사진 등 생생한 제작 현장으로 초대합니다. 이번 인터뷰에는 <들쥐>의 스토리와 캐릭터에 관한 암시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 정서안 미술감독 인터뷰 첫 번째 편 먼저 읽기


0cb124eb05ff6.jpg정서안 미술감독 | <들쥐>에 그림을 협찬한 신광호 작가 전시에서(장소협찬 | 갤러리제이원)



Q. 최근에 작업하신 <들쥐>에서는 공간과 인물이 밀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공간을 설계할 때 어떤 맥락을 염두에 두셨나요? 

<들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공간과 인물이 하나의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어요. 이 작품은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추적 스릴러이고, 인물의 불안과 정체성의 혼란이 극을 끌고 가는 중요한 요소였어요.


준비를 하면서 ‘르네 마그리트’의 인터뷰 중,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또 다른 무언가를 가리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보이는 것에 가려진 것을 보고 싶어 한다”를 중요한 콘셉트로 삼았어요.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 사이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이 <들쥐>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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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2ba3630f0a2.jpg<들쥐> 속 문재의 고급 오피스텔 거실과 침실 | 정서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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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쥐> 속 들쥐의 고급 오피스텔 거실 | 정서안 제공

 

그래서 공간을 단순히 인물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물리적 환경으로 두지 않으려고 했어요. 공간 안에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함께 쌓고, 공간 자체가 인물의 상태를 드러내거나 때로는 감추는 역할을 하도록 디자인했어요. 관객이 공간을 보는 순간에도 그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할 수 있도록요.


저에게 <들쥐>는 그동안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해 품어온 사유와 질문에 대한 답을 공간과 이미지로 구현한 작품이에요. 공간이 이야기를 설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드러내고 때로는 은유하면서 관객의 시선과 해석까지 이끌 수 있는 하나의 시각적 언어가 될 수 있을지 끝까지 고민했어요.


dbd9a6848adf5.jpg숲속 외딴 주택 | 정서안 제공


d3725445981ca.jpeg승규의 아파트 침실 | 정서안 제공



Q. 인물의 불안이나 정체성 혼란을 보여주기 위해 어떤 장치를 심으셨나요?

인물의 불안과 정체성의 혼란을 어떻게 공간의 언어로 번역할 것인지부터 고민했어요. 이 인물은 공황장애 등 여러 불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물의 심리적 상태가 공간의 일부처럼 호흡하듯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인물과 인물 사이에는 상징적인 경계를 설정했어요. 유리나 철망처럼 서로를 볼 수는 있지만 완전히 통과할 수 없는 재료적 특성을 가진 요소를 배치했어요. 직접 마주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 두 사람 사이의 거리와 긴장이 느껴지도록 한 거죠.


이런 물리적인 경계가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라 인물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 거리와 불신, 단절을 시각적으로 치환하는 장치가 되기를 바랐어요. 결국 보이지 않는 인물 간의 심리적 긴장을 공간 안에 가시화한 거예요.


인물의 정체성 혼란과 심리적 불안을 시각화하기 위해 ‘매개체를 통한 인물의 반영(Reflection)’을 하나의 컨셉으로 설정했어요. 거울뿐 아니라 창문과 유리, 물, 그림자 등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인물이 여러 방식으로 반영되도록 했어요.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되지 않는 인물의 내면을 다층적인 이미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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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ec309d37f462.jpg201863c9559df.jpg

<들쥐> 속 모텔, 욕실 | 정서안 제공


특히 모티프 호텔에서는 다중반사(Multiple Reflections)를 활용했어요. 여러 개의 거울 면을 서로 다른 각도로 배치해 한 인물이 여러 이미지로 분절되고 중첩되어 보이도록 했어요. 이를 통해 인물의 불안과 정체성의 혼란을 공간 안에서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했어요.


결국 제가 <들쥐>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보이지 않는 인물의 심리를 어떻게 공간과 이미지로 번역할 것인가였어요. 인물 사이의 상징적 경계, 반영과 다중반사 같은 공간적 장치를 통해 불안과 정체성의 혼란을 하나의 조형적 언어로 구축하고자 했어요. 인물의 내면이 공간의 구조와 이미지에 스며들고, 그것을 관객이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가 설정한 컨셉의 핵심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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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쥐> 속 모텔, 욕실 컨셉아트 | 정서안 제공



Q. 작품 전체에 복도나 문, 빛 같은 요소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작품 전체에 복도와 통로를 반복해서 넣었어요. 건축적으로 복도는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기 위한 통로지만, 영화적으로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좁고 긴 복도와 통로를 곳곳에 배치해 보이지 않는 공간과 진실에 대한 긴장감을 만들었어요.


특히 <들쥐>의 두 오피스텔은 같은 고급 주거공간이라는 건축적 조건에서 출발하지만, 인물의 심리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 언어로 디자인했어요.

문재가 머무는 공간에는 통로 끝에 타공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했어요.


eab9b0e7ab155.jpg문재의 고급 오피스텔 현관 복도 | 정서안 제공


빛이 들어온다는 것은 외부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고, 복도의 끝에 실제 현관문이 존재하기 때문에 ‘갇혀 있지만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둔 거예요.


반면 들쥐의 공간은 문은 있지만 외부로 연결되는 빛이나 출구의 가능성을 느끼기 어렵게 구성했어요. 철과 금속의 거친 물성, 부식된 질감, 반복되는 구조를 통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출구가 없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결국 두 공간은 같은 건축적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빛과 복도, 그리고 재료와 질감이 서로 다른 심리적 의미를 갖도록 디자인한 거예요. 색으로 인물을 구분하기보다 재료의 본연의 특성과 질감을 통해 각자의 심리와 세계를 공간 안에 드러내는 것이 <들쥐>에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에요. 


f9399d79b2a2f.jpg들쥐의 고급 오피스텔 현관 복도 | 정서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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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외딴 주택 복도 | 정서안 제공 



Q. 세상과 만나는 것 자체가 불안한 인물에게 통창을 사용하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통창은 <들쥐>에서 제가 설정한 ‘유리감옥’이라는 공간적 컨셉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였어요. 같은 통창이 한 인물에게는 언제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또 다른 인물에게는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경계로 작동하도록 했어요.


특히 갇혀 있는 인물의 공간에서는 침실을 또 하나의 액자처럼 구성했어요. 관객이 그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 인물의 심리적 감금을 직접적으로 느끼도록 한 거예요.


결국 통창은 밖과 안, 자유와 감금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만드는 장치였어요. 보이지 않는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투명한 유리와 프레임이라는 공간의 언어로 가시화한 것이 <들쥐>에서 제가 설정한 ‘유리감옥’의 핵심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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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쥐의 고급 오피스텔 침실 | 정서안 제공



Q. 색보다 질감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고 했는데, 그걸 화면에서 느껴지게 하는 건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저는 인물의 내면을 표현할 때 색으로 감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재료와 질감을 통해 인물의 심리와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을 좋아해요. 색에는 비교적 명확한 상징이 있지만, 재료와 질감에는 그 재료가 가진 본연의 특성과 시간의 흔적까지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들쥐>에서는 인물의 심리와 정체성에 따라 공간의 재료와 질감을 다르게 설정했어요. 문재의 공간은 스틸과 타공처럼 차갑고 인공적인 재료를 중심으로 잡아 외부와 단절된 긴장과 불안을 표현했고, 들쥐의 공간은 브론즈와 부식된 철의 거친 질감과 폐쇄적인 구조를 통해 보다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세계를 만들었어요.


05d19deddfcce.jpg문재의 고급 오피스텔 서재 복도 | 정서안 제공


d0597b25a4e9a.jpg들쥐의 고급 오피스텔 거울 복도 | 정서안 제공


특히 들쥐가 머무는 숲속 외딴주택에서는 자연을 아름다운 대상으로 보기보다, 인간이 완전히 통제하기 어려운 원초적인 자연이 가진 낯설고 섬뜩한 감각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르누보의 유기적인 곡선과 자연의 패턴을 공간 전체의 모티프로 가져왔고, 벽지의 패턴부터 램프, 소품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컨셉으로 연결했어요.


저는 공간의 큰 구조뿐 아니라 이런 작은 디테일도 중요하게 생각해요. 소품이나 패브릭 역시 단순히 공간을 채우는 요소가 아니라 그 공간의 성격과 인물의 세계를 구체화하는 중요한 디자인 요소라고 생각해요.


9311855bcfee4.jpgfeee6ed1889bd.jpg367aee5e1be27.jpg숲속 외딴 주택 들쥐의 공간 - 침실 방문 - 침실 | 정서안 제공


그리고 마지막 크루즈에서는 이 자연의 모티프를 또 다른 의미로 확장했어요. 문재와 들쥐가 서로의 진실과 마주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아르누보의 유기적인 곡선과 자연의 패턴, 우드의 질감, 청록과 골드, 패브릭과 소품의 디테일까지 연결해 인공적인 크루즈 안을 보다 근원적인 자연의 감각을 담고 싶었어요.


결국 <들쥐>에서 색과 질감은 공간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재료와 형태, 패턴과 디테일을 통해 인물의 심리와 서사를 공간으로 구현하는 시각적 언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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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쥐> 속 크루즈 스위트룸 | 정서안 제공


2a81d69262e96.jpg<들쥐> 속 크루즈 컨셉아트 | 정서안 제공



Q. 노자라는 인물은 사무실을 집처럼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공간도 노자라는 인물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자의 공간은 그 인물의 서사와 아이러니를 공간 자체에 담아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겉으로는 흥신소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원래 종교 시설이었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스테인드글라스와 십자가, 강단이 있고 한편에는 철학자 노자의 족자도 걸려 있어요. 그런데 과거에 악행을 저질렀던 인물이 지금도 그 연장선에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잖아요. 저는 그의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 안에 공존하면서, ‘업보’라는 의미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읽히도록 공간의 설정을 비틀어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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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쥐> 속 노자의 공간 | 정서안 제공


그래서 저는 ‘이 사람에게 과연 정상적인 집이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공간을 출발시켰어요. 종교적 공간의 흔적과 흥신소라는 현재의 기능, 그리고 철학자 노자의 족자를 한 공간 안에 병치하면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인물의 삶의 모순과 아이러니를 공간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결국 이 공간은 노자가 생활하는 배경이 아니라, 노자라는 인물 자체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시각적 언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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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사무실, 침실 컨셉아트 | 정서안 제공



Q. <들쥐>까지 마치고 난 이 시점, 프로덕션 디자인이란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이제야 제가 생각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의 정의가 조금 더 명확해진 것 같아요. 저에게 프로덕션 디자인은 텍스트로 쓰여 있는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그 안에 담긴 서사와 인물의 감정을 시각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에요. 시나리오가 언어로 이야기를 전달한다면, 프로덕션 디자인은 그것을 공간과 재료, 질감과 형태, 색과 빛을 통해 관객이 경험할 수 있는 이미지로 구체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미술감독을 번역가이자 해설자라고 생각해요. 시나리오와 연출의 의도를 해석해서 하나의 시각적 개념을 만들고, 그것을 미술팀의 세트·소품·의상·분장 각 분야와 공유하면서 실제 공간과 이미지로 구현해가는 역할이니까요. 그리고 그 결과가 촬영과 조명을 통해 화면 안에서 하나의 미장센으로 완성되는 거죠.


물론 프로덕션 디자인은 한 사람의 작업만으로 완성될 수 없어요. 각 분야의 전문성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도 서로의 영역을 존중할 때 하나의 시각적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제작팀의 예산과 연출부의 일정처럼 현실적인 조건 안에서 구현 가능성을 함께 고민하는 것도 그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고요.


b11be36c2824a.jpgd1b147fcc2336.jpg<들쥐> 속 숲속 외딴 주택 주방 및 2층 계단 | 정서안 제공


특히 <들쥐>에서는 그런 점이 의미 있었어요. 각 파트가 전체적인 디자인 콘셉트와 질감, 톤을 공유하면서 자신의 영역에서 그것을 구체화했고, 촬영과 조명팀도 미술이 구축한 공간을 존중하면서 각자의 언어로 화면을 완성해주었어요. 제작팀에서도 현실적인 조건 안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해주었고요. 그렇게 각 분야의 작업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만나면서 제가 의도했던 공간의 질감과 인물의 감정이 최종적인 이미지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들쥐>는 제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이야기를 시각적인 언어로 번역한다’는 프로덕션 디자인의 개념을 실제 공간과 이미지로 가장 구체적으로 경험한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Q. 이제 영화미술에서도 AI를 빼놓을 수 없게 됐습니다. 실제 작업에서 AI를 활용하고 계신가요?

AI는 이제 프로덕션 디자인에서도 하나의 실질적인 작업 도구가 됐다고 생각해요. 이번 작품에서도 콘셉트 아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AI를 활용했어요. 과거에는 3D나 포토샵으로 공간을 이미지화했다면, 이번에는 AI를 활용해 또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시각화해봤고, 실제 작업에서도 상당히 유용했어요.


다만 AI가 프로덕션 디자인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지, 어떤 미학적 세계를 구축할 것인지는 먼저 미술감독이 판단해야 하는 영역이에요. AI는 그 방향을 보다 빠르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각화하고 발전시키는 도구인 거죠.


특히 지금은 제작 환경과 비용의 변화로 AI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을 실무에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그 역할이 어디까지 확장될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어떤 세계를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미술감독의 판단과 전문성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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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쥐> AI 컨셉아트 | 정서안 제공

 


Q. 다음 작업은 영화와 드라마 가운데 어떤 작업이 될 것 같은가요?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글’이에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 이야기가 어떤 인물과 세계를 가지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매체나 장르가 무엇인지는 그 다음의 문제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드라마를 보면서 ‘영화 같다’, ‘영화처럼 보인다’는 표현을 하기도 하잖아요. 저는 그 표현을 들을 때마다 영화와 드라마를 바라보는 인식에 아직 어떤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저는 두 매체를 서로 다른 위계로 바라보지는 않아요. 드라마라고 해서 영화보다 낮은 완성도를 지향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처럼 보여야 좋은 드라마가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작업한 작품이 ‘영화 같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드라마를 영화처럼 만들려고 해서가 아니라 제가 이야기를 해석하고 공간과 이미지를 구축하는 방식, 제가 가진 프로덕션 디자인의 언어가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결국 중요한 것은 매체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가진 본질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시각적 언어로 얼마나 설득력 있게 구현하느냐라고 생각해요.


김홍선 감독님과 <미끼>, <탄금>, <들쥐>를 연달아 작업하면서 제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작품 안에서 조금씩 구체화하고 확장해갈 수 있었어요. 세 작품을 함께하며 쌓인 신뢰가 있었고, 감독님께서 연출자로서 미술적 시도가 충분히 확장될 수 있는 연출의 여지를 열어주셨기 때문에 제가 가진 생각을 더 과감하게 시도하고 구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저 역시 제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공간과 이미지로 해석하고, 그것을 어떤 시각적 언어로 구축하는지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어요.


앞으로도 매체나 장르보다 좋은 글과 좋은 이야기를 만나고, 그것을 제 방식의 시각적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매체가 어떻게 변화하더라도 제가 가진 프로덕션 디자인의 방향은 계속 이어갈 것 같아요.



Q. 작품의 끝과 시작에 루틴같은 게 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건가요?

네. 루틴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거창하지만, 저는 작품이 끝나면 혼자 자유여행을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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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미술관(Vatican Museums)의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 앞에서


작업을 시작하면 굉장히 깊이 몰입하는 편이에요. 정말 24시간을 25시간처럼 사용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작업이 끝날 때쯤에는 제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거의 다 소진하게 돼요. 그래서 저는 그 다음에 비워진 상태를 다시 채우는 시간이 필요해요.


<들쥐>보다 앞선 작품이 넷플릭스 <탄금>이었는데, 그 작업을 끝내고 40일 동안 여행을 했어요. 세 나라, 아홉 개 도시를 다니면서 미술관과 건축, 박물관을 중심으로 봤어요. 관광을 위한 여행이라기보다 다시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제 안에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채워가는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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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um)과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


d9ca310b06e8c.jpg오페라 <아이다(Aida)> 관람


그래서 저에게 여행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다음 작품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에요. 작품을 하면서 제 안에 있는 것을 꺼내놓고,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경험과 이미지, 감각을 다시 채워서 다음 작업으로 가져가는 거죠.


저는 그 비움과 채움’의 순환이 작품과 작품을 이어가는 저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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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Basílica de la Sagrada Famí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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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사 바트요(Casa Batlló) 내부

 


Q. 마지막으로, 작품 말고 또 다른 계획이나 하고 계신 일이 있으신가요?

예전부터 제가 현장에서 쌓아온 경험과 영화미술에 대한 전문성을 후배 창작자들과 나누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그래서 올해부터 단편영화 한 편씩을 직접 지원하는 창작지원 프로젝트를 시작하려고 해요.


좋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도 미술적인 부분을 충분히 구현할 경험이나 예산이 부족한 젊은 감독들이 많아요. 처음에는 제가 직접 영화미술을 지원하고, 필요하다면 소품이나 의상 등 제가 가진 네트워크와 자원도 연결해보려고 해요.


거창하게 후배를 양성한다는 의미보다는, 제가 오랫동안 현장에서 배우고 쌓아온 것을 다시 영화로 돌려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매년 한 편씩 10년을 이어가면 10편의 작품이 만들어질 테고, 작은 지원이 또 다른 창작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고 싶어요.



Q. 작품에 들어가면 시간이 부족할 수 있는데, 올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은퇴한 뒤에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현재 진행형인 미술감독이기 때문에, 제가 가진 현장의 경험과 현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후배들에게 지금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올해부터 시작하되, 작품은 서두르지 않고 프로젝트의 취지와 잘 맞는 작품을 신중하게 선정하려고 해요. 한 편을 시작으로 매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제가 현장에서 얻고 있는 경험과 자원을, 지금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영화미술을 통한 환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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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긴 시간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들쥐>가 넷플릭스 공개 후 사흘 만에 국내 시리즈 1위, 공개 2주 차에 글로벌 비 영어쇼 1위를 기록했습니다. 사랑해 주신 시청자분들은 물론, <들쥐>를 함께 만들어 주신 김홍선 감독님과 고생하신 모든 스태프, 배우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사진 제공 | 정서안

인터뷰 | 이주호,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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