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신간] 삶이 이렇게 흘러갈 수도 있다고, 『아파서 시골에 왔습니다』

202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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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원, 밤나무, 가격 16800원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항상 원인을 모르는 채 일어납니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고, 심지어 선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일어나고, 감당하게 하고, 삶의 조건으로 고정됩니다. 무심코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걸 깨닫고 이런 불합리가 있나 항변해 보지만 끝내 불확정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불안을 떨치지 못한 채 나이 들어갑니다. 


영화 잡지 기자로 일하던 저자는 서울 생활을 접고 태어나 자란 시골로 가서 농사일을 하며 살아가기로 합니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건 아닙니다. 시골과 농사일은 할아버지, 아버지 2대에 걸쳐 완강하게 거부되던, 그가 선택해서는 안 되는 삶이었습니다. 자손이 서울에서 자리 잡고 살기를 바랐던 바람을 따라 그는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서울에서 직업을 찾고, 서울 땅에 영화 기자라는 뿌리를 살며시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뿌리가 땅을 단단히 움켜쥐기도 전에 그는 중증근무력증이라는 병에 휩쓸려 예상할 수 없는 삶의 조건으로 내몰리고 맙니다. 1년 동안 질질 끌던 원인 모를 아픔에 중증근무력증이라는 진단이 내려지자, 그의 삶은 방향은커녕 생사조차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가슴을 가르는 큰 수술 끝에 그는 걷는 것도, 오래 앉는 것도 힘든 몸이 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두려워집니다. 서울에 적응해 살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또 나를 아프게 할지도 몰라. 시골에 머무르기로 합니다. 여기서 적응해 살아야 하니 일을 찾아야 합니다. 호시탐탐 아들을 서울로 올려 보내려는 아버지 눈을 피해 아무도 시키지 않을 일을 몰래 해 보며 시골 생활에 살짝 뿌리를 내밀어 봅니다. 하지만 사람 귀한 시골에 50대도 아닌 30대 청년이 왔다니, 세상이 가만 둘 리가 있나요. 의도치 않게 사람 앞에 서는 일이 많아집니다. 자신이 나온 초등학교에서 인턴 국어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공동체 안에서 시골 살림을 꾸려가고, 지역 소식지를 만들고, 학부모 위원이 됩니다. 하지만 이 일들이라고 선택한 대로, 생각한 대로 되어 줄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 세차게 이는 입김에 나부끼고 펄럭이다 예상치 못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기도 합니다. 


농사일은 더 어렵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넓히고 가꾸고 보살펴 온 땅에 서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해 보지만, 농사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한 해 농사를 말아먹을 일들만 자꾸 벌어집니다. 작물이든 날씨든 농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하는데, 그는 남들 다 보는 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망한 농부로 15년이 흐릅니다. 그 사이 아이 둘이 자라고, 책도 몇 권 쓰고, 지금은 아내와 책이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농사 기술은 부족해도 농사일을 견딜 체력은 아버지 못지 않습니다. 이제 와 돌이키면 지금까지의 삶이 그가 선택한 건지, 어쩌지 못하고 끌려 온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망한 인생이라고 하기에는 아픔을 견디고 난 다음의 삶에서 얻은 게 너무 많으니까요. 


이 책은 가늠 안 되는 삶에 용기를 주기도 하고 위로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 책을 농부 적응기나 아픔 회복기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와야 했을 이유가 있었다면, 이 책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망한’ 이야기를 정리해야 할 시점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왜 와 있는지 모릅니다. 아파서, 먹고 살려고, 어쩌다, 간혹 간절히 원해서. 이 시점,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왜 이곳에 있는가 하는 이유를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의 삶을 속속들이 알아가는 것, 지금까지의 나를 차곡차곡 정리해 보는 것입니다.




글 | 이주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