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영화] 말에서 풀려 나온 현실은 더 영화 같고, <여행과 나날>

202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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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허공을 콕콕 찍으며 머릿속에서 말을 연결하던 주인공은 이내 공책에다 대고 사각사각, 말을 써 내려 갑니다. 그 말 속에서 한 여자가 있고, 어느 바닷가, 그것도 꽤나 거친 바닷가 마을을 거닐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남자, 해변과 어울리지 않는 복장으로 하고 해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근방 친척 집에서 묵고 있다는 이 남자는 이곳이 어머니의 고향이라고 합니다. 


태풍이 근접해 오고, 경사면을 타고 오르는 바람이 숲을 불안하게 흔듭니다. 남자와 여자는 바닷가에서 만나 수영을 합니다. 중학교 때 수영 자격증을 땄다는 남자는 여자가 보았다는 물고기를 따라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고, 여자는 남자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좋아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한 편의 영화가 끝나고, 각본가 지망생이라는 관람객의 질문에 주인공은 자신이 각본을 쓰는 데 재능이 없다는 걸 느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함께 자리해 주었던 평론가 선생과 짧은 환담을 나누고 얼마 뒤, 그의 유품을 받아 들고 글 속이 아니라 현실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 보기로 합니다. 그게 말에서 잠시 떠나 있기로 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주인공은 말을 곱씹어서 세상을 연결 짓고 이해하는 사람이니까요.  


기차는 터널을 지나, 설국에 이르고 주인공은 박물관도 미술관도 보지 않고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우동을 한 그릇 먹고 빈 방을 찾아 다닙니다. 하지만 그녀가 겨우 잠자리를 펼 수 있던 곳은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지도 너머 어딘가 산속 여관입니다. 거기에도 한 남자가 있고, 그는 또 왜 혼자 그곳에 남겨졌는지, 허름하고 허술하고 괴팍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쌓인 눈에 짓눌려 지붕이 내려앉을 듯한 여관 화롯가에 앉아 주인공은 하얀 입김을 뿜으며 그냥 또 하루가 지나가게 둡니다. 


말을 놓아버린 현실에는 말보다 더 비현실적인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주인공은 다시 조금씩 말을 이어가 보기로 합니다. 애쓰지는 않습니다. 사각사각, 말을 기다려 봅니다. 그의 말은 한국어로 적히고, 말이 놓이게 될 현실은 일본어로 된 세상입니다. 우리는 번역된 말을 전달하고, 그러면서 말은 본래의 뜻과 조금 달라지거나, 본래 의도와 다른 해석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번역에 번역이 덧대진 말 같은 건 그러나 태풍이 오는 관능적인 화면과 거대한 눈 더미에 덮인 무기력하고 우울한 화면에 비하면 세세히 따지고 들 것도 아닙니다. 비가 오고 눈이 오는 현실에서 말 같은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행을 떠나 얻게 되는 나날과 여행을 떠나 벗어나게 된 나날은 얼마나 다른 나날이었을까요. 영화 속 여름과 주인공이 놓인 현실의 겨울은 얼마나 다른 나날이었을까요. 그런데 현실의 겨울도 사실 영화였네요. 강물이 흘러가는 풍경을 보듯, 곶에 불어 닥친 태풍 뉴스를 보듯, 영화는 매우 낯선 장소에 데려다 놓고는 무심히 지켜보라고만 합니다. 내가 무엇을 보았나 생각해 보면, 지난 여름 짧은 휴가의 기억처럼, 무얼 했다는 기억 없이 여름을 관통하던 감정만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글 | 이주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