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여행책] 그러니 오늘도, 두려움 없이 한 모금

202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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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의 동양인 남성이 외딴 섬 펍에 홀로 앉아 책을 읽으며 위스키를 마신다. 그는 책에 시선을 둔 듯하지만, 실은 주변을 관찰하며 조용히 귀를 열어두고 있다. 이 의문스러운 남자는 때때로 펍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가 일본의 대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주변의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않는다. 그저 그가 원하는 대로 쉬고, 즐기다 떠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런 곳이 바로 아일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술을 즐긴다. 본래 맥주를 좋아하던 그는 어느 순간 위스키의 매력에 깊이 빠졌고, 결국 위스키의 성지라 불리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로 향했다. 그곳의 자연과 공기, 그리고 위스키에 매료된 그는 그 정취를 글로 남겼다.『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은 그렇게 탄생한 에세이다.


나도 아일레이 위스키를 좋아한다. 특히 라가불린 16년은 나에게 최고의 술이다. 그것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나를 다른 공간으로 데려가는 마법이자 때로는 약이고, 그리하여 생명수이다. 라가불린을 한 모금 마시면 묘한 짠맛이 느껴지고, 다시 한 모금을 머금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스코틀랜드 차가운 바닷가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왜 그런 감각이 생기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 이유를 조금 짐작해 본다. 


“‘갯내음이 물씬 풍긴다’는 말은 결코 근거 없는 표현이 아니다. … 아일레이에 가서 얼마 동안 그곳에 머물다 보면, 당신은 그 냄새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정체를 알게 되면, 왜 아일레이 위스키에서 그런 맛이 나는지 체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49)


비행을 하다 보면 늘 발밑으로 깊고 짙은 바다가 느껴졌다. 대서양, 태평양, 거대한 바다를 가로질러 떠가는 비행기에서 헤엄치듯 종종거리다 보면 어느새 도착지에 닿아 있었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조명을 낮추고, 기내 엔진 소음이 귀를 먹먹하게 채우기에 비행기 안은 ‘산소가 있는 바닷속’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휴식의 잔잔한 파도와 식사 시간의 거친 파도를 다 견디고 호텔 방에 들어가 앉으면, 발끝에서부터 짠 내가 밀려오고 머리는 쭈뼛해졌다. 그럴 때 가장 큰 위로가 되어 준 것이 위스키다.


“아일랜드라는 풍토에는 전체적으로 그런, 약간은 수줍은 구석이 있다. … 아일랜드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내미는 것은 감동이나 경탄보다는 오히려 위안과 진정에 가까운 것이다.” (p.78)


“아일레이 공항에 내리니 짙은 안개가 깔려 있고, 곡물 찌는 냄새가 났어.”


위스키에 빠져 결국 아일레이까지 다녀온 지인이 전해준 그곳의 첫인상이다. 안개 속에서 느껴지는 위스키의 향이라니. 그런 낭만적이고도 치명적인 환대를 받을 수 있는 그곳을 상상한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지쳐버린 위스키가 아니라, 아직 살아 숨 쉬는 원액, 오늘도 얼마나 많은 발길이 그 섬으로 향했을까.


“술이라는 건 어떤 술이든 산지에서 마셔야 가장 제맛이 나는 것 같다. … 흔히 말하듯이,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 법이다.” (p.118)


내가 가지지 못한 쾌활함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유로웠고, 늘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항상 어딘가로 여행 중이던 그녀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돌연 스코틀랜드로 떠난다고 했다. 연고도 없는 그곳에 왜 가려는 것이냐며, 한국에서 여행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그녀는 홀연히 떠났다. 한 직장에 정착하지 못하고 펍이나 와인숍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전부를 들고서. 늘 발이 땅에서 2mm 정도는 떠 있는 듯 살던 그녀는, 오히려 그런 자신의 가벼움이 싫다며 긴 여행을 택했다.


그 여행이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떠난 지 1년쯤 되었을 때, 그녀는 떠날 때만큼이나 갑작스런 결혼 소식을 전해왔다. 그곳의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고.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그곳의 우울한 날씨와 그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사차 한국에 온다는 그녀를 반드시 뜯어말리겠다는 일념으로 할 말을 준비해 두기도 했다.


그러나 마주한 그녀는 내 예상처럼 꿈에 부풀어 들뜬 신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예전의 그녀와는 너무나 다른, 차분하고 담담한 모습에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괜찮겠어?”라는 짧은 물음을 던졌을 뿐이다. 나의 질문에 그녀는 처음 보는 부드러운 미소와 끄덕임으로 답했다. 그 강렬하지만 깊은 긍정은 위스키를 닮아 있었다. 어떤 말도 필요 없는 대답. 삶은 그토록 다르게 익어가고 완성되는 것이었다.


얼마 전 그녀는 아이를 낳았다. 한층 성숙해진 사람으로 그녀를 빚어내고 붙잡아둔 것은 그곳의 바람과 물, 그리고 사람이었다. 훌륭한 위스키가 만들어지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일궈온 탓일까, 그녀에게서 구수한 누룩 냄새가 났다. 그녀의 미소를 타고 달큰한 알코올 향이 나에게 스미고, 나는 심장이 따뜻해지며 경계를 풀고 만다. 한 남자를 만나 낯선 나라에 남은 그녀처럼, 오늘도 수많은 여행자가 예상 답안을 비워 둔 채 그 먼 곳으로 향한다. 거기서 만날 위스키와 바다, 짠 내, 자연, 여유에 매료되어 자신도 모르게 구수한 누룩 냄새를 삶 한 구석 배어 들게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지, 무라카미 씨, 가장 나중에 오는 건 사람이야.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바로 아일레이 위스키의 맛을 만드는 거야. 섬사람들의 퍼스낼리티와 생활양식이 이 맛을 만들어내는 거지.” (p.72)


거친 파도에 휩쓸린 듯 지친 날이면 위스키 한 잔을 따른다. 입안에 머금은 위스키가 나의 속마음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눈앞에는 파도가 밀려온다. 그러나 그 파도는 나를 덮칠 생각이 없다. 아주 잔잔하고 고요하며, 나를 부드럽게 달래준다. 그러니 오늘도, 두려움 없이 한 모금.




글 | 류호분

스케줄 따라 20년간 비행하다 이제야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누비다 이제는 제가 떡볶이 먹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는 딸과 함께 동네를 누비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