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전시]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 흔적, 기억, 말들의 전시장

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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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입습니다. 매일, 해마다, 때마다. 배내옷과 기저귀에 싸였다가 벌거숭이 시절을 지나 교복을 입고 생의 의식을 치르며 때에 맞는 옷을 갈아입습니다. 삶의 새로운 단계마다 요구되는 옷이 있습니다. 그 의복의 세계에 들어서면 기어코 그 세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옷을 짓습니다. 저고리에 바지에 버선도, 속옷도, 모자도, 쌈지 주머니도 손수 짓던 어머니들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내 아이 배내옷을 짓고, 절기 옷을 짓다 마지막 갈 때 입겠다며 손수 수의도 지으셨습니다. 옷을 입고 지으며 건네주는 삶의 단계들, 감정들, 당부해야 했던 말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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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 작가는 구리 망을 잘라 금실로 꿰매 붙여 어머니들이 지어 왔던 옷을 다시 짓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어머니들이 옷을 지으며 되뇌던 말을 새겨 넣었습니다. 제주 바닷물로 새겨 넣은 말이라 당장 들리는 말은 아닙니다. 명찰처럼 당장 옷깃에, 옷섶에 새겨지는 말이 아닙니다. 바닷물로 새긴 언어는 시간이 흐르며 푸르스름 녹으로 남습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인지, 희미하기만 합니다. 그 말이 어렴풋 들릴 때쯤이면 모든 게 벌써 푸르스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구리 옷이라 한 번 진 주름이 다시 펴지기 어려워, 주름 진 채, 굽은 채, 시간의 결 그대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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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말을 매개하는 바닷물은 구리 옷을 산화시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으로 새긴 언어마저 부식되어 갑니다. 어머니가 지상에 남긴 말이, 자꾸 흐릿해져 갑니다. 가물거리는 기억 그대로 그럭저럭 제 멋대로 살아오다 보니, 어머니도 그랬으려나, 절로 헤아려질 나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어렴풋한 세월이 보태집니다. 끝내 드러나지 않은 말이 바닷물처럼 자꾸 왔다 갔다, 귓가에 닿기 전 부서지고 맙니다. 부서지는 말들을 모아 너울너울 파도처럼 널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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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야 묻습니다. 어머니가 옷에 새겼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박진희 작가의 개인전 <이토록 희미하고 짙은>은 종로구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지하 1층 제주 갤러리에서 1월 5일까지 이어집니다.




편집 | 이주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