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문영 저,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위즈덤하우스, 2024. 1. 10
조세희 작가로부터 “《난쏘공》의 난장이들이 자기 시대에 다 죽지 못하고 그때 그 모습으로 이문영의 글에 살고 있다”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이문영이 신작 장편소설 《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이하《왼오세》를 출간했다.
《왼오세》는 홀로 남아 자신의 훼손된 감각을 끌어 모아 듣기를 계속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시작되어 들리지 않는 것, 잘못 듣고,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전한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확장되는 이야기로, ‘이명’을 거쳐 닿을 수 있는 최선, 최대한의 성찰을 묻고 듣고 쓴 작품이다. 폭력과 가난, 극한 노동, 차별과 혐오로 가득한 세계에서 추방된 소리들, 버려진 소리들, 이름을 가진 적 없는 소리들, 이 세계가 잃어버린 소리들이 그의 문장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인간의 귀는 왜 두 개일까? 흔히 입이 하나, 귀가 둘인 이유를 적게 말하고 많이 듣기 위해서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귀가 두 개인 과학적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소리의 방향을 정확하게 감지하게 위해서다. 한쪽 청력을 잃은 주인공은 소리의 방향을 구분하지 못해 자전거에 치여 나뒹군다. 듣고 싶은 소리에만 귀 기울이면 사고 위험도 그만큼 커진다는 사실을 그는 거듭 세상과 충돌하며 배운다.
이 세계의 소리 전달 경로에서 배제되어 이명이 된 소리들, 실종된 소리들, 버려진 소리들, 쫓겨난 소리들을 추적하고 추리하며 ‘이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을 되살려내고, 그들을 이명으로 만든 세계의 “동그랗고 매끈하고 반질반질한” 세계관을 가차 없이 찌그러뜨린다. 소설은 섬뜩하게 묻는다. 당신의 귓속은 몇 데시벨인가. 그 데시벨을 갈아치워 구조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다른 누군가의 귓속에서 구조조정되고 있지는 않은가.
《왼오세》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해부하고 은유하는 날카로우면서도 시적인 문장들로 가득하다. 간편하게 규정하거나 단정하지 않는 문장들은 다양한 생각의 길을 열어주면서도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상상하게 해준다. 그 문장들은 목청 큰 소리가 넘쳐나는 곳이 아닌, 성대가 잠기고 기척마저 희미한 곳을 찾아다니며 수사하듯 탐색하고 기록하고 이야기로 옮긴다. 이문영의 문장들은 ‘소리가 희박한 쪽’으로 낮게 엎드려 배를 밀고 나아간다.《왼오세》에서는 현실의 소리와 이명을 오가는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문학, 미술, 음악, 신화, 종교, 영화 등을 가로지르는 여러 장르와 작가의 작품들이 얽혀 들어, 소리를 매개로 독자에게 작품을 안내하는 도슨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왼오세》에는 주인공이 사는 건물과 집에 침입하려는 사람의 시도가 조금씩 이야기를 바꾸며 되풀이된다. 에드바르 뭉크가 대표작 <절규>를 변주해 여러 버전의 그림으로 남긴 것처럼, 조금씩 변형되고 뒤틀리는 이야기들이 거듭될수록 피해자의 공포는 점점 독자들의 몸으로 옮겨온다. 그와 동시에 불현듯 ‘나 자신도 예외 없이 누군가에게 가해자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느끼며 서늘해진다. 이러한 감각의 역전을 통해, 자신의 감각에 고립되지 않고 타인의 감각에 열려야 나 아닌 존재들을 향한 몰이해와 혐오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음을 이야기는 암시한다. 서로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타인의 삶을 상상하게 만드는 이야기. 지금 우리가 이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다.
자료제공 l 위즈덤하우스
이문영 저,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위즈덤하우스, 2024. 1. 10
조세희 작가로부터 “《난쏘공》의 난장이들이 자기 시대에 다 죽지 못하고 그때 그 모습으로 이문영의 글에 살고 있다”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이문영이 신작 장편소설 《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이하《왼오세》를 출간했다.
《왼오세》는 홀로 남아 자신의 훼손된 감각을 끌어 모아 듣기를 계속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시작되어 들리지 않는 것, 잘못 듣고,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전한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확장되는 이야기로, ‘이명’을 거쳐 닿을 수 있는 최선, 최대한의 성찰을 묻고 듣고 쓴 작품이다. 폭력과 가난, 극한 노동, 차별과 혐오로 가득한 세계에서 추방된 소리들, 버려진 소리들, 이름을 가진 적 없는 소리들, 이 세계가 잃어버린 소리들이 그의 문장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인간의 귀는 왜 두 개일까? 흔히 입이 하나, 귀가 둘인 이유를 적게 말하고 많이 듣기 위해서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귀가 두 개인 과학적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소리의 방향을 정확하게 감지하게 위해서다. 한쪽 청력을 잃은 주인공은 소리의 방향을 구분하지 못해 자전거에 치여 나뒹군다. 듣고 싶은 소리에만 귀 기울이면 사고 위험도 그만큼 커진다는 사실을 그는 거듭 세상과 충돌하며 배운다.
이 세계의 소리 전달 경로에서 배제되어 이명이 된 소리들, 실종된 소리들, 버려진 소리들, 쫓겨난 소리들을 추적하고 추리하며 ‘이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을 되살려내고, 그들을 이명으로 만든 세계의 “동그랗고 매끈하고 반질반질한” 세계관을 가차 없이 찌그러뜨린다. 소설은 섬뜩하게 묻는다. 당신의 귓속은 몇 데시벨인가. 그 데시벨을 갈아치워 구조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다른 누군가의 귓속에서 구조조정되고 있지는 않은가.
《왼오세》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해부하고 은유하는 날카로우면서도 시적인 문장들로 가득하다. 간편하게 규정하거나 단정하지 않는 문장들은 다양한 생각의 길을 열어주면서도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상상하게 해준다. 그 문장들은 목청 큰 소리가 넘쳐나는 곳이 아닌, 성대가 잠기고 기척마저 희미한 곳을 찾아다니며 수사하듯 탐색하고 기록하고 이야기로 옮긴다. 이문영의 문장들은 ‘소리가 희박한 쪽’으로 낮게 엎드려 배를 밀고 나아간다.《왼오세》에서는 현실의 소리와 이명을 오가는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문학, 미술, 음악, 신화, 종교, 영화 등을 가로지르는 여러 장르와 작가의 작품들이 얽혀 들어, 소리를 매개로 독자에게 작품을 안내하는 도슨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왼오세》에는 주인공이 사는 건물과 집에 침입하려는 사람의 시도가 조금씩 이야기를 바꾸며 되풀이된다. 에드바르 뭉크가 대표작 <절규>를 변주해 여러 버전의 그림으로 남긴 것처럼, 조금씩 변형되고 뒤틀리는 이야기들이 거듭될수록 피해자의 공포는 점점 독자들의 몸으로 옮겨온다. 그와 동시에 불현듯 ‘나 자신도 예외 없이 누군가에게 가해자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느끼며 서늘해진다. 이러한 감각의 역전을 통해, 자신의 감각에 고립되지 않고 타인의 감각에 열려야 나 아닌 존재들을 향한 몰이해와 혐오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음을 이야기는 암시한다. 서로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타인의 삶을 상상하게 만드는 이야기. 지금 우리가 이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다.
자료제공 l 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