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의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를 읽고
- 진은미
1948년 12월, 한 여인이 차디찬 길바닥에 쓰러져간다. 그녀는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동경 유학파이자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이다. 그녀는 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
처음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를 접하기 전, 나에게 나혜석은 조선 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 이 책은 그녀의 스캔들이 아닌 그녀의 삶을 뒤흔든 세계 유람기가 중심이다. 나는 나혜석의 삶을 대전환시킨 그녀의 여행이 궁금했다.
나혜석은 1927년 9월 부산에서 파리로 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떠나기 전, 그녀의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젖먹이를 포함하여 3명의 자녀를 뒤로하고, 부부가 세계 여행을 간다 하였을 때 노모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궁금했다. 자신이 항상 안고 사는 네 가지 질문 - 첫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둘째, 남녀 사이는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셋째,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넷째,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에 대해 자신이 동경해오던 곳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
3개월을 계획하였던 여행은 유럽, 미주를 횡단하는 장장 1년 8개월의 세계 일주가 되었다. 그녀가 거쳐 간 나라만 해도 소련,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 등 12개국 20여 개 도시가 넘는다. 이 책은 나혜석의 세계 유람기를 충실하게 다뤘다. 파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도시는 관광이 중심이었으므로 여행자로서의 각 장소의 풍경과 소회를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간혹 그녀가 적극적으로 표현한 주장과 심경 변화들을 주목하면 그녀가 평소에 품고 있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 여행 속에 녹아 있다.
프랑스의 한 가정에서 3개월 간 생활하면서, 부부간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동등함, 딸과 아들의 차별 없는 역할 분담이 그녀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녀가 항상 꿈꿔오던 남녀가 함께 살아감에 있어 평화로움을 거기서 찾은 게 아니었을까?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만났을 때 일화 또한 재미있다. 나혜석이 기념으로 여성 인권 운동에 쓰는 띠를 챙기며, 자신이 조선 여권 운동의 시조가 될지 모른다고 말하던 장면은, 이미 그녀의 결심이었다. 조선의 여성을 옥죄는 사회 인습을 바꾸고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데 몸소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녀가 조선에 돌아와 행했던 파격 행보는, 아마도 그 시절 파리 삶에 대한 동경이자 그런 변화를 이끌고자 하는 선각자로서의 의지에서 나왔던 것이다.
나혜석은 여행하는 동안 화가로서의 열정 또한 대단하였다. 이미 조선에서는 개인전을 연 화가였지만 프랑스에서 그림을 배우고 각지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그림에 대한 식견을 넓히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마드리드에서 고야의 그림을 보고 느꼈던 그녀의 감흥이 눈길을 끈다. 고야를 부러워하고 그녀도 그처럼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당당함에서, 그녀가 항상 꿈을 꾸고 있었음을 느낀다.
나혜석이 100년을 앞서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여성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격렬히 싸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여행에서 끊임없이 깨어나고 싶었고, 비로소 조선 여성의 갇힌 삶을 깨고 싶었다. 본인이 처참히 부서질지언정….
나혜석의 여행기를 읽으며 우리들의 여행은 어떤지 생각해본다. 어릴 적부터 꿈꾸는 세계 배낭여행에는 어떠한 질문이 있는가? 단지, 현실에서 벗어나 좀 더 이국적인 곳에 대한 동경은 아닐까? 여행이 단지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을 정복하고 싶은 욕구에서 벗어서 여행에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 여행이 내 삶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묻고 싶다. 떠나는 사람들에게… 당신 여행의 질문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