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고
- 우영선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1957년 가을에서 1960년 봄 사이에 헤밍웨이가 자신의 젊은 시절인 1921년에서 1926년까지의 파리 생활을 회고하며 쓴 글을 모아 놓은 것이다.
현지에서 생활을 한 사람에게 듣는 여행 이야기는 어쩐지 더 신선하고 믿음이 간다. 아마도 그 도시 곳곳을 오랜 시간을 두고 음미해 봤으리라는 신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는 파리로 자발적 망명을 떠난 무명의 젊은 작가 헤밍웨이가 남긴 발자국들로 가득하다. 풍요와 낭만, 자유로움을 대표하던 1920년대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해 마지않던 도시 파리, 그곳의 풍경과 그 시절 예술가들과의 일화를 젊은 헤밍웨이의 목소리를 빌어 들을 수 있다는 점은 파리 곳곳에 특별한 아름다움을 불어넣는다. 그저 낭만적인 도시로서의 파리가 아니라 가난하고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작가라는 꿈을 향해 현실에 꿋꿋이 한발을 디디고자 했던 한 청년의 다양한 감정들이 밀도 높게 흩뿌려져 있다.
뤽상부르크 공원에는 배고픔을 참으며 산책을 하던 그가 있고, 깊고 텅 빈 밤의 카르디날 르무안 거리의 춥고 허름한 아파트에는 창문 너머로 서로 어깨를 부비는 지붕들을 바라보며 무엇 하나 단순하지 않은 삶을 고민하는 그가 서 있다. 햇살이 환하게 내리쬐는 한낮의 몽파르나스 거리의 카페에도 펜과 노트를 한시도 놓지 않은 채 한 줄의 진실한 문장을 찾기 위해 오늘도 엄격하고 치열하게 자신을 절제하며 한 줄 한 줄 글을 써 내려 가는 진지한 표정의 그가 앉아 있다.
파리를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이 책은 독특하고 신선한 파리 안내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의 페이지들을 천천히 넘기며 헤밍웨이가 들려주는 자신이 즐겨 찾는 장소와 함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마치 1920년대의 예술가가 되어 한 세기 전의 파리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이 든다.
1920년대는 파리를 중심으로 문학과 미술, 영화 등 예술 전반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 책에는 헤밍웨이를 비롯해 거트루드 스타인, 제임스 조이스, 실비아 비치, 에즈라 파운드, 스콧 피츠 제럴드 등 각주를 따로 살펴봐야 할 정도로 많은 당대의 작가 및 출판인,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고국을 떠나 파리로 왔고, 그들의 화합과 소통의 장소가 되어주던 곳이 거트루드 스타인의 집과 몽파르나스 거리에 위치한 라 클로즈리 데 릴라, 돔, 셀렉트 등과 같은 카페, 오데옹 거리에 있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이다. 그곳에서 각자 다른 삶의 배경과 감각을 가진 예술가들이 문학과 미술, 세상에 대해 한마디씩 의견을 내놓고 경험을 보탠다. 온갖 생각이 마주치고 서로의 존재가 춤을 추며 대결하는 듯한 흥미진진한 대화는 1920년대가 품은 실로 다양한 층위의 삶과 사람 사이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헤밍웨이의 음식에 관한 군침 나게 생생한 묘사도 빼놓을 수 없다. 굴과 화이트와인의 마리아주가 하루의 공허감과 피로감을 털어낼 수 있을 만큼 상쾌한지, 한꺼번에 몇 접시나 먹어치웠다던 모생치라는 생선튀김의 맛은 실제로 어떨지 확인하러 파리에 가고 싶어진다. 또한 지금과는 판이한 1920년대만의 파리의 모습도 알 수 있다. 제대로 된 하수 설비가 없어서 밤이면 원통 모양의 오수 탱크들을 실은 마차가 달빛 아래의 거리를 지나가고, 이른 아침이면 염소몰이꾼이 염소 떼를 몰고 다니며 젖을 짜 팔기도 한다. 센 강변에서 물고기가 많이 모이는 곳과 노점 책방에서 파는 헌책들의 출처와 오퇴이유 경마장에서 열리는 경마 경기의 모습도 나와 있다. 다시 파리에 간다면 곳곳에서 1920년대의 정취가 담긴 풍경이 오버랩 되어 펼쳐질 것 같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헤밍웨이에 대한 이미지는 사건 사고가 많고 여성 편력이 심한 마초적 남성에 가까웠는데 책에 쓰인 젊은 시절의 그의 모습은 가난 속에서도 더없이 올곧고 진지하며, 첫 번째 부인인 해들리와의 결혼 생활도 도무지 다른 연인이 끼어들 틈이라곤 보이지 않을 만큼 순수하게 서로를 향하고 있어서 어느 쪽이 사실인지 갸우뚱하게 했다. 그래서 그에 관한 다른 책들을 찾아보니 젊은 시절, 생활이 힘들 정도로 가난했던 것은 아니며, 성공적인 작품을 낼 때마다 이혼과 결혼을 반복해 평생 네 명의 아내와 그보다 더 많은 연인을 사귀었다고 한다.
또한 스콧 피츠 제럴드를 비롯한 동료 문인들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강해 날카로운 험담과 비방을 자주 했던 점이나 스콧 피츠 제럴드의 아내인 젤다를 남편의 글쓰기 작업을 방해하는 낭비벽이 심하고 정신병을 가진 악처로 비난하며 작가로서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점 등은 그가 써 내려 간 기억과는 다른 부분이 많아 어딘가 조금 삭제되고 미화한 듯한 인상을 준다.
헤밍웨이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파리는 영원히 기억될 도시이며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평생 파리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는 파리에서 보낸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인생에서 다시 오지 못할 아름다운 한 때로 기억했던 것 같다. 책 마지막에 나오는 글인 <나다 이뿌에스 나다>는 말년에 육체와 정신 기능이 퇴행하는 고통에 시달리던 헤밍웨이가 자살하기 석 달 전에 쓴 글이라고 한다. 원하는 바가 있으면 위험이 따르더라도 직접 뛰어들어 체험하는 삶을 추구했기에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 커다란 영광과 동시에 비참한 결과, 뒤늦은 후회를 남기는 선택 또한 많았을 것이다. 그 모든 선택을 거쳐 육체와 정신이 붕괴된 흔적이 역력한 말년을 맞이한 자신을 돌아보며,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삶을 향한 의지나 희망을 그토록 바라고 중요시했던 깨끗하고 건전한 삶, 완전무결한 이상, 진실한 한 줄을 쓰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절제, 한 사람을 향한 순수한 사랑 속에서 찾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의미 있는 삶 속에서 성장하고 풍족하진 않지만 나름의 시간 속에서 만족하며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가장 아름다웠던 과거 한때를 회상하며 현재를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가 저무는 파리 풍경을 바라보던 오래되고 평온한 밤으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기록이라기보다 그가 되고자 했던 이상향에 관한 진실을 그린 자전적 소설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