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사람은 가도, 옛날은 남는 곳 - 망우역사문화공원

무덤 산책, 무덤 여행. 낯설기만 한 조합인가요? 무덤을 찾아가는 일이 의아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고흐 형제, 몽파르나스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폐르 라 쉐즈의 에디트 피아프와 짐 모리슨. 위대한 예술가, 흠모하고 추앙하던 사람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을 찾아가는 길이 아주 뜨악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루 여행 상품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영화 〈레토〉에서 배우 유태오가 연기했던 소련의 록커 빅토르 최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그의 팬들은 공동묘지 화장실에 기거하며 매일 무덤가를 쓸고 장미꽃과 담배를 올려놓았지요.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빅토르 최 추모 벽에는 ‘빅토르는 죽지 않았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죽음은 확고한 사실이지만, 죽음은 받아들이는 건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의지에 달린 문제니까요. 빅토르는 죽지 않았다.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잊지 않겠다는 의지, 이 역설적인 외침은 ‘님은 갔지만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한용운 시인의 시를 떠올리게 합니다. 망우리 역사 문화 공원, 그곳에서 가장 나중에 만나게 될 사람이 바로 그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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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6월 10일 망우리 공동묘지가 문을 엽니다. 1973년 폐장까지 28,000여 분들이 이곳에 모셔지는데, 방정환, 유관순, 조봉암, 이중섭, 권진규, 이름은 가물거려도 한국 현대사에 소제목 하나씩 남긴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한국전쟁의 허무와 좌절 속에서 폭음으로 육체를 파멸시키면서도 가냘픈 인간성, 사랑을 놓지 않았던 낭만 시인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의 첫 부분입니다. 박인환의 시 하면 역시 「목마와 숙녀」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 … / 세월은 오고 가는 것 /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시인은 개인적 불행과 전쟁 공포 속에서 목숨을 끊은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모든 희망을 잃고 더 이상 꿈꿀 의지도 남아 있지 않은 한 여인을 떠올리며 시인은 참담하지만 담담하게 세상을 바라봅니다. 인생은 오고 가고 것, 외롭지도 않고 그저 통속적인 것. 



1956년 봄 명동의 대포주점 ‘경상도집’에서 박인환 시인은 떠나간 사랑을 써내려 갑니다. 사랑은 가고 / 과거는 남는 것 / …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의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박인환이 술을 마시며 막 탈고한 시에 신문기자 이진섭이 곡을 붙이고 테너 임만섭이 즉흥으로 공연을 벌입니다. 그날 이후 이 노래는 ‘명동 엘레지’라 불리며 술자리가 깊어지는 시간이면 명동 어디에서나 들려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못 되어 박인환은 시인 이상을 추모하며 삼일 밤낮 술을 마시고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이 노래를 처음 음반으로 낸 가수는 1990년대 중반 〈날 위한 이별〉이란 노래로 인기를 끌었던 가수 김혜림의 어머니 나애심입니다. 드라마 〈명동백작〉에서는 임만섭이 아니라 나애심이 이 노래를 처음 부른 것으로 나오지요. 1956년 나애심이 발표한 〈세월이 가면〉은 큰 인기를 끌지는 못합니다. 이 노래가 대중적으로 빛을 보는 것은 1976년 포크 가수 박인희가 부르면서부터입니다. 이후 조용필, 최백호 같은 분들이 이 노래를 다시 불렀습니다.


고 나애심 씨


나애심의 대표곡은 〈백치 아다다〉입니다. 계용묵의 소설 「백치 아다다」에서 제목을 따 온 노래입니다. 순수한 여인이 도덕성이 무너진 사회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 리얼리즘 소설이지만 현실을 적극적으로 타개해 가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의지만 있으면 사회 현실, 주변의 탐욕, 착취, 폭력 전부 문제가 되지 않는 걸까요? 


계용묵 원작의 1956년 개봉 영화 「백치 아다다」. 가수 나애심이 주연으로 등장했다.


계용묵의 무덤을 지나 한국의 비치보이스, ‘키보이스’ 보컬로 데뷔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으로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수식까지 얻게 된 가수 차중락의 묘로 갑니다. 1963년 데뷔해 스물일곱이던 1968년 숨을 거뒀으니 참으로 짧은 한 때였지요. 트로트를 부르는 배호와 함께 가장 많은 소녀 팬을 보유한 가수이기도 했지만, 1971년 배호마저 겨우 스물아홉 살에 사망하며 이제 둘 다 가물거리는 이름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비석에는 조병화의 시 「낙엽의 뜻」이 적혀 있습니다. 세월은 흘러서 사라짐에 소리 없고 / 나뭇잎 때마다 떨어짐에 소리 없고. 나뭇잎 떨어져 흙이 되고 인간의 사랑을 덮는다는 박인환의 시가 떠오르지요. 차중락의 묘는 제법 높은 산 중턱에 있는데도, 그가 죽고 한동안 소녀 팬들이 찾아와 꽃과 편지를 두고 갔다고 합니다. 산책을 하고, 여행을 하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산다는 건 사실 아주 단순한 일입니다. 단순한 시간들이 낙엽처럼 쌓여 사라지고, 그리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수한 현재들이 누군가의 가슴, 기억에 남았으니까요. 


가수 차중락의 묘비엔 '차중락 기념사업회'의 이름도 적혀 있다. 역시 요절한 가수 배호의 이름도 눈에 띈다.


널찍하고 잘 가꿔진 조봉암 선생의 묘를 지나 한용운 시인의 무덤에 이릅니다. 3.1운동으로 일제에 잡혀 갔던 한용운 시인이 감옥에서 풀려나던 날 조선의 저명인사들이 다들 마중을 나와 악수를 건넸다고 합니다. 혹시 성북 심우장에서 한용운 선생의 사진을 본 사람이라면, 다음 이야기가 따뜻하게 진행되지 않을 거라 예상할 수 있을 텐데요. “그대들은 남을 마중할 줄만 알고, 마중 받을 줄은 모르는가?” 모든 악수가 거절되었지요. 그는 마중하지도 마중 받지도 않으면서 조선 불교 개혁과 조선 독립을 위해 고독한 길을 걸어갑니다. 박인환이 쓴 ‘인간은 소모품. 그라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 하지’라는 문장의 본보기가 되어 주듯, 중풍으로 육체가 허물어지고 정신만 남은 때에도 타협 없이 살아갑니다. 



무덤을 걷습니다. 겪지 못한 시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지금 나와 마주치는 현실이 됩니다. 그들 삶의 한 장면,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쓰거나, 커다란 술잔을 들이키는 장면들이 지금 내가 쉬어 가는 벤치를 둘러쌉니다. 낙엽 따라, 목마를 남기고서 세상을 떠났더라도, 모든 기억은 가슴에 남는 것, 망우리 역사 길 한 걸음, 한 걸음에 피어오릅니다.





글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 『노자가 사는 집』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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