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김수영문학관에서 시비까지, 활자는 자유를 말하고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 「폭포」 중에서


1957년 김수영 시인은 시 「폭포」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그해 한국시인협회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됩니다. 아시아재단이라는 단체에서 부수적 부상품으로 문화자유회의Congress for Cultural Freedom가 발행하는 〈엔카운터〉 1년 구독권을 제안하는데, 칼 야스퍼스, 버트란트 러셀 같은 당대 유럽 최고 지식들이 참여했던 문화자유회의 영국지부가 발행하던 잡지였습니다. 편집자는 김수영 시인이 좋아하던 시인 스티븐 스펜더였고요. 김수영 시인은 무료 구독이 끝난 뒤에도 양계와 번역으로 번 빠듯한 생활비를 쪼개 이 잡지가 폐간될 때까지 구독자로 남습니다. 



그러나 4.19 혁명 이후 김수영 시인에게 변화가 생깁니다. 국외지보다 국내지를, 문학지보다 경제지를 더 많이 보게 되고, 유럽 지식인들의 논문을 읽어도 ‘뭐 그저 그렇군’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엔카운터〉가 도착한 지 일주일이 넘도록 봉투조차 뜯어보지 않는 날들이 늘어갑니다.



그때까지도 의심하지 않았어.
책을 빌려드리겠다고. 나의 모든 프라이드를
재산을 연장을 내드리겠다고.

그렇게 매일을 믿어왔는데, 갑자기 변했어.
왜 변했을까. 이게 문제야. 이게 내 고민이야.

- 「엔카운터 지(誌)」 중에서


그러나 잡지 봉투만은 여전히 유용했습니다. 그는 외출할 때 수첩을 따로 들고 나가지 않고 담뱃갑이나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종이에 메모를 했고, 집에서 시 초고를 쓸 때는 누런 색 잡지 우편 봉투를 뜯어 뒷면에다 빼곡하게 써 나갔습니다. 



김수영 시인 사진 중에서 세상에 잘 알려진, 소파에서 오른팔을 괴고 앉은 사진. 부리부리한 눈매와 쏘아보는 눈빛, 날렵한 콧날, 닭을 키우며 다져진 팔 근육. 기회가 있었다 해도 마주하기 힘들어 피했을 인상입니다. 어쩐지 윤동주, 백석처럼 그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오래 해 왔습니다. 정말 그랬을까? 그래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김수영문학관.



서울시 도봉구 북한산 자락. 북한산 둘레길 19코스 입구 정의공주 묘 가까이 있는 김수영문학관. 1층은 시인의 연대기입니다. 벽을 따라 작가 연보에 맞춰 한 걸음, 한 걸음, 2년, 3년을 거슬러 오릅니다. 생애가 다할 때쯤 김수영 시인의 일생을 설명하는 영상이 나오고, 시, 친필 원고 사이를 한적하게 오가다가 2층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엔카운터〉 봉투에 남겨진 시인의 만년필 자국을 드디어 목격합니다. 사랑의 변주곡. 교정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 「사랑의 변주곡」 중에서


김수영 시인이 쓰던, 사실 식탁이 아닐까 싶은, 커다란 원목 책상에는 미제 도자기 스탠드와 파커 만년필과 영어 사전이 놓여 있습니다.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는 시가 나올 만합니다. 의자가 여섯 개나 되니까요. ‘38선 돌아오듯 테이블을 돌아갈 때’란 구절처럼 만년필이 놓여 있는 자리로 가려면 한참을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유리 전시장 안 누런 봉투 앞면에는 런던으로 시작하는 발신인 주소와 마포구 구수동 41-2라 타이핑된 김수영 시인의 주소가 적혀 있습니다. 1968년 6월 15일 밤, 김수영 시인은 술을 잔뜩 마시고 버스에서 내려 한강을 내려다보던, 지금은 아파트 사이에 가로막힌 구수동 집으로 걸어가다 인도를 넘어온 버스에 사고를 당하고 서대문 적십자 병원으로 실려 갑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새벽부터 달려온 가족들, 친구들에 에워싸여 숨을 거둡니다. 



이제 시인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장소, 김수영 시비를 찾아갑니다. 북한산 둘레길 19코스, 18코스를 지나, 시비는 도봉산 등산로 입구에 있습니다. 산허리에도 차지 않는 등산로라 폭포 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계곡이 내내 따라옵니다. 간간이 얼굴을 씻고서 18, 19코스의 교차점 무수막 계곡에서는 아예 발을 담급니다. 여기서 멈추고 싶다, 흔들립니다. 흔들리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는 내내 흔들리고 속으로 혼자 울던 시인이니까요. 


김수영 시인하면 4.19의 희망과 5.16의 절망, 자유와 민주를 위한 강인한 의지를 떠올립니다. 그래도 좋지만 이곳 도봉산 자락에 서서 가만 숨을 내쉬면, 어머니와 닭을 키우며 이곳 어딘가 시를 쓸 방 한 칸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소박한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끝내 이곳에 서재를 마련하지 못하고 죽어서 이곳에 터를 잡습니다. 시비에는 김수영 시인이 쓴 마지막 시 「풀」이 새겨져 있습니다. 김수영 시인이 노트에 적어 놓았던 글씨입니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풀」 중에서


공자가 어느 정치가에 말했습니다. ‘윗사람이 선하고자 하면 백성이 선해지고,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로 바람이 불면 반드시 풀이 눕는다.’ 늦도록 이어지는 장마에 날이 흐리고 풀이 눕고, 지나는 사람들 등과 이마에 땀이 맺힙니다.


김수영 시인은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인’ 우리들은 울리고 돌고 도는 생활 속에서 바람보다 먼저 눕고 먼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생명으로 가득 찬 도봉산 기슭을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 대화들,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여름 날, 흐린 하늘 뒤로 하늘의 소음도 번성하고, 윤동주만큼, 백석만큼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여기 먼저 누워 있습니다.

 




글/사진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 『노자가 사는 집』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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