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서촌, 조선의 예술인 마을

1920년대의 베를린, 1930년대의 파리, 1940년대 이래 지금까지의 뉴욕. 전 세계 예술인들이 모여 당대의 문화와 예술을 이끌어 갔던 도시들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정지용, 이상, 백석, 노천명, 나혜석 등이 활동하던 1930년대의 종로, 김수영, 박인환, 오상순 시인이 활동하던 1950년대의 명동이 되겠지요. 요즘에는 합정동, 망원동, 을지로가 그 역할을 하고 있고요.


그런데 조선 시대에도 예술인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보통의 예술인 마을, 예술 도시들은 예술가들이 찾아와 만들어지는 반면, 조선의 예술인 마을은 처음부터 그 지역에서 태어나 평생 그 지역에서만 살다 간 사람들의 마을이었답니다. 모두가 같은 신분이었고요.


 서촌에 남아 있는 노천명 시인의 집터와 소설가 염상섭 생가 집터


조선은 양반, 중인, 천민으로 구분되는 신분 사회였는데, 중인(中人)은 말 그대로 중간 계급이라는 뜻입니다. 중인들 스스로는 조선이 붕당으로 나뉘어 상대편과 목숨 건 싸움을 벌일 때 이쪽 편도 저쪽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는 의미에서 중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들이 어느 한 쪽 편을 들지 않은 것은 정치 사대부들의 싸움에 낄 수 없는 낮은 관직이었기 때문입니다. 중인은 문과, 무과 과거 시험으로 관직에 나간 것이 아니라 의사, 통역관, 과학자, 출판인, 회계사, 화가 같은 잡과 시험을 통과해 하급 관리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중인들은 인왕산 기슭, 지금의 종로구 누상동, 누하동, 필운동, 옥인동 등 경복궁 서촌 지역에 몰려 살았습니다. 청계천 상류에 있는 이 마을들을 상촌, 윗마을이란 의미로 ‘웃대’라고도 불렀습니다. 남산 아래 남촌에는 벼슬을 얻지 못한 양반들이 살았고, 청계천 수표교 일대 중촌에는 중인 중에서도 의사, 통역관들이 몰려 살았습니다. 북악산 아래 안국역과 창덕궁을 아우르는 지역은 북촌이라 하여 직급 높은 양반 사대부만 살 수 있었고요. 중인들이 인왕산 기슭에 몰려 산 이유는 관청이 가깝고, 산기슭이다 보니 집값이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


인왕산 중인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지은 시와 산문을 사대부 문학과 구분해 위항문학, 여항문학이라고 하는데, 위항(委巷)은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이라는 뜻입니다. 위항에 사는 중인들은 주로 ‘시사(詩社)’라는 문학 동인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모임이 서당 훈장 천수경과 조선 최고의 출판 편집인 장혼이 중심이 되어 만든 송석원 시사입니다.


서촌을 관통하는 마을버스 9번 종점, 수성동 계곡에서 부암동에 이르는 길은 한양에서 가장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겸제 정선이 그린 인왕산 그림들에 아주 잘 묘사되어 있지요.


인왕산 백운동 계곡에 새겨진 '백운동천' 각자


청운동 일대에 있던 계곡을 일컫던 '청풍계' 자리에 남은 '백세청풍' 각자


수성동 계곡에서 경복궁역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윤동주 시인이 하숙을 하던 집터가 있고, 거기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박노수 미술관이 나옵니다. 친일파 윤덕영이 딸에게 지어 준 집을 화가이자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낸 박노수 화백이 사들였고, 나중에 종로구에 기증하며 구립 미술관이 됩니다. 이곳이 바로 송석원 시사의 대표적인 모임 장소였습니다. 


수성동 계곡과 그 일대 / 윤동주 하숙집 터와 박노수 미술관


천수경은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를 의뢰해 ‘송석원(松石園)’ 세 글자를 바위에 새겼는데, 그 바위가 바로 이 집 정원 어딘가에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건물을 지으며 숨겨졌다고 추측할 뿐이고요. 송석원 시사는 문학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을 생애 가장 큰 가치라 여기며, 한 달에 한 번 정기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들이 모이는 날에는 당대 유명 화가들이 와서 사진을 찍듯 그림을 그렸고, 이 모임에 초대 받지 못한 시인들은 부끄러워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송석원 터를 알리는 표석과 그 뒤에 새겨진 추사 김정희의 글씨


인왕산 예술인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은 지금의 배화여대 자리입니다. 인왕산에는 오른편에서 임금을 지킨다는 의미로 우필운룡, 필운산이란 이름이 하나 더 있는데, 오성과 한음 이야기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이 스스로 필운이라 칭하고 배화여고 뒤 바위에 필운대라는 글자를 새겼습니다.


필운대는 조선 최고의 꽃놀이 장소였습니다. 마포에서 복숭아꽃을 보고 필운대에 올라 살구꽃을 보는 게 봄철 행락객의 필수 코스였지요. 조선의 최고 가객 박효관이 이곳에 산방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가 제자 안민영과 지은 〈가곡원류〉는 〈청구영언〉, 〈해동가요〉와 함께 조선 3대 시조집으로 꼽히지요. 


필운대


옥인동 군인 아파트 앞에는 이이엄이라는 찻집이 있습니다. 이이엄은 조선 최고의 출판 편집인 장혼의 글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한자 지식을 가졌던 정조 왕의 문집을 교정 본 것도 장혼인데, 그는 편집뿐 아니라 서체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폰트를 만들어주는 일까지 했던 거지요.


하지만 평생 가난하여 기와도 얹지 못한 자그마한 집에 살았다고 합니다. 그 집이 너무 초라하여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집이라 비웃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배가 고프면 밥을 지어 먹고, 목이 마르면 우물물을 마시고, 석양과 새벽 달빛 정취를 그윽하게 즐기다 천명대로 살다 가면 그만일 뿐이라며 집 이름을 이이엄이라 지었습니다. ‘이이(而已)’는 ‘그만 하면 됐다’는 의미이고, ‘엄(广)’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서촌의 찻집 '이이엄'에서


현대 학자들은 중인들의 시와 그림이 양반 문학을 흉내 낸 수준에 불과하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직업 예술가로서 평생 기술을 가다듬고 수백 편의 작품을 만들어 온 사람들입니다. 조선 사대부 양반들에게 문학과 그림은 몸을 바르게 하는 수단일 뿐이었지만, 중인 예술가들은 작품 자체를 고민하는 전업 예술가들이었습니다. 학자, 정치가들이 취미로 그린 그림을 과연 직업 화가의 작품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중인이었던 조희룡의 〈홍매대련〉 / 삼성 리움미술관 소장


개항 이후 중인들은 가장 먼저 서양 문물과 지식을 받아들이고 개화파가 되어 근대를 이끌어 갑니다. 가장 먼저 영어를 배우고, 서양 의술을 배우고, 과학을 배웁니다. 종두법을 처음 들여온 지석영, 조선 최초로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미국 공무원이 되었던 변수, 기독교 서적을 처음 한글로 번역한 최창현. 중인들은 시대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문화를 주도해 갔습니다.


지금 서촌 마을은 기와지붕 올린 가짜 한옥으로 조선의 복제품을 재현하고 있지요. 서촌의 유산은 조선 왕조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초가에 구멍 뚫린 초가지붕 아래 살던 장혼처럼, 윤동주, 김수영처럼 체제와 갈등하고 불화하면서 ‘불온한’ 예술성을 고민하던 예술가 정신이야말로 인왕산의 유산입니다. 신분 한계, 시대와의 불화에서 오는 좌절을 예술로, 풍류로, 삶으로 극복해 가던 시인, 화가들. 그들의 흔적을 찾아 이 가을 조선의 예술인 마을을 거닐어 보시길 바랍니다.





글 이주호 / 사진 이주호, 신태진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 『노자가 사는 집』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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