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레오나르 지아나다(Léonard Gianadda)는 스위스 문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 후원자였습니다. 이런 건 스위스에 간다 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스위스 발레주 마르티니 시에 그가 세운 미술관이 있다는 것도, 그 미술관이 그가 겪은 개인적 불행을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킨 장소라는 것도, 마르티니에 간다고 다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1935년 스위스 발레주 마르티니에서 태어난 레오나르 지아나다는 건축가이자 사진가, 예술인 후원자였습니다. 1976년 동생 피에르(Pierre)가 비행기 사고로 죽자 동생을 기억하기 위한 미술관을 짓기로 했고, 동생이 사랑했던 고향 땅 마르티니에 퐁다시옹 피에르 지아나다(Fondation Pierre Gianadda)를 짓습니다.
마르티니는 몽블랑과 마터호른 사이,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잇는 알프스 문화가 교차하는 도시입니다. 꼭대기가 하얀 산들에 둘러싸인 이런 곳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었는지 갸웃갸웃하며 도시를 한 바퀴 휘 둘러보면 와, 유럽이구나, 결국엔 감탄하고 맙니다. 도시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알프스에 경외감을 느끼다가, 알프스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기운을 폐에 가득 담고, 커피를 마시고 치즈가 덕지덕지 발린 라끌렛을 먹고 와인을 마십니다. 도시를 걷습니다. 아름답고, 소박하고,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들 사이를 지납니다. 중세를 걷는 설렘이 야트막한 아파트 단지를 지나는 살가움에 스며들고, 이 서늘한 공기, 향기 짙은 와인, 곡물 향이 풍성한 맥주, 감탄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감탄할 일이 더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일찍부터 취해 있는지, 왜 그리들 행복해 보이는지.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산지다 보니 사실 할 일이 없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 발레주 사람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는군요. 어떤 문제가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파트라슈와 하이디가 뛰어놀 것 같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큰 문제가 대체 어느 정도 클지 모르겠으나, 주 정부가 낮에 술을 금지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발레주 사람들은 아침이든 점심이든 굿 이브닝이라 합니다. 이브닝, 이제 취할 시간.
이 웅성거리는 알프스 도시 한 편 조용한 마을에 굳이 찾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퐁다시옹 피에르 지아나다가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아득히 깊은 산속에 있는 동네 미술관인데 어느 때고 찾아가기만 하면 오르세, 루브르, 메트로폴리탄의 소장품 들이 툭툭 내걸려 있다고 합니다. 언제든 모네, 마티스, 르누아르, 샤갈, 피카소, 호크니의 그림 중 하나를 볼 수 있다는 건 빈말이 아닙니다. 제가 보았던 그림은 세잔과 르누아르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사랑 가득한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웅숭깊은 고요와 어둠이 깃들어 있습니다. 미술관 지하가 로마 유적 그대로인 것입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 보니 로마가 온전히 묻혀 있었다네요. 벽에 걸린 명화들은 고대 로마의 유적을 둘러싸고 흐르는 세기의 변화입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예술이 일어나고, 기억이 전해집니다. 도저한 역사가 지표를 차곡차곡 쌓고, 나는 역사의 우물 맨 위에 떠 있는 오늘의 예술을 한 모금 떠 마십니다.
1980년대부터 이곳에서 공연을 열기 시작했는데, 제가 알고 있으니 누구나 알 법한 이름들, 루치아노 파바로티, 다니엘 바렌보임,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이곳에 다녀갔다 합니다. 그분들도 몰랐을 겁니다. 도대체 몇 개의 산맥을 넘었는지 관심도 없게 되었을 즈음 도착한 요새 같은 도시에 이런 풍요로운 미적 유산이 남아 있었을 줄을. 그분들이 몰랐는데 제가 어찌 알 수 있었을까요.

건축가 지아나다로 마르티니에 머물다가 사진가 지아나다가 되어야 할 때가 되면 그는 측량 도구 대신 사진기를 손에 들고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그리하여 〈Léonard Gianadda sur les traces de Tintin〉, 벨기에 작가 에르제의 『땡땡의 모험』, 그 주인공 땡땡의 발자취를 따라 간 여행을 사진으로 담은 전시를 제가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땡땡, 영어로 틴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틴틴의 모험〉의 그 틴틴입니다. 그리하여 뒤늦게 〈틴틴의 모험〉 영화를 찾아보았으나 2편은 나오지 못하겠구나 싶었습니다. 대신 지아나다라도 알고 싶었고, 그의 행적을 찾아보았고, 그가 동생을 위해 세운 장소를 오래 기억하고 싶어졌습니다. 그의 삶도, 작품도, 그 모든 일이 벌어진 장소 마르티니도, 시간을 아껴 가며 사랑해 보렵니다.
레오나르 지아나다의 세계 여행 사진과 만화 〈땡땡의 모험〉 원화가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미국, 유럽, 이집트·튀니지, 소비에트 연방, 지중해, 남미, 아프리카. 현실의 장소와 만화 속 배경이 어떻게 서로 겹치는지, 현실의 모험가 지아나다는 상상 속 모험가 땡땡과 어떤 교감을 나누었는지, 허구와 현실, 만화와 여행, 상상과 재현이 영역을 넘나듭니다.


지하에는 자동차 박물관이 있습니다. 1897년부터 1939년까지 생산된 고전 차량 50여 대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참 많이도 모으셨어요. 이런 자동차를 타고 알프스 계곡을 달리면 어떤 기분일까요? 그런데 한국의 클래식 자동차 애호가들이라면 어떤 자동차를 모았을까요, 포니? 르망? 콩코드? 그걸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를 달리면, 관심 받고 싶어 안달 났군, 뒷말이 자자하겠지요. 지아나다 씨의 차 한 대를 빌려 다소 꺼림칙한 매연을 털털거리며 마르티니 시를 한 바퀴 달려 보고 싶습니다. 배경음악으로는 시네마 천국 같은 게 좋겠군요. 스위스 음악을 알지 못하니, 급한 대로, 이탈리아를 불러옵니다.
미술관 뒷마당은 조각 공원입니다. 이곳의 면면도 미술 교과서입니다. 로댕, 자코메티, 브랑쿠시. 근현대 조각가의 야외 작품이 있고, 무슨 행사인지 와인을 마시는 동네 분들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턱대고 한 잔 받아 마시고 싶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서로 무안하겠지 싶어 바라만 봅니다. 괜찮습니다. 이곳을 나가서 5분만 걸어가면 와인, 맥주가 널린 상점가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차로 10분, 포도농장 마을에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굿 이브닝, 마르티니, 혹 마티니. 이름부터가 취하고 싶은 도시 아닌가요?
글 | 이주호

브릭스 매거진의 편집장.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사뿐사뿐, 노자네 집까지』 등을 쓰며 맥주를 마셨다.
건축가 레오나르 지아나다(Léonard Gianadda)는 스위스 문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 후원자였습니다. 이런 건 스위스에 간다 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스위스 발레주 마르티니 시에 그가 세운 미술관이 있다는 것도, 그 미술관이 그가 겪은 개인적 불행을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킨 장소라는 것도, 마르티니에 간다고 다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1935년 스위스 발레주 마르티니에서 태어난 레오나르 지아나다는 건축가이자 사진가, 예술인 후원자였습니다. 1976년 동생 피에르(Pierre)가 비행기 사고로 죽자 동생을 기억하기 위한 미술관을 짓기로 했고, 동생이 사랑했던 고향 땅 마르티니에 퐁다시옹 피에르 지아나다(Fondation Pierre Gianadda)를 짓습니다.
마르티니는 몽블랑과 마터호른 사이,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잇는 알프스 문화가 교차하는 도시입니다. 꼭대기가 하얀 산들에 둘러싸인 이런 곳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었는지 갸웃갸웃하며 도시를 한 바퀴 휘 둘러보면 와, 유럽이구나, 결국엔 감탄하고 맙니다. 도시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알프스에 경외감을 느끼다가, 알프스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기운을 폐에 가득 담고, 커피를 마시고 치즈가 덕지덕지 발린 라끌렛을 먹고 와인을 마십니다. 도시를 걷습니다. 아름답고, 소박하고,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들 사이를 지납니다. 중세를 걷는 설렘이 야트막한 아파트 단지를 지나는 살가움에 스며들고, 이 서늘한 공기, 향기 짙은 와인, 곡물 향이 풍성한 맥주, 감탄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감탄할 일이 더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일찍부터 취해 있는지, 왜 그리들 행복해 보이는지.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산지다 보니 사실 할 일이 없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 발레주 사람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는군요. 어떤 문제가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파트라슈와 하이디가 뛰어놀 것 같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큰 문제가 대체 어느 정도 클지 모르겠으나, 주 정부가 낮에 술을 금지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발레주 사람들은 아침이든 점심이든 굿 이브닝이라 합니다. 이브닝, 이제 취할 시간.
이 웅성거리는 알프스 도시 한 편 조용한 마을에 굳이 찾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퐁다시옹 피에르 지아나다가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아득히 깊은 산속에 있는 동네 미술관인데 어느 때고 찾아가기만 하면 오르세, 루브르, 메트로폴리탄의 소장품 들이 툭툭 내걸려 있다고 합니다. 언제든 모네, 마티스, 르누아르, 샤갈, 피카소, 호크니의 그림 중 하나를 볼 수 있다는 건 빈말이 아닙니다. 제가 보았던 그림은 세잔과 르누아르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사랑 가득한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웅숭깊은 고요와 어둠이 깃들어 있습니다. 미술관 지하가 로마 유적 그대로인 것입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 보니 로마가 온전히 묻혀 있었다네요. 벽에 걸린 명화들은 고대 로마의 유적을 둘러싸고 흐르는 세기의 변화입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예술이 일어나고, 기억이 전해집니다. 도저한 역사가 지표를 차곡차곡 쌓고, 나는 역사의 우물 맨 위에 떠 있는 오늘의 예술을 한 모금 떠 마십니다.
1980년대부터 이곳에서 공연을 열기 시작했는데, 제가 알고 있으니 누구나 알 법한 이름들, 루치아노 파바로티, 다니엘 바렌보임,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이곳에 다녀갔다 합니다. 그분들도 몰랐을 겁니다. 도대체 몇 개의 산맥을 넘었는지 관심도 없게 되었을 즈음 도착한 요새 같은 도시에 이런 풍요로운 미적 유산이 남아 있었을 줄을. 그분들이 몰랐는데 제가 어찌 알 수 있었을까요.
건축가 지아나다로 마르티니에 머물다가 사진가 지아나다가 되어야 할 때가 되면 그는 측량 도구 대신 사진기를 손에 들고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그리하여 〈Léonard Gianadda sur les traces de Tintin〉, 벨기에 작가 에르제의 『땡땡의 모험』, 그 주인공 땡땡의 발자취를 따라 간 여행을 사진으로 담은 전시를 제가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땡땡, 영어로 틴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틴틴의 모험〉의 그 틴틴입니다. 그리하여 뒤늦게 〈틴틴의 모험〉 영화를 찾아보았으나 2편은 나오지 못하겠구나 싶었습니다. 대신 지아나다라도 알고 싶었고, 그의 행적을 찾아보았고, 그가 동생을 위해 세운 장소를 오래 기억하고 싶어졌습니다. 그의 삶도, 작품도, 그 모든 일이 벌어진 장소 마르티니도, 시간을 아껴 가며 사랑해 보렵니다.
레오나르 지아나다의 세계 여행 사진과 만화 〈땡땡의 모험〉 원화가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미국, 유럽, 이집트·튀니지, 소비에트 연방, 지중해, 남미, 아프리카. 현실의 장소와 만화 속 배경이 어떻게 서로 겹치는지, 현실의 모험가 지아나다는 상상 속 모험가 땡땡과 어떤 교감을 나누었는지, 허구와 현실, 만화와 여행, 상상과 재현이 영역을 넘나듭니다.
지하에는 자동차 박물관이 있습니다. 1897년부터 1939년까지 생산된 고전 차량 50여 대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참 많이도 모으셨어요. 이런 자동차를 타고 알프스 계곡을 달리면 어떤 기분일까요? 그런데 한국의 클래식 자동차 애호가들이라면 어떤 자동차를 모았을까요, 포니? 르망? 콩코드? 그걸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를 달리면, 관심 받고 싶어 안달 났군, 뒷말이 자자하겠지요. 지아나다 씨의 차 한 대를 빌려 다소 꺼림칙한 매연을 털털거리며 마르티니 시를 한 바퀴 달려 보고 싶습니다. 배경음악으로는 시네마 천국 같은 게 좋겠군요. 스위스 음악을 알지 못하니, 급한 대로, 이탈리아를 불러옵니다.
미술관 뒷마당은 조각 공원입니다. 이곳의 면면도 미술 교과서입니다. 로댕, 자코메티, 브랑쿠시. 근현대 조각가의 야외 작품이 있고, 무슨 행사인지 와인을 마시는 동네 분들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턱대고 한 잔 받아 마시고 싶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서로 무안하겠지 싶어 바라만 봅니다. 괜찮습니다. 이곳을 나가서 5분만 걸어가면 와인, 맥주가 널린 상점가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차로 10분, 포도농장 마을에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굿 이브닝, 마르티니, 혹 마티니. 이름부터가 취하고 싶은 도시 아닌가요?
글 | 이주호
브릭스 매거진의 편집장.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사뿐사뿐, 노자네 집까지』 등을 쓰며 맥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