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프랑스 니스로의 여행. 시작부터 꼬여도 휴게소가 당신을 위로합니다

2026-03-27


3f19a8561ea50.jpg프랑스로 가는 길


창밖으로 니스 해변을 따라 이어진 오렌지색 불빛이 보입니다. 내일이면 저 길을 따라 걷겠구나, 커지는 기대감과 함께 기체의 진동도 심해지네요. 뭔가 이상합니다. 이렇게 바람이 맹렬하게 불다니, 피곤하기는 해도 대체로 평온했던 취재의 시작에서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에요. 날개가 위아래로 번갈아 요동치면서 비행기는 어찌어찌 활주로로 고개를 내립니다. 하지만 진동이 너무 심해 결국 기수를 올리고 말아요. 사람들의 탄식, 그러기를 두 차례. 기장이 고집이 아주 센 사람이라 무조건 착륙하고야 말겠다고 나서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달리 리옹으로 대체 착륙한다는 방송이 나옵니다. 차라리 다행이겠죠? 니스가 아무리 아름다운 도시라도 불시착한 곳으로 기억하고(혹은 기억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c7db9e573443f.jpg기내식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좋았죠


평온한 시작이라고는 했지만, 비행기 두 대가 연달아 지연되기도 했기 때문에 리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현지 시각으로 자정이었습니다. 물론 그냥 내릴 리는 없지요. 에어프랑스 사람들은 기민하게(그래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대책을 마련합니다. 처음엔 애초에 없던 리옹-니스 간 새벽 1시 10분 비행기가 생기더니(그게 바로 우리 비행기였지요) 니스의 날씨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자, 여러분 니스로 다시 갈 수는 없습니다. 버스 세 대를 빌려 여러분을 육로로 모시겠습니다. 리옹에서 니스까지는 다섯 시간 정도 걸립니다. (물론 실제로는 그 이상 걸렸습니다.)


62a3a55f2a30e.jpg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에서


배낭여행이었으면 배낭여행다운 다이나믹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취재라고 해도 곤란하기보다는 역시 웃으며 회고할 해프닝인 것은 마찬가지더군요. 기내의 누구도 화를 내며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맙소사 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은 있더군요. 누군가는 2년 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어 버스를 타고 니스에 갔다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기내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 터미널로 빠져나오고, 짐을 찾고, 5분 후에 온다고 하지만 50분은 걸린 게 분명한 버스를 기다립니다. 버스를 타는 일이 또 총체적 난국입니다. 좌석 번호에 따라 나눈다거나 하물며 줄을 세운다거나 하는 통제는 없이 집단지성에 뒷일을 맡긴 것이지요. 모두가 한밤의 주차장을, 짐을 끌고 질주합니다. 앉을 좌석은 넉넉한데 짐 넣을 공간이 부족해 먼저 온 버스 두 대에 탑승하기는 실패. 다시 10여 분을 기다리니 세 번째 버스가 와서 짐칸이 아닌 정비용품 칸에 캐리어를 쑤셔 넣고 자리에 앉습니다. 기특하게도 한참 전에 꽉 찬 먼저 온 두 버스도 공평하게 출발하더군요.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누군가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여 결국 불만을 만들어내는 상황은 막으려던 모양이었습니다. 먼저 탄 사람들이야 좀이 쑤셨겠지만, 후발주자로선 그 공평함에 으쓱할 일이지요.


ef9674bb3dd05.jpg한밤의 혼란이 시작된 리옹 공항


리옹의 새벽 날씨는 영상 3도였고, 진눈깨비가 내렸습니다. 이렇게 추울 수가, 하긴 프랑스 한복판이니 그럴 만하지, 그래도 버스 안은 따뜻해서 금방 잠이 쏟아집니다. 유럽의 버스도 반드시 중간에 휴식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오전 10시에만 도착해도 다행이겠다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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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버스 탑승


문득 선잠에서 깨어나니 해가 뜨고 있습니다. 언젠가 본 적 있던 것만 같은 프랑스 남부의 평원이 펼쳐져 있더군요. 반가운 사이프러스 나무들. 분홍빛과 자줏빛이 쏟아진 하늘, 그 빛을 연료 삼아 타오르는 구름. 더 자야 하는 걸 알지만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그래요, 비행기가 연착되고 회항하지 않았다면 이 시각에 해 뜨는 걸 보진 못했을 겁니다. 길가에 엄청난 규모로 자리 잡은 페덱스 물류센터조차 여행의 감흥을 재촉합니다. 아비뇽 가까운 곳을 지나고 있더군요. 아비뇽, 그래, 그곳도 가보고 싶던 곳입니다. 이렇게 가까이 스치기라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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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프랑스의 태양이 떠오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휴식 시간이 왔습니다. 톨게이트를 지나 휴게소로 들어선 버스는 45분간의 휴식 시간을 선언합니다. 오전 일정이 늦어지겠지만, 모두들 기뻐합니다. 국적과 상관없이 전우애가 생길 만큼 치솟았던 긴장감과 피로를 풀어줄 필요가 있는 거예요.


휴게소는 크고 세련되고 깨끗합니다. 좌우로 줄줄이 늘어선 커피 자판기(자판기라고 무시할 순 없는 게 원두로 내려줍니다)가 휴게소의 정체성을 요약해서 보여주네요. 누군가 그랬죠, 휴게소는 도로 위의 시라고. 하늘 위로 훌쩍 올라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휴게소는 마침내 보게 될 니스의 아침에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름다웠습니다. 무박으로 이어지는 비행기 여행에 지친 사람들은 커피 한 잔과 비스킷 한 조각에서 위로를 찾습니다. 얇은 가공육을 사서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려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녀의 연인도 “그걸 먹게?” 하는 반가운 놀람의 표정이었습니다. 계산대 옆에 놓인 토끼 모양의 초콜릿은 다가오는 부활절 시즌 상품이라고 하고요.


5df532d168d90.jpg'도로 위의 시'다운 휴게소


기욤 뮈소를 비롯한 여행 중에 읽기 좋은 스릴러 소설들, 정원에 관한 책들, 단어 퍼즐과 마르세유 지역 특산품들, 피카츄 인형, 두꺼운 옷과 자동차 정비용품들. 리옹에서 니스로 가는 길에 들른 이 휴게소에는 없는 게 없어 보입니다. 나중에 다시 남프랑스를 여행하며 이곳을 찾아올 일이 있겠냐 싶지만, 지도에 저장해 둡니다. 간밤의 실망과 두려움을 진한 알롱제 한 잔에 잊게 해 준 이곳은 여행의 시작점으로 너무나 적절했으니까요. 우리가 여행을 떠날 때마다 맹신할 수밖에 없게 되는 ‘반가운 우연’이라는 공식에 제대로 부합한 곳이었으니까요.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커피 한 잔이 절실합니다


시작부터 꼬여도, 리옹에서 니스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 한국에서 프랑스까지 날아오던 시간의 절반은 된다고 해도, 휴게소는 당신을 위로합니다. 여행 자체는 휴식이 아니에요. 그저 그 안에도 우리를 위로하는 공간이 다른 모든 고난 사이에 숨어 있을 뿐입니다. 그걸 발견하는 게 의지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여전히 니스로 달려가고 있는 버스 안에서 행운이 몇 번 더 찾아오길 바라봅니다. 아, 그런데 니스에는 도대체 언제나 도착하려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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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e de Lançon de Provence
A7 Aire de Lançon - KM, 242 Rue de Lyon, 13680, Lançon-Provence
https://maps.app.goo.gl/WTKhJbLR4wkxgoqe7




글·사진 |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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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를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litt.ly/ecrire_lire_vi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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