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중세 마을에서 빠져드는 코트다쥐르의 바다, 에즈 빌리지

2026-04-02


중세 마을, 에즈 빌리지(Èze Village)에 가다


니스와 모나코 사이에 어쩐지 이름도 아련하게 울리는 에즈 빌리지(Èze Village)가 있습니다. 니스에서 출발해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면 오른쪽으로 프랑스 리비에라의 아름다운 해안 풍경이 펼쳐집니다. 왜 이곳에 코트다쥐르(Côte d'Azur, 쪽빛 바다)라는 이름이 지어졌는지 알 것 같다고, 어디선가 많이들 읽어보셨을 겁니다. 그런 찬사들이 과장은 아니었습니다. 평소 쉽게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여기서는 탄성이 나올 겁니다. 자연은 그 웅장함이나 신묘함뿐만 아니라 색으로도 인간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건 그저 색깔의 문제가 아니겠네요. 코트다쥐르는 바다가 단순히 거대한 물탱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인간의 의지나 능력을 초월하는 생명 앞에서 우리는 그저 눈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놀랄 수밖에 없는 거지요.


b898aac5e832f.jpg에즈 빌리지에서


잠시 니스를 벗어나 에즈 빌리지로 가는 이유도 이 넓고 푸르른 경이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저 전망대를 찾아가는 여행은 아닙니다. 철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긴 역사 속에서 에즈 빌리지에는 특히 중세 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평균 해발 400m, 최대 해발 600m에 이르는 에즈 빌리지는 단단한 석회암 위에 세워졌으며, 골목은 좁고 위아래로 물결칩니다. 골목을 이렇게 좁게 만든 건 여름철에 그늘을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하네요. 생활 물자를 나르기 위한 중요한 교통수단은 당나귀였고요. 요즘은 물론 전동 수레 같은 기계가 당나귀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fc1f7d678824d.jpg8589be7aa3fda.jpg현대식 당나귀


에즈 빌리지에서는 유명한 이름도 하나 만날 수 있는데, 바로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입니다. 에즈빌리지로 들어가는 정문 바로 옆에 ‘니체의 길(Chemin de Nietzsche)’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니체가 이 지역에서 겨울을 보내며 산책했던 길이지요. 에즈는 바닷가 마을 에즈 쉬르 메르(Èze-sur-mer)와 산 위 마을 에즈 빌리지로 나뉘는데, 그 둘을 잇는 길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이곳을 산책하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3부를 구상하고 집필했다고 하네요. 죄송하게도 전 1부까지만 읽었지만요.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니체의 길


지금은 사라진 성문을 지나 에즈 빌리지 안으로 들어서면 요리사 복장을 한 사람들이 골목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출근 시간에 늦었나? 아닙니다. 이 작은 마을 안에는 5성급 호텔이 세 군데나 있고 레스토랑의 수준도 높은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호텔이라도 한곳에 모여 있는 게 아니라 골목 이곳저곳에 방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이들이 식재료나 요리된 음식을 나르는 거예요. 아침이면 방으로 조식을 가져다주는 이들을 마주친다고 하는데, 룸서비스 팁을 넉넉히 줘야겠네요. 그냥 식당 안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 텐데 오르락내리락 골목을 뛰어다녀야 한다니, 정말 극한직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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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도 여간 힘든 게 아니군요


골목골목 아틀리에와 갤러리, 카페와 젤라테리아가 숨어 있습니다. 니체가 철학적 영감을 받았듯 오늘날의 예술가들도 이곳에서 저마다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것인데요, 이 정도 고도에서 내려다보는 코트다쥐르의 바다라면 평범한 사람이라도 뭔가를 만들어 내고 싶어질 겁니다. 경제적으로 살아낼 여력만 있다면, 얼마나 충만한 삶이겠어요. 그냥 마을만 돌아다녀도 운동이 될 테니 건강도 유지할 수 있고요.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역사를 좋아하시는 분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현재 에즈 빌리지에 남은 가장 오래된 건물은 1306년에 세워진 백색 참회자들의 예배당(Chapelle des Pénitents Blancs)입니다. 중세부터 페스트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곳이었고, 이후에도 아픈 이들의 안식처였던 곳입니다. 평소 개방되는 곳은 아니라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창살 너머로만 내부를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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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참회자들의 예배당


입구에는 십자가와 함께 오래된 라틴어 경구가 적혀 있습니다. “나도 한때 너와 같았고, 너도 언젠가 나와 같아지리라.” 망자가 산 자에게 전하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식 메시지, 이미 자연의 경이로움에 압도된 영혼이라면 이 문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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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클라이맥스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곳, 에즈 이국식 정원(Jardin Exotique d’Èze)


이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차례입니다. 에즈 빌리지의 하이라이트를 시작할 시간이지요. 에즈 이국식 정원(Jardin Exotique d’Èze)은 에즈 빌리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식물과 조각, 그리고 풍경이 어우러지는 명소입니다. 옛 성터 위에 조성되어서 지금도 폐허의 흔적이 남아있지요.


한국에서는 ‘에즈 선인장 정원’이나 ‘에즈 열대 정원’이라고도 번역하는 것 같은데, 직접 가보면 그런 명칭이 실체를 적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선 선인장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선인장만 볼거리인 건 아닙니다. 지중해 식물들을 심은 구역도 있지만, 그렇다고 열대‘우림’을 옮겨온 것도 아니고요. 코트다쥐르의 화창한 기후는 ‘rain forest’와는 거리가 머니까요. 오히려 프랑스 입장에서 ‘이국적’인 나라(주로 중남미)에서 모셔 온 식물들을 이 작은 생태계를 이루고 있으니, 원어의 첫 번째 뜻 그대로 ‘이국식’이라고 표현하는 게 합당할 듯합니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입장료를 내고 계단을 오르면 이 지역 특유의 기와지붕 너머로 바다가 보입니다. 보일 듯 말 듯, 무대 위 주인공이 암전 속에서 실루엣으로 궁금증을 자아내듯 사람을 안달 나게 합니다. 그러다가 온갖 독특한 생김새의 선인장에 눈길을 빼앗기고, 곳곳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상도 걸음을 멈추게 하네요. 이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그녀들의 시선이 끝나는 곳에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에즈 이국식 정원에 있는 이 조각들은 장-필리프 리샤르(Jean-Philippe Richard)의 작품들로 여인들의 팔이 몸에 바싹 붙어 있습니다. 정원에 심어진 선인장과 나무처럼 성장 중인 형상, 땅이나 자연에서 막 솟아나는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조각했다고 하네요. 여인상들이 주변 식물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고요.


f22d88a0cc12d.jpgf36b62c8d9ed3.jpg장-필리프 리샤르의 조각상들


언덕을 오르는 길에 마침 이곳을 관리하는 정원사를 만났습니다. 총 6명의 정원사가 정원을 비롯해 에즈 빌리지 전체를 관리한다고 하네요. 이곳에 올라오면서 보았던 레스토랑이나 호텔 종사자들처럼 뛰어다니진 않아도 되겠지만, 식재 수도 많고 길도 제법 가파르니 역시 만만한 직업은 아닐 것 같습니다. 바다를 보며 한숨 돌릴 시간은 많을 수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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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즈 빌리지의 정원사


마침내 정상에 다다르면, 18세기 초 루이 14세가 파괴했다는 옛 성의 잔재 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제 마음껏 바다를 내려다봅시다. ‘청록’도 저렇게 스펙트럼이 넓은 색이었군요. 에즈 이국식 정원이 오직 전망을 위한 곳은 아니지만, 에즈 빌리지에 방문하고 이 정원을 오르기로 마음 먹었다면, 당신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 중 하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직접 만든 셈입니다. 요즘 ‘리즈’와는 영 거리가 먼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코트다쥐르의 바다는 인생에 작은 클라이맥스를 선사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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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정상에서도 장-필리프 리샤르의 여인상을 여럿 만날 수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먼 바다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하산할 시간, 에즈 빌리지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서 본 바다가 그리워질 때, 우리의 뒷모습에서는 어떤 빛깔의 감정이 새어나올까요? 이 여인은 그 숙명 같은 후회를 예감했기 때문에 영원히 이 폐허의 한쪽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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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협조 | 프랑스 관광청,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관광청

글·사진 |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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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를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litt.ly/ecrire_lire_vi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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