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 인간의 이상과 상상력이 현실이 된 공간 - 남프랑스 '빌라 에프루시 드 로스차일드'

2026-06-29


22f7aae42b01a.jpg빌라 에프루시 드 로스차일드


거대한 저택, 무려 9개의 테마로 나뉘는 드넓은 정원. 어느 왕실이나 귀족이 살던 집을 설명하는 것 같지만, 여기에는 한 여성의 독립과 본인의 이상을 현실화하는 의지와 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오늘 산책의 목적지, ‘빌라 에프루시 드 로스차일드(Villa Ephrussi de Rothschild)’입니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유럽 금융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거대한 가문이지요. 다양한 나라에서 이 가문의 후계자들이 활동하고 있는데요, 빌라 에프루시 드 로스차일드의 주인이었던 베아트리스(Béatrice Ephrussi de Rothschild)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아트리스의 아버지는 프랑스 쪽 로스차일드 가였고, 어머니는 영국 쪽 로스차일드 가였다고 합니다. 유력 집안일수록 가문 내의 결혼이 흔했기 때문인데, 전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였지요.


1ef946e0f00e4.jpg말년의 베아트리스 드 로스차일드


파리에서 태어난 베아트리스는 열혈 예술 애호가였던 아버지와 정원을 사랑하는 영국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예술적 소양을 길러도 당시 여성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독립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아트리스도 ‘에프루시(Ephrussi)’라는 가문의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이게 아주 실패한 결혼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아트리스의 남편 모리스 에프루시가 알고 보니 심각한 도박꾼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엄청난 빚을 지고 말았거든요. 게다가 그에게서 옮은 병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도 없는 몸이 된 베아트리스는 이혼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최고의 부자 집안 딸의 실패한 결혼과 이혼 소식은 온갖 구설수를 불러 모을 게 뻔했습니다. 베아트리스는 처음엔 별거의 형태로 남편과 결별했다가 나중에야 공식적으로 이혼 도장을 찍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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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에프루시 드 로스차일드의 정원


베아트리스가 자유를 얻은 지 1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아트리스의 아버지는 딸과 아들에게 동등한 몫의 재산을 남깁니다.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베아트리스는 어릴 때부터 키워 온 자신의 꿈을 이루기로 합니다. 그게 바로 이곳 빌라 에프루시 드 로스차일드였습니다. 베아트리스는 여름을 제외한 계절에 이곳에서 지내며 영국 왕실의 왕자와 모나코의 왕자, 그 외 유럽의 귀족과 산업계의 거물들을 초대하며 성대한 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8e37601135803.jpg실외가 아니라 실내입니다.


집도 집이지만, 베아트리스는 정원에 정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 위. 바위도 많고 강풍도 부는 지형이라 정원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았지만, 무려 7년여에 걸쳐 정원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바위를 부수고, 흙을 퍼다 나르며 평탄한 지형을 만들었지요. 게다가 뉴질랜드부터 아시아, 남미까지 먼 외국의 식재를 실어다 심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정원은 저택에서부터 분수대, 살짝 솟은 언덕 위에 세워진 정자까지 잇는 가상의 일직선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데 그 모습이 몹시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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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성대한 정원 파티를 열었겠군요


베아트리스는 죽기 몇 해 전 이 빌라의 부지 및 예술품을 전부 프랑스 아카데미 미술원에 기증했습니다. 이후로 이 빌라는 국가의 관리하에 들어가며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프랑스식, 스페인식, 플로렌스식, 세브르, 석재(라피데르), 일본식, 이국식, 프로방스식, 거기에 장미 정원까지 모두 아홉 개의 주제로 정원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특히 다른 지역을 테마로 한 정원은 그냥 흉내만 낸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현지의 식생과 장식품을 그대로 가져오는 식으로 충실히 복원되었습니다. 예컨대 일본식 정원을 꾸미기 위해 일본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일본식 사고가 깃든 정원을 구현하는 식이었습니다.


6f4d8fffc9991.jpg0b1f580db0430.jpg스페인식 정원. 9개의 테마 중 가장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곳입니다.


이제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 거의 왕가의 저택 수준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내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인 그랑 살롱에는 카펫이 한 점 깔려 있는데, 10년 전 기준으로 300만 유로가 넘는 가치를 지닌 ‘보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카펫이 베르사유 궁전 예배당에 깔려 있던 것이거든요. 원래 다섯 점이 있었는데 나머지 네 점은 프랑스혁명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하니, 이 카펫의 가치를 상상할 만합니다.


한편 20세기 초에 지어진 이 저택은 마치 18세기 왕가의 저택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당시로서는 최신 시설을 도입했다고 합니다. 전기, 수도, 위생 설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고, 직접 타볼 수는 없었지만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했다고 합니다. 물론 어떤 화려한 장식과 최신 기술도 그랑 살롱의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에 미치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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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스의 강아지가 앉았던 의자가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의자의 1000배는 비쌀 것 같군요.


왕실 공방의 태피스트리와 장인의 고가구, 세브르 자기, 베아트리스의 반려동물을 위한 작은 가구까지, 실내 곳곳에는 그녀의 취향과 기행이 함께 남아 있습니다. 베아트리스는 자신의 반려견을 아주 사랑했던 것 같은데요, 반려견의 짝을 지어줄 때, 진짜 인간의 결혼식처럼 진행했다고 합니다. 수백 장의 초대장을 보내서 손님을 초대하고, 개들은 물론 주인과 손님들도 예복을 차려입었다고 합니다. 잘은 몰라도 그냥 혈통 있는 개들의 짝짓기라고 생각했을 ‘사돈’께서도 적잖게 당황했을 것 같네요.


27841e9c2ab4f.jpg연회 음식을 재현한 것으로 랍스타를 쌓아 두고 먹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발코니가 나옵니다. 베아트리스는 거의 매주 일요일 오후에 정원 파티를 열었는데, 이 발코니 공간에서 실내악이나 소규모 음악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한 번은 2층 모든 창문으로부터 기다란 실크를 내려트려 정원을 덮는 파티를 열기도 했다고 합니다.


단순히 재력만으로 이런 놀라운 이벤트를 열지는 못했을 겁니다. 유력 금융 가문의 후손이었고 예술적 소양도 갖추었지만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던 세상. 베아트리스는 결혼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유산을 관리하면서 자신이 상상하던 그림을 현실에 그려냈습니다. 사실 빌라 에프루시 드 로스차일드를 처음 맞닥트리면 어느 왕족이나 귀족의 화려한 저택과 정원 중 하나구나 싶습니다.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꺼내놓아도 충격적일 베아트리스의 아이디어와 실천력. 우리는 시대를 풍미한 한 인간의 정신을 건축과 조경을 통해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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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협조 | 프랑스 관광청,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관광청
글·사진 |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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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를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litt.ly/ecrire_lire_vi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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