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남프랑스의 향기를 담아오는 법, 에즈빌리지 프라고나르(Fragonard)

2026-07-21


b0475afb41aa4.jpg프라고나르에서


감각의 시대입니다. 숏폼 동영상이 바쁘게 들이붓는 이미지와 인공지능이 만든 음성 때문에 시각과 청각은 지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크린에서 떨어져 나와 소외된 감각에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미식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바다에 뛰어들고 숲의 공기를 마시며 촉각을 회복하는 일은 스크린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이라는 행위와 동의어입니다. 하지만 도시를 벗어나 새로운 감각을 깨울 틈조차 없을 때, 무엇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을까요. 오늘, 어디선가 느꼈던 그 향기. 일상 속에서 후각은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향기를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중소기업은 물론, 개인이나 작은 공방도 자신만의 향기를 만드는 시대입니다. 어느 카페 화장실의 핸드워시나 디퓨저 향에 반해 사진을 찍어두기도 하고, 호텔이나 쇼핑몰에 들어갈 때마다 느껴지는 향기에 ‘이 장소는 이 향기다’ 저도 모르는 새에 단단히 인식하기도 하지요. 조향사라는 직업이 주목을 받고, 향수 만들기가 취미 생활이 되기도 했습니다. 향기가 더 진하게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acb27b8c397c5.jpg프라고나르에서


사람이 스스로 향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일까요? 오늘날 향수의 조상은 액체가 아니라 나무와 수지를 태워 피운 ‘연기’였습니다. 신에게 복을 빌고 앞날을 묻는 제의에서 사제들이 연기로써 향기를 입고 예를 다했던 거지요. 이후 사람들은 식물과 수지 등을 기름에 우려 향유를 만들었고, 인간이 풍기는 냄새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아본 왕실과 귀족이 향유를 즐겨 쓰는 문화가 나타났습니다. 기원전 2천 년 전에 조성된 향료 시설도 발견되었다고 하니, 향기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굉장히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겁니다.


이후 중세 이슬람권 학자와 장인 들이 증류와 추출 기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고, 유럽 사람들이 ‘패션’으로서의 향수를 발달시켰습니다. 특히 남프랑스의 ‘그라스(Grasse)’는 프랑스 향수의 근원 같은 도시입니다. 파리가 향수를 패션과 욕망의 상품으로 만드는 동안, 그라스는 꽃을 기르고 향료를 추출하며 조향 기술을 축적했던 것입니다. 오늘 찾아갈 남프랑스 에즈빌리지의 프라고나르(Fragonard) 역시 그라스에 뿌리를 둔 브랜드입니다.


9d451f0c0918c.jpg3944965021873.jpg에즈빌리지에만 프라고나르 매장이 두 곳이 있으며, 오늘 찾아가는 곳은 '팩토리'입니다.


에즈빌리지의 프라고나르로 가다

프라고나르는 1926년 그라스에서 처음 문을 열었습니다. 19세기 후반 합성 향료가 개발되었고, 이를 통해 향수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합니다. 오직 자연에서만 얻을 수 있던 향기를 훨씬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며 향수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거죠. 지금도 프라고나르는 그라스에 공장 두 개를 두어 그 뿌리를 지켜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 에즈빌리지에 있는 프라고나르 공장도 향수와 화장품을 생산하고 있는데, 생산 시설만큼 넓은 매장도 있고, 직접 향수를 만들어 보는 워크숍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침 올해가 설립 100주년이라 그 어느 때보다 방문자가 많은 것 같더군요.


4510096066e28.jpg프라고나르 워크숍


투어가 시작되면 술 증류소에서 볼 수 있는 증류기가 먼저 나타납니다. 식물, 꽃, 과일 등에서 향을 추출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증류법이기 때문입니다. 물을 끓이면 증기가 식물 등 재료를 통과하면서 향기 분자를 가져가고, 그 증기를 다시 액화해서 모으면 에센셜 오일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문제. 장미 에센셜 오일 1리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장미가 몇 송이가 필요할까요? 무려 2톤이나 필요하다고 합니다. 쾌활하고 영어 발음 좋은 워크숍 가이드 ‘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은 플라워 오일 한 병을 만들기 위해 꽃밭 전체가 필요한” 겁니다. 꽃은 피었다 지니, 지기 전에 오일로 만들어 그 향을 더 오래 남기는 것이 낭만적인 일 같기도 하고 좀 경악스러운 일 같기도 하고 아리송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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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참가자들이 진지하게 향을 추리하고 있습니다.


저도 문제를 내긴 했지만, 워크숍이야 말로 질문의 연속이었습니다. 향료가 든 병의 냄새를 맡고 그게 어떤 향기인지 맞히는 게 사람에 따라서는 이번 워크숍에서 가장 고난도일 겁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평소 꽃향기를 많이 맡거나, 와인을 많이 마시거나, 요리를 많이 했던 사람일수록 정답을 맞힐 확률이 올라갔습니다. 그렇죠, 스크린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경험’이 이렇게나 중요한 겁니다. 실제로 조향사가 되려면 이런 향을 2천 개에서 1만 개는 기억해야 한다고 합니다. 1만 개라…. 세상에 향기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 걸까요? 향기와 향기가 섞여서 나는 향기까지 포함한 숫자일 거라고 애써 현실성을 부여해 봅니다.


f82a6628bd2b3.jpg꼭 실험실 같은 제품 제조 시설


나만의 향수 만들기

프라고나르의 역사를 듣고, 향수와 화장품 제조 공정을 간단히 견학하고 나면, 모두가 기다리던 향수 만들기 시간이 시작됩니다. 증류부터 시작하는 건 아니에요. 프라고나르는 매년 새로운 향을 발표하는데, 100주년을 맞은 올해의 향수 이름은 ‘그라스의 공기(L’Air de Grasse)’라고 합니다. 이 ‘그라스의 공기’를 구성하는 주요 에센셜 오일 3가지를 원하는 대로 배합하여 자신만의 향수를 만드는 시간입니다.


7ea023ea7d7cc.jpg향수 만들기 워크숍


향수는 흔히 탑, 미들(하트), 베이스 노트로 이루어진다고 하지요. 탑 노트는 향수를 뿌리자마자 맡을 수 있는 향기로 가장 휘발성이 큽니다. 10분에서 15분이면 피부 위에서 사라진다고 해요. 그다음으로 찾아오는 게 미들 노트인데, 좀 더 오래가고 ‘하트’라는 호칭처럼 향수의 중심이 됩니다. 향수 이름을 짓는다면 이 미들 노트를 기반으로 짓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베이스 노트는 가장 오래가는 향기인데, 흔히 말하는 ‘잔향’의 주인공입니다. 주로 우디, 바닐라, 머스크 등의 원료가 향수의 마지막을 책임집니다.


10e6cd901555a.jpg향을 맡고 떠올릴 때, 누구나 같은 표정을 짓게 되죠.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건 각각 탑, 미들, 베이스에 쓰이는 향수 세 병인데요, 탑에서는 시트러스한 만다린 향기가, 미들에서는 장미와 자스민, 복숭아와 청사과가 섞인 향기가, 마지막 베이스에는 화이트 머스크 향이 담겨 있습니다. 이걸 각 병의 스포이드로 한 방울씩 시향지에 떨어트려 세 향기가 균형을 맞출 때 어떤 향기가 나는지 확인한 후, 자신이 원하는 비율로 15ml짜리 공병을 채우면 됩니다. 더 플로럴하게 만들고 싶으면 미들을 더 넣고, 더 시트러스하고 여름답게 만들고 싶으면 탑을 더 넣고, 더 깊고 묵직한 향을 원하면 베이스를 더 넣는 식으로요.


사람마다 자신의 취향대로 세 개의 향료를 섞습니다. 저도 열심히 스포이드를 눌렀는데, 탑 2, 미들 1, 베이스 3의 비율로 섞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랬을 거예요. 섞다 보면 헷갈리기 시작하거든요. 그렇게 만들어진 향수는 물론 참가자들이 가져갑니다. 하루 이상은 놔둬야 제대로 향료가 섞인다고 하네요. 제가 만든 향수의 향기는, 좋았습니다. 이걸 ‘나만의 향수’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원료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에 어떻게 섞어도 좋은 향기가 나는 걸 거예요. 지금 이 글을 쓰며 향수를 다시 뿌려봅니다. 꽃향기가 훅 다가오는데 그 뒤로 훈훈한 머스크 향이 밀려오네요. 시트러스를 더 많이 섞었던 것 같은데 어디로 갔는지, 아무튼 프라고나르로 돌아가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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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지만 진지해지고, 예상보다 훨씬 즐거운 경험이 됩니다.


향기로 프라고나르를 기억하기

자신만의 향수를 만들고 나서는 프라고나르의 다양한 제품들을 구경하러 갑니다. 가장 인기가 있는 제품은 ‘금빛 병’에 들어 있는 향수입니다. 보통 향수는 유리병 안에 들어가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리가 부족해서 이렇게 금속 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루미늄이 빛과 습기로부터 향기를 보호해 준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용기를 예쁘게 금색으로 장식하고 나자 보기에도 좋고 향수의 수명도 더 길어졌습니다. 덕분에 ‘금빛 병’이 프라고나르의 상징이 되었다고 하네요.


908d80a2cb647.jpg프라고나르의 상징, 금빛 병 향수


향수뿐만 아니라 페이스크림, 보디로션, 샤워용품 등 다양한 뷰티 제품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매장 내에 향기가 꽉 차 있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아무래도 한 가지 향기가 공간을 압도해 다른 향을 지워버리지 않도록 배려한 듯합니다.


31640a408f160.jpg6c67ac4f4896e.jpg프라고나르의 매장


온갖 향기와 꽃무늬를 접하고 있으면 아, 이곳이 프랑스의 향수를 만드는 곳이구나 싶어집니다. 후각은 다른 감각보다 빨리 피로해지는 감각입니다. 고약한 냄새도 15분 정도 지나면 익숙해지지요. 좋은 향기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후각은 한편으로 기억에 관여를 많이 하는 감각이기도 합니다. 프루스트의 마들렌보다 옛 기억을 더 많이 떠올리게 하는 건 코끝을 스치는 냄새니까요. 프라고나르의 향수는 화려한 편이라 꽃밭을 내내 옆에 두고 산 분이 아니라면 옛 기억을 소환하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 프라고나르의 향기를 맡았을 때, 남프랑스의 어딘가가 떠오를 가능성은 높습니다. 우아하고 섬세한 사람과 공간, 기억이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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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협조 | 프랑스 관광청,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관광청
글·사진 |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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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를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litt.ly/ecrire_lire_vi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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