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하루 백억 개비 담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청주 연초제조창 낡은 공장 건물들과 굴뚝, 창고들, 참으로 거대한 부지다. 대학 동기 아버지가 이 근방에서 담배 농사를 지으셨는데, 연초로 되돌아온 자식 같은 농작물을 한 모금 빨라 머금고서, 공장 굴뚝을 올려다보면 든든하셨겠다. 그것도 참 오래 전 일이다. 공장 가동이 멈추고 담배 냄새가 빠져나가고도 한참, 그 빈 자리에 이제 물감 냄새, 종이 냄새, 커피 냄새가 대신 들어차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담배 공장은 미술관이 되고, 공예관이 되고, 도서관이 되고,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되었다. 식당도 있고 카페도 있고 옷가게까지 있다. 도서관 한 편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분들도 보이니, 얼추 이 안에서 의식주에 교육, 문화생활까지 해결되고 있는 거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 볼 게 많다는 이야기는 들은 지 꽤 되었다. 그게 청주에 가야 할 이유가 되는 사람이 해 준 이야기라 그는 절실했지만 나는 그런가보다 했더랬다. 아프리카 정치 뉴스 같았달까. 드문드문 끼어 있는 연휴, 실내에서 야외만큼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없을까 뒤적이다가 그림책 정원이란 곳을 보았고, 당연히 그림책이 많았고, 『여름이 온다』이수지 작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많은 작품을 본 건 아니지만, 그분이 정말 훌륭한 그림 작가이며, 글을 매우 잘 쓰시고, 그림 세계가 참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현대미술관이니, 박물관이니 하던 말들이 기다렸다는 듯 가까운 현실 뉴스로 다가오고, 지도로 몇 군데 장소를 엮어 보니 하루를 꽤 빡빡하게 채울 수 있을 듯했다. 물론 실내에서만.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시작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1946년 문을 연 연초제조창은 2004년 가동을 멈춘 뒤 14년을 폐허로 방치됐다가, 청주시가 이를 매입해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네 번째 분관을 열었다. 과천, 덕수궁, 서울관에 이어지는 곳이지만 이곳만의 정체성은 특별하다. 국내 최초의 수장고 미술관, 수장고 안으로 들어가 작품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아련하게 보았던 전시품은 미술품이 아니라 지나간 담배의 추억이었다. 엄청나게 심부름을 해댔지만, 성장기 내 주변에서 일어나던 모든 문제의 근원에 있었지만 한 번도 가까이해 본 적은 없는 연초.

아무리 땅을 함부로 써도 됐던 옛 공장이라 해도 이렇게 넓어도 되나 싶다. 천장도 어지간히 높아 어떤 대형 작품이든 다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큰 공간을 어찌 다 채우나 싶은데, 채우고도 남아 전시 없이 조용히 보관만 되는 작품방이 따로 있다. 항온항습 수장고의 유리벽 앞에 멈춰 서서 가만 간직된 작품을 보기도 하고, 트럭에 싣기라도 한 듯 그냥 열 맞춰 늘어놓은 조각 작품들 사이를 걷기도 한다. 그 작가들 면면이 권진규, 최종태, 정현. 국립의 위용이 이렇다.

문화제조창과 한국공예관
미술관을 나와 뒤편으로 돌아가면 누가 봐도 창고로 쓰였을 법한 기다란 건물들이 나란히 서 있다. 누가 봐도 창고라 실제로도 담배 공장에서 담뱃잎을 말리고 보관하던 창고다. 목공예 공방과 갤러리, 공연연습실, 생활문화센터까지 동마다 쓰임이 다른데, 이런저런 기관과 연계해 운영되는 듯하다. 어떻게 연계되어야 이런 공간 하나를 차지할 수 있을까, 청년 사업 대상은 진즉 지났으니 노년을 기다리면 그때야말로 뭔가 있으려나. 마당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은 일정하다. 커피, 빵 냄새가 나는 카페. LP를 들을 수 있는 음악 감상실이기도 하지만 점심 먹고 들른 직장인들 아니면, 창고 어딘가에서 작업을 하던 창작자들이다. 음악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부 창고. BANKSY 전시는 유료. 무료 전시가 많아 들어가지 않았다.
문화제조창 본관 건물로 들어서면 한국공예관이 나온다. 국내 유일의 공예 전문 미술관이자, 1999년부터 이어 온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주 전시장이다. 유리, 도자기, 칠기, 섬유, 염색까지, 사람의 손이 많이 타야 나올 수 있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작품도 전시 주제도 거대하고 풍부하다. 관람하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림책정원 1937
국가등록문화유산 55호로 지정된 옛 충청북도청 본관, 1937년에 지어진 이 건물에는 그림책정원 1937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계단을 가운데 두고 벽돌로 감싸인 기나긴 복도가 서가로 이어지고 중간중간 액자처럼 그림책이 놓여 있다. 3층 규모 건물 안에는 1만 4천 권의 그림책이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고, 그중 2천4백 권은 팝업북이다. 책장 사이를 걷고 있으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 한 곳만으로 하루가 부족하겠구나. 순천 어린이 도서관에서 그랬다. 만화방에 온 손님처럼 그림책을 탐욕스럽게 쌓아두고 휙휙 넘기다 보니 약속된 밥 시간이었다. 그때 만난 작가가 매일매일 열렬하게 SNS 하트를 누르고 있는 라울 니에토 구리디다. 『어떻게 여행 가방에 고래를 넣을까』, 어떻게 이 책을 표절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잠재적 범죄 하나를 끼고 산다.
이제 본래의 목적,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받은 이수지 작가의 기획전 <빛나는 아이들, 이수지의 그림책>에 집중할 때. 첫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시작해 글자 없는 그림책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 대표작 『여름이 온다』, 가수 루시드 폴의 노랫말에 맞춰 그려진 『물이 되는 꿈』, 까만 강아지 『강이』 이야기. 한 걸음 한 걸음 작가의 동화 속을 거닐고 머문다. 목적에 부합하도록 집중하다 보니 사진을 찍지 못했다. 『여름이 온다』 원화 앞에 서면 그림책을 손에 들고 읽을 때와는 다른 크기의 감정이 밀려온다. 아주 크고, 뜨겁고 세차게 여름이 왔다. 할 일 없이 선풍기나 안고 있던 여름방학의 날들이 아련하게, 거센 소나기처럼 빠르게 나를 지나쳐 간다.

그림책정원 마당 이수지 작가 『여름이 온다』 조형물
전시장 세 곳을 다 둘러보고 나니 어느새 해가 기울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저녁을 먹기로 한다. 청주에 왔으니 짜글이도 있고, 간장 물에 찍어 굽는 청주식 삼겹살도 있고, 청주 사람들만 당연하게 생각하는 고추만두도 있다. 그림책정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60년 된 메밀집으로 간다. 몇 해 전 백년가게 취재를 다니던 시절 인터뷰를 하려고 준비만 해 두었던 노포이다. 시원한 메밀국수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메밀 우동도 먹어봐야 하지 않겠냐는 마땅한 생각이 강렬했지만, 대담하지 못한 위 크기 탓에 다음에 다시 오자, 하나마나한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그게 또 그렇게 하나마나한 것만은 아닌 것이,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지를 찍어낸 고장답게 고인쇄박물관과 현대인쇄전시관이 있고, 청주시립미술관과 국립청주박물관이 있다. 버스 버전 피렌체에 간다 생각하면 청주에서 빠듯한 이틀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때에는 삼겹살 거리도, 청주의 자랑 로랜드치킨호프도 꼭 가보리라. 이수지 작가 전시가 끝나는 11월이 오기 전에 꼭 다시 와서 그때에는 찍어만 두고 보지 않을 사진이라도 몇 장 찍고 가리라.
글 · 사진 | 이주호

브릭스 매거진의 편집장.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사뿐사뿐, 노자네 집까지』 등을 쓰며 맥주를 마셨다.
한때 하루 백억 개비 담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청주 연초제조창 낡은 공장 건물들과 굴뚝, 창고들, 참으로 거대한 부지다. 대학 동기 아버지가 이 근방에서 담배 농사를 지으셨는데, 연초로 되돌아온 자식 같은 농작물을 한 모금 빨라 머금고서, 공장 굴뚝을 올려다보면 든든하셨겠다. 그것도 참 오래 전 일이다. 공장 가동이 멈추고 담배 냄새가 빠져나가고도 한참, 그 빈 자리에 이제 물감 냄새, 종이 냄새, 커피 냄새가 대신 들어차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담배 공장은 미술관이 되고, 공예관이 되고, 도서관이 되고,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되었다. 식당도 있고 카페도 있고 옷가게까지 있다. 도서관 한 편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분들도 보이니, 얼추 이 안에서 의식주에 교육, 문화생활까지 해결되고 있는 거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 볼 게 많다는 이야기는 들은 지 꽤 되었다. 그게 청주에 가야 할 이유가 되는 사람이 해 준 이야기라 그는 절실했지만 나는 그런가보다 했더랬다. 아프리카 정치 뉴스 같았달까. 드문드문 끼어 있는 연휴, 실내에서 야외만큼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없을까 뒤적이다가 그림책 정원이란 곳을 보았고, 당연히 그림책이 많았고, 『여름이 온다』이수지 작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많은 작품을 본 건 아니지만, 그분이 정말 훌륭한 그림 작가이며, 글을 매우 잘 쓰시고, 그림 세계가 참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현대미술관이니, 박물관이니 하던 말들이 기다렸다는 듯 가까운 현실 뉴스로 다가오고, 지도로 몇 군데 장소를 엮어 보니 하루를 꽤 빡빡하게 채울 수 있을 듯했다. 물론 실내에서만.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시작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1946년 문을 연 연초제조창은 2004년 가동을 멈춘 뒤 14년을 폐허로 방치됐다가, 청주시가 이를 매입해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네 번째 분관을 열었다. 과천, 덕수궁, 서울관에 이어지는 곳이지만 이곳만의 정체성은 특별하다. 국내 최초의 수장고 미술관, 수장고 안으로 들어가 작품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아련하게 보았던 전시품은 미술품이 아니라 지나간 담배의 추억이었다. 엄청나게 심부름을 해댔지만, 성장기 내 주변에서 일어나던 모든 문제의 근원에 있었지만 한 번도 가까이해 본 적은 없는 연초.
아무리 땅을 함부로 써도 됐던 옛 공장이라 해도 이렇게 넓어도 되나 싶다. 천장도 어지간히 높아 어떤 대형 작품이든 다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큰 공간을 어찌 다 채우나 싶은데, 채우고도 남아 전시 없이 조용히 보관만 되는 작품방이 따로 있다. 항온항습 수장고의 유리벽 앞에 멈춰 서서 가만 간직된 작품을 보기도 하고, 트럭에 싣기라도 한 듯 그냥 열 맞춰 늘어놓은 조각 작품들 사이를 걷기도 한다. 그 작가들 면면이 권진규, 최종태, 정현. 국립의 위용이 이렇다.
문화제조창과 한국공예관
미술관을 나와 뒤편으로 돌아가면 누가 봐도 창고로 쓰였을 법한 기다란 건물들이 나란히 서 있다. 누가 봐도 창고라 실제로도 담배 공장에서 담뱃잎을 말리고 보관하던 창고다. 목공예 공방과 갤러리, 공연연습실, 생활문화센터까지 동마다 쓰임이 다른데, 이런저런 기관과 연계해 운영되는 듯하다. 어떻게 연계되어야 이런 공간 하나를 차지할 수 있을까, 청년 사업 대상은 진즉 지났으니 노년을 기다리면 그때야말로 뭔가 있으려나. 마당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은 일정하다. 커피, 빵 냄새가 나는 카페. LP를 들을 수 있는 음악 감상실이기도 하지만 점심 먹고 들른 직장인들 아니면, 창고 어딘가에서 작업을 하던 창작자들이다. 음악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부 창고. BANKSY 전시는 유료. 무료 전시가 많아 들어가지 않았다.
문화제조창 본관 건물로 들어서면 한국공예관이 나온다. 국내 유일의 공예 전문 미술관이자, 1999년부터 이어 온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주 전시장이다. 유리, 도자기, 칠기, 섬유, 염색까지, 사람의 손이 많이 타야 나올 수 있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작품도 전시 주제도 거대하고 풍부하다. 관람하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림책정원 1937
국가등록문화유산 55호로 지정된 옛 충청북도청 본관, 1937년에 지어진 이 건물에는 그림책정원 1937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계단을 가운데 두고 벽돌로 감싸인 기나긴 복도가 서가로 이어지고 중간중간 액자처럼 그림책이 놓여 있다. 3층 규모 건물 안에는 1만 4천 권의 그림책이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고, 그중 2천4백 권은 팝업북이다. 책장 사이를 걷고 있으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 한 곳만으로 하루가 부족하겠구나. 순천 어린이 도서관에서 그랬다. 만화방에 온 손님처럼 그림책을 탐욕스럽게 쌓아두고 휙휙 넘기다 보니 약속된 밥 시간이었다. 그때 만난 작가가 매일매일 열렬하게 SNS 하트를 누르고 있는 라울 니에토 구리디다. 『어떻게 여행 가방에 고래를 넣을까』, 어떻게 이 책을 표절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잠재적 범죄 하나를 끼고 산다.
이제 본래의 목적,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받은 이수지 작가의 기획전 <빛나는 아이들, 이수지의 그림책>에 집중할 때. 첫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시작해 글자 없는 그림책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 대표작 『여름이 온다』, 가수 루시드 폴의 노랫말에 맞춰 그려진 『물이 되는 꿈』, 까만 강아지 『강이』 이야기. 한 걸음 한 걸음 작가의 동화 속을 거닐고 머문다. 목적에 부합하도록 집중하다 보니 사진을 찍지 못했다. 『여름이 온다』 원화 앞에 서면 그림책을 손에 들고 읽을 때와는 다른 크기의 감정이 밀려온다. 아주 크고, 뜨겁고 세차게 여름이 왔다. 할 일 없이 선풍기나 안고 있던 여름방학의 날들이 아련하게, 거센 소나기처럼 빠르게 나를 지나쳐 간다.
그림책정원 마당 이수지 작가 『여름이 온다』 조형물
전시장 세 곳을 다 둘러보고 나니 어느새 해가 기울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저녁을 먹기로 한다. 청주에 왔으니 짜글이도 있고, 간장 물에 찍어 굽는 청주식 삼겹살도 있고, 청주 사람들만 당연하게 생각하는 고추만두도 있다. 그림책정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60년 된 메밀집으로 간다. 몇 해 전 백년가게 취재를 다니던 시절 인터뷰를 하려고 준비만 해 두었던 노포이다. 시원한 메밀국수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메밀 우동도 먹어봐야 하지 않겠냐는 마땅한 생각이 강렬했지만, 대담하지 못한 위 크기 탓에 다음에 다시 오자, 하나마나한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그게 또 그렇게 하나마나한 것만은 아닌 것이,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지를 찍어낸 고장답게 고인쇄박물관과 현대인쇄전시관이 있고, 청주시립미술관과 국립청주박물관이 있다. 버스 버전 피렌체에 간다 생각하면 청주에서 빠듯한 이틀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때에는 삼겹살 거리도, 청주의 자랑 로랜드치킨호프도 꼭 가보리라. 이수지 작가 전시가 끝나는 11월이 오기 전에 꼭 다시 와서 그때에는 찍어만 두고 보지 않을 사진이라도 몇 장 찍고 가리라.
글 · 사진 | 이주호
브릭스 매거진의 편집장.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사뿐사뿐, 노자네 집까지』 등을 쓰며 맥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