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세보 버스 터미널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면, 바야흐로, 노래를 들을 시간입니다. 영국 록 밴드 크림Cream이 1967년에 부른 노래 〈Sunshine of Your Love〉. 에릭 클랩튼이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을 보고 난 여운에 휩싸여 만들었다는 기타 리프가 시작되면 “I'll be with you, when the stars start falling”, 직설적인 사랑 노랫말이 살포시 손잡고 따라갑니다.
영화 〈69 식스티 나인〉은 사세보항 미 해군 기지 철조망 앞에 시작됩니다. 1969년, 68혁명의 그림자가 아직 짙고, 원자력 항공 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사세보에 입항하였고, 베트남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베트남으로 떠날 미 군함들이 속속 사세보로 모여들던 때입니다.
사세보항
소년의 이름은 겐, 마음속에 혁명이 끓어오릅니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기성 권위에 저항하며 두 손을 동그랗게 쥐고 불끈 일어났던 혁명의 해, 1968년. 존 레넌, 성 소수자, 유색인, 파워 투 더 피플, 상상력에 권력을, 우드스톡, 금지를 금지하라! 그 기세가 무색하게 투쟁은 급격히 갈 길을 잃어 소년들은 정치적 거리감과 무료함, 개인주의, 허무주의로 몰려갑니다. 더 이상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가 불분명해진 시대, 분명하게 질주하고 싶은 청춘들은 허망을 향해, 자본 축적을 향해 무섭게 역주행합니다.
겐은 지금 당장 혁명을 해야 합니다. 데모에 참가하는 사람이 좋아, 얼핏, 학교에서 가장 예쁜 레이디 제인이 말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뭔가 찜찜한 것 같지만, 뭐 어때, 누군가를 죽이는 일도 아닌데. 레이디 제인은 결코 매스 게임 따위로 구속받기 위해 태어난 소녀가 아니라고. 그녀를 위해, 바야흐로 혁명!
영화 〈69 식스티 나인〉
인구 4,000명 어촌 마을 사세보는 1889년 해군 부대가 들어서며 오키나와, 조선, 대만을 관할하는 군항이 됩니다. 청일 전쟁의 물자 공급 기지, 러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해군 기지. 패전 이후에는 미 해군과 해병, 항공대가 진주하며 1950년 한국 전쟁과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을 수행했지요. 전쟁 특수로 성장한 동네이다 보니 소년 겐의 말대로 얼마 안 되는 평지에는 미군과 미군에게 서비스하는 사람만 살고 나머지 80퍼센트 인구는 가파른 언덕에 마을을 일구었습니다.
사세보항
탄광, 어항으로 거듭나 보려 애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지역 경제가 미군이 쓰는 돈에 크게 기울어져 있다는 지표를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겐의 친구 아다마가 사는 탄광촌 사람들에게 폐광은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이었고, 사세보항 내 수역 80%가 미군 우선이라 일본 선박이 애쓰는 경제적 도모라 봐야 고작 미군 하루 술값에도 못 미쳤지요. ‘이렇게 된 바에’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모든 시도를 뒤로 하고 사세보는 도시 슬로건으로 군함을 내겁니다. 그리고 하나 더, 미군에게 요리법을 배운 햄버거, 사세보 버거.
* * *
사세보까지는 후쿠오카 공항에서 버스로 두 시간. 터미널에서 길 건너 사세보 역사를 그대로 통과하면 사세보항입니다. 항구를 둘러싸고 쇼핑몰, 사세보 여객 터미널, 공원이 있고, 저 건너로 미군 기지가 보입니다.
미군 부대 정문으로 들어가는 도로
반대편 입구로 나가면 힘에 부쳐 보이는 경사를 따라 멀리까지 주거지가 이어지고, 항구와 언덕 사이 얼마 안 되는 평지에 번화가가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사루쿠시티403 아케이드를 걸으면 사세보 시내의 3분의 1을 본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케이드 곁길을 따라 온갖 술집들이 있고, 3분의 2지점쯤에는 미군 바들이 모여 있습니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음침은 전혀, 각 나라, 각 지방에서 온 활짝 열린 마음들이 혀가 느슨해질 때까지 평화를 되풀이하는 곳입니다.
사세보역
히데 짱의 가쿠우치
사세보에 왔으니 첫 끼는 햄버거입니다. 사세보 버거는 미군에게 요리법을 배운 누군가가 해군 기지 근처에서 가게를 열며 시작됐다고 하는데, 한국의 부대찌개와 달리 어느 가게가 시초인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구도 원조를 주장하지 않아 평화로운 주방에서 저마다의 햄버거를 요리조리 만들었겠구나 싶겠지만, 그래도 사세보 버거라는 이름까지 달았는데 지역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없을 수가 없지요. 2007년부터 사세보시 보건 당국에서 사세보 버거 인증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26개 업체가 인증을 받았고, 제가 가려는 곳은 그중 빅맨 버거 본점입니다. 히카리, 로그킷, 유명한 곳들이 많지만, 사세보 무사 도착 기념주를 마시던 ‘히데 짱의 가쿠우치角打’라는 서서 마시는 주점에서 빅맨이 가장 가까웠습니다.
빅맨 버거 본점
개업은 1970년, 달걀프라이는 보편을 향한, 혓바닥처럼 비죽 나온 베이컨은 압도적 인상을 향한 구성인 듯합니다. 칼은 요구해 봤자 따로 주지 않습니다. 느끼함을 줄이려고 어쩔 수 없이 맥주 한 병을 옆에 두고, 탐욕스럽게 보이길 삼가며 기다란 고깃덩어리를 앞니로 토막 냅니다. 자, 이제 두 번째 버거를, 하는 호탕한 기상은 없습니다. 소년 겐이 살던 오르막 동네 꼭대기까지 올라 항구를 내려다볼 생각입니다.
빅맨 버거
인증받은 사세보 버거 가게를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가게 앞에 햄버거 캐릭터가 세워져 있는지 보면 됩니다. 이 캐릭터는 호빵맨의 작가 야나세 다카시의 작품입니다. 2003년 사세보시에서 야나세 다카시에게 호빵맨에 등장하는 햄버거 키드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는지 물었고, 호탕한 야나세 씨가 기왕이면 새로 그리자고 하여 버거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햄버거 키드는 카우보이 복장이지만 버거 소년은 사세보 지역 특성을 살려 선원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사세보 버거 보이, 시민 공모로 지은 이름입니다.
선원복을 입은 사세보 버거 보이
빅맨 버거 지점
터널 요코초 베이스트리트 버거
히카리 버거
버거 군 사진. 이렇게 요리사 복장을 하고 있으면 사세보 버거 보이가 아닙니다. 머리에 버거 군이라 쓰여 있네요.
사세보에는 전쟁의 잔재가 생활공간 속에 여직 남아 있습니다. 가령 터널 요코초라는 곳이 있습니다. 1945년 미군 공습을 피하려고 산 경사면에 파 놓은 방공호가 전후 상점으로 이용되다가 옆으로 새 가게들이 줄을 이으며 시장이 된 곳입니다. 카페, 주점도 있고, 햄버거 가게도 있지만 취급하는 주 식재료들이 다루기에 난이도가 있어 보이는 전통 시장입니다.
터널 요코초
사세보 버거 보이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인 전쟁의 잔재이지만, 악인 없는 호빵맨 세상을 거쳐 사세보의 시간에 가장 큰 재미를 주는 상냥한 소년이 되었습니다. 세균맨이 악당 역할을 하지만 호빵도 효모라는 균이 있어야 완성될 수 있지요. 다툼이 없는 세상이 불가능하다면 다툼마저 인간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인정해 보자, 싫어서 외면할 수는 있지만 죽이지는 말자. 그것이 호빵맨 할아버지 야나세 다카시의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햄버거를 베어 무는 잠시 동안은 허다한 다툼들을 베이컨 기름 장막 뒤에 가만 놓아두는 거지요.
아침 7시의 사세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허망에 처져 갈 때 라디오 방송에서 매일 〈호빵맨 행진곡〉을 틀어 주었다 합니다. “무엇을 위해 태어나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모르겠다는 대답은 정말 싫어, 살아가는 기쁨, 마음속 상처가 아프더라도, 아아, 호빵맨 상냥한 너는, 가라, 모두의 꿈을 지키기 위해.” 호빵맨 세상 속 맨, 보이, 소년들이 손을 둥글게 쥐고 불끈 일어나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때 그들이 그럴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도 그럴 거야, 동글동글 손을 말아 햄버거를 움켜쥡니다.
〈호빵맨 행진곡〉
정치 따위는 아무렴 어때, 재미있으면 그걸로 됐잖아. 연애 혁명을 완수한 소년 겐의 다음 전략은 페스티벌입니다. 축제 안에서 온갖 보이, 소년, 소녀가 뒤엉킬 것입니다. 미국인이기도 하고, 미국과 일본, 한국과 미국, 한국과 일본의 혼혈이기도 한 소년, 보이들은 비록 전쟁 공간 사세보에서 태어났지만 순수와 원조를 주장하지 않는 혼종의 결정체라 더 완전해 보입니다. 어떤 세상 사람들은 햄버거를 정크라고 합니다. 부대찌개를 부끄러운 역사라고도 하더군요. 하지만 소년과 보이가 둥근 손 맞대고 살아갈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느끼며 꿈을 이어가는 데는 버거 보이만큼 상냥한 친구도 없습니다.
글·사진 | 이주호
브릭스 매거진의 편집장.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 『노자가 사는 집』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등을 썼다.
사세보 버스 터미널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면, 바야흐로, 노래를 들을 시간입니다. 영국 록 밴드 크림Cream이 1967년에 부른 노래 〈Sunshine of Your Love〉. 에릭 클랩튼이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을 보고 난 여운에 휩싸여 만들었다는 기타 리프가 시작되면 “I'll be with you, when the stars start falling”, 직설적인 사랑 노랫말이 살포시 손잡고 따라갑니다.
영화 〈69 식스티 나인〉은 사세보항 미 해군 기지 철조망 앞에 시작됩니다. 1969년, 68혁명의 그림자가 아직 짙고, 원자력 항공 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사세보에 입항하였고, 베트남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베트남으로 떠날 미 군함들이 속속 사세보로 모여들던 때입니다.
사세보항
소년의 이름은 겐, 마음속에 혁명이 끓어오릅니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기성 권위에 저항하며 두 손을 동그랗게 쥐고 불끈 일어났던 혁명의 해, 1968년. 존 레넌, 성 소수자, 유색인, 파워 투 더 피플, 상상력에 권력을, 우드스톡, 금지를 금지하라! 그 기세가 무색하게 투쟁은 급격히 갈 길을 잃어 소년들은 정치적 거리감과 무료함, 개인주의, 허무주의로 몰려갑니다. 더 이상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가 불분명해진 시대, 분명하게 질주하고 싶은 청춘들은 허망을 향해, 자본 축적을 향해 무섭게 역주행합니다.
겐은 지금 당장 혁명을 해야 합니다. 데모에 참가하는 사람이 좋아, 얼핏, 학교에서 가장 예쁜 레이디 제인이 말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뭔가 찜찜한 것 같지만, 뭐 어때, 누군가를 죽이는 일도 아닌데. 레이디 제인은 결코 매스 게임 따위로 구속받기 위해 태어난 소녀가 아니라고. 그녀를 위해, 바야흐로 혁명!
인구 4,000명 어촌 마을 사세보는 1889년 해군 부대가 들어서며 오키나와, 조선, 대만을 관할하는 군항이 됩니다. 청일 전쟁의 물자 공급 기지, 러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해군 기지. 패전 이후에는 미 해군과 해병, 항공대가 진주하며 1950년 한국 전쟁과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을 수행했지요. 전쟁 특수로 성장한 동네이다 보니 소년 겐의 말대로 얼마 안 되는 평지에는 미군과 미군에게 서비스하는 사람만 살고 나머지 80퍼센트 인구는 가파른 언덕에 마을을 일구었습니다.
탄광, 어항으로 거듭나 보려 애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지역 경제가 미군이 쓰는 돈에 크게 기울어져 있다는 지표를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겐의 친구 아다마가 사는 탄광촌 사람들에게 폐광은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이었고, 사세보항 내 수역 80%가 미군 우선이라 일본 선박이 애쓰는 경제적 도모라 봐야 고작 미군 하루 술값에도 못 미쳤지요. ‘이렇게 된 바에’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모든 시도를 뒤로 하고 사세보는 도시 슬로건으로 군함을 내겁니다. 그리고 하나 더, 미군에게 요리법을 배운 햄버거, 사세보 버거.
* * *
사세보까지는 후쿠오카 공항에서 버스로 두 시간. 터미널에서 길 건너 사세보 역사를 그대로 통과하면 사세보항입니다. 항구를 둘러싸고 쇼핑몰, 사세보 여객 터미널, 공원이 있고, 저 건너로 미군 기지가 보입니다.
반대편 입구로 나가면 힘에 부쳐 보이는 경사를 따라 멀리까지 주거지가 이어지고, 항구와 언덕 사이 얼마 안 되는 평지에 번화가가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사루쿠시티403 아케이드를 걸으면 사세보 시내의 3분의 1을 본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케이드 곁길을 따라 온갖 술집들이 있고, 3분의 2지점쯤에는 미군 바들이 모여 있습니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음침은 전혀, 각 나라, 각 지방에서 온 활짝 열린 마음들이 혀가 느슨해질 때까지 평화를 되풀이하는 곳입니다.
사세보에 왔으니 첫 끼는 햄버거입니다. 사세보 버거는 미군에게 요리법을 배운 누군가가 해군 기지 근처에서 가게를 열며 시작됐다고 하는데, 한국의 부대찌개와 달리 어느 가게가 시초인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구도 원조를 주장하지 않아 평화로운 주방에서 저마다의 햄버거를 요리조리 만들었겠구나 싶겠지만, 그래도 사세보 버거라는 이름까지 달았는데 지역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없을 수가 없지요. 2007년부터 사세보시 보건 당국에서 사세보 버거 인증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26개 업체가 인증을 받았고, 제가 가려는 곳은 그중 빅맨 버거 본점입니다. 히카리, 로그킷, 유명한 곳들이 많지만, 사세보 무사 도착 기념주를 마시던 ‘히데 짱의 가쿠우치角打’라는 서서 마시는 주점에서 빅맨이 가장 가까웠습니다.
개업은 1970년, 달걀프라이는 보편을 향한, 혓바닥처럼 비죽 나온 베이컨은 압도적 인상을 향한 구성인 듯합니다. 칼은 요구해 봤자 따로 주지 않습니다. 느끼함을 줄이려고 어쩔 수 없이 맥주 한 병을 옆에 두고, 탐욕스럽게 보이길 삼가며 기다란 고깃덩어리를 앞니로 토막 냅니다. 자, 이제 두 번째 버거를, 하는 호탕한 기상은 없습니다. 소년 겐이 살던 오르막 동네 꼭대기까지 올라 항구를 내려다볼 생각입니다.
인증받은 사세보 버거 가게를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가게 앞에 햄버거 캐릭터가 세워져 있는지 보면 됩니다. 이 캐릭터는 호빵맨의 작가 야나세 다카시의 작품입니다. 2003년 사세보시에서 야나세 다카시에게 호빵맨에 등장하는 햄버거 키드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는지 물었고, 호탕한 야나세 씨가 기왕이면 새로 그리자고 하여 버거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햄버거 키드는 카우보이 복장이지만 버거 소년은 사세보 지역 특성을 살려 선원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사세보 버거 보이, 시민 공모로 지은 이름입니다.
빅맨 버거 지점
버거 군 사진. 이렇게 요리사 복장을 하고 있으면 사세보 버거 보이가 아닙니다. 머리에 버거 군이라 쓰여 있네요.
사세보에는 전쟁의 잔재가 생활공간 속에 여직 남아 있습니다. 가령 터널 요코초라는 곳이 있습니다. 1945년 미군 공습을 피하려고 산 경사면에 파 놓은 방공호가 전후 상점으로 이용되다가 옆으로 새 가게들이 줄을 이으며 시장이 된 곳입니다. 카페, 주점도 있고, 햄버거 가게도 있지만 취급하는 주 식재료들이 다루기에 난이도가 있어 보이는 전통 시장입니다.
사세보 버거 보이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인 전쟁의 잔재이지만, 악인 없는 호빵맨 세상을 거쳐 사세보의 시간에 가장 큰 재미를 주는 상냥한 소년이 되었습니다. 세균맨이 악당 역할을 하지만 호빵도 효모라는 균이 있어야 완성될 수 있지요. 다툼이 없는 세상이 불가능하다면 다툼마저 인간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인정해 보자, 싫어서 외면할 수는 있지만 죽이지는 말자. 그것이 호빵맨 할아버지 야나세 다카시의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햄버거를 베어 무는 잠시 동안은 허다한 다툼들을 베이컨 기름 장막 뒤에 가만 놓아두는 거지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허망에 처져 갈 때 라디오 방송에서 매일 〈호빵맨 행진곡〉을 틀어 주었다 합니다. “무엇을 위해 태어나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모르겠다는 대답은 정말 싫어, 살아가는 기쁨, 마음속 상처가 아프더라도, 아아, 호빵맨 상냥한 너는, 가라, 모두의 꿈을 지키기 위해.” 호빵맨 세상 속 맨, 보이, 소년들이 손을 둥글게 쥐고 불끈 일어나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때 그들이 그럴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도 그럴 거야, 동글동글 손을 말아 햄버거를 움켜쥡니다.
〈호빵맨 행진곡〉
정치 따위는 아무렴 어때, 재미있으면 그걸로 됐잖아. 연애 혁명을 완수한 소년 겐의 다음 전략은 페스티벌입니다. 축제 안에서 온갖 보이, 소년, 소녀가 뒤엉킬 것입니다. 미국인이기도 하고, 미국과 일본, 한국과 미국, 한국과 일본의 혼혈이기도 한 소년, 보이들은 비록 전쟁 공간 사세보에서 태어났지만 순수와 원조를 주장하지 않는 혼종의 결정체라 더 완전해 보입니다. 어떤 세상 사람들은 햄버거를 정크라고 합니다. 부대찌개를 부끄러운 역사라고도 하더군요. 하지만 소년과 보이가 둥근 손 맞대고 살아갈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느끼며 꿈을 이어가는 데는 버거 보이만큼 상냥한 친구도 없습니다.
글·사진 | 이주호
브릭스 매거진의 편집장.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 『노자가 사는 집』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