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튀르키예의 땅에 이토록 다양한 문명이 있었다 -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

2026-01-20


히타이트 제국의 흔적을 좇아서 #1


튀르키예에 가게 된다면 내가 여행할 도시는 당연히 이스탄불일 줄 알았다. 막연한 예감이 틀렸다고만은 볼 수 없었다. 목적지로 가는 길에 이스탄불 공항을 거쳐야 했으니까. 터키항공의 편안한 좌석에 앉아 어릴 적 상상 친구에 관한 영화를 봤다. 영화가 너무 미적지근해서 상상력이 오히려 제한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지금껏 상상해 왔던 이스탄불을 현실의 이스탄불에 겹쳐볼 기회가 없는 탓에 그 무엇도 상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를 터키항공에 태운 튀르키예 관광청의 배려에는 뚜렷한 동기가 있었다. 튀르키예라는 나라와 동일어나 다름없는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히타이트라는 고대 문명이 있었다.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들어본 이름이다. ‘철의 제국’이었지? 그 외에 건질 만한 기억은 없었다. 이스탄불의 코끝만 잠깐 보고 다시 앙카라로 날아가야 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히타이트 문명의 흔적을 더듬는 여행은 튀르키예의 수도로부터 시작될 터였다.


b19223757dea9.jpg튀르키예로 가는 길


2018년 말 문을 열고, 2019년 4월에 아타튀르크 공항의 정기 여객편이 본격적으로 옮겨오며 본격적으로 가동을 시작한 이스탄불 공항은 유럽에서 이용객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공항답게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직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터미널, 곳곳에 놓인 대기 의자와 충전 스테이션, 허기지고 목마른 사람들을 위한 간이식당 전부 현대 공항이 지향하는 이미지 그대로였다. 바닥도 오스만 카펫이나 투르크 도자기의 문양을 기대했던 사람에게는 다소 단조롭게 보일 수 있는 무채색 타일로 채워져 있었다. 여기가 이스탄불이라든가, 하다못해 튀르키예라고 분별할 만한 특이점은 없었다. 라틴 알파벳을 차용한 튀르키예어를 읽어보려 하자 입 밖으로 전혀 생소한 단어들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하지만 어리둥절한 첫 만남은 사소한 문제였다. 이 나라를 제대로 알아가기도 전에 3500년 전 존재했던 고대 문명과 잇따른 만남을 가져야 할 판이었다. 약간 버겁다는 심정으로 앙카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승무원이 기내식에 곁들여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튀르키예식 요거트인 아이란을 부탁하자 승무원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가 그들의 식문화에 관심 있는 여행자로 보였던 모양이다. 사실 의도한 바였고, 진심이기도 했다. 아이란은 먹어 오던 플레인 요거트보다 씁쓸하고 단맛도 더 적었지만, 적당한 쿰쿰함이 실크처럼 입안을 감싸는 매력이 있었다. 상상만 해 오던 맛이 바로 이거였네. 한잔을 비워갈수록 아쉬움도, 부담감도 줄어들었다. 앞으로의 일정에 그 어떤 대비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모든 만남이 다 이 아이란 같을지 몰랐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이스탄불 공항


이 땅에 이토록 다양한 문명이 있었다 -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


히타이트는 기원전 17세기에서 기원전 12세기경까지 약 500년간 아나톨리아 반도에 뿌리를 내렸던 나라다. ‘기원전’이란 단어를 보자마자 하품이 나오려나? 고대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와 동시대를 걸었던 문명이라고 한다면 그나마 호기심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존속 기간은 고대 이집트나 아시리아에 비하면 하릴없이 짧았지만, 그 유명한 람세스 2세와 맞붙어 밀리지 않았을 정도로 히타이트의 국력은 막강했다. 함무라비 왕이 번성시켰던 바빌론 제1왕조(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장본인도 히타이트였다.


그러나 불과 12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히타이트는 비밀에 싸인 나라였다. 의외로 아주 유명한 책에 등장하긴 하는데, 바로 구약성서다. 히타이트는 구약에서 ‘헷’이라는 나라로 언급되며 몇몇 이곳 출신 인물들도 무대 위에 오른다. 주인공들은 따로 있다 보니 존재감이 뚜렷하진 않은데, 그중 유독 불운한 인물은 다윗 왕이 그 아내를 탐내 전쟁터로 보내 죽도록 만든 헷 사람 ‘우리야’일 것이다. 다만 다윗의 시대는 이미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이후이기 때문에 이때의 ‘헷’은 후기 히타이트 왕국 중 하나일 것으로 여겨진다.


61e89fc8ebd7a.jpg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


학자들의 발굴 버킷리스트에만 존재하던 이 전설 같은 나라는 1906년 ‘하투샤’에서 대량의 점토판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유물들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Anadolu Medeniyetleri Müzesi)이다. 튀르키예에서의 첫 아침을 박물관과 함께 맞이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미지의 고대 문명과 친해지려면 역시 그 흔적을 눈으로 보는 절차가 필요했다.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앙카라 성으로 이어진 고갯길 중턱에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이 있다. 정원에는 올리브유를 만들던 거대한 토기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석상이 아침 이슬을 맞으며 무심하게 서 있고, 박물관은 오스만 시대에 여관과 베데스텐(천정이 있는 옥내 시장)이었던 건물 외관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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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 정문과 마흐무트 파샤의 베데스텐이었던 옛 모습(ⓒSALTOnline)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시선을 사로잡은 장면은 따로 있었다. 담배를 피우며 작품을 감상하는 어느 나이 지긋한 여인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박물관 정원에서 흡연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아침잠이 싹 달아났다. 튀르키예에 관해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알게 된 기분이었다. ‘이토록 흡연이 자유로운 나라랍니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 정원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석조물의 홀’이 나타난다. 석조물의 홀 안에는 히타이트와 후기 히타이트 시기에 제작된 온갖 부조, 석상, 점토판이 놓여 있는데, 옛 시장 건물이 남긴 거대한 돔과 돌 아치에 절묘하게 녹아들었다. 신과 왕, 말과 사자, 전사와 히타이트 시대 최고의 무기였던 전차가 돌 밖으로 뛰쳐나올 기세였다. 도대체 이런 기막힌 돌덩어리들을 남겨놓고 홀연히 사라진 히타이트는 어떤 나라였을까?


20175b08bbe16.jpg석조물의 홀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아나톨리아 중부 ‘하티’라는 나라에 ‘하티인’들이 살았다. 이들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독자적인 언어를 쓰는 민족이었다. 어느 날, 전혀 다른 말(네샤어)을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 본인들이 하티의 새로운 지배자라고 선포했다. 새 지배층은 나라의 이름을 예전 그대로 ‘하티’로 유지했고, 자신들도 ‘하티 나라의 사람’이라고 자처했다. 이것이 훗날 우리가 영어식으로 ‘히타이트’라고 부르는 나라가 된다. 선주민인 하티인들도 새로운 지배 계층과 섞이며 언어도 따라 쓰게 되었을 텐데, 그렇게 그들 모두가 ‘히타이트인’이 된 것이다. 지금도 아나톨리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히타이트’와 ‘하티’라는 단어를 따로 사용하며 선주민을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흔히 히타이트 ‘제국’이라고 불리는 것과 달리 히타이트가 제국 수준에 도달한 시기는 빨라도 히타이트 중기, 대체로 후기로 여겨진다고 한다.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여러 도시국가가 존재했고, 히타이트도 그중 하나였을 뿐이다. 초대 왕의 이름은 라바르나. 수도를 하투샤로 옮기고 왕국다운 면모로 갖춰 실질적인 시조로 여겨지는 왕은 그 뒤를 이은 하투실리 1세였다.


하투실리 1세는 라바르나의 처조카였다. 라바르나에게 자식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아들이 무려 일곱 명이나 됐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처조카가 왕권을 차지한 건지 상상이 잘 안 된다. 사실 왕권이 자리 잡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종종 히타이트의 왕위 계승 시스템은 심각할 정도로 뒤죽박죽이라 그냥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중앙 아나톨리아를 통일하고 현재의 시리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니 하투실리 1세가 유능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4afa646d5fde1.jpg히타이트의 전차를 새긴 부조


다만 그도 자식 복은 없었는지 아들이며 딸이며 자기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데 상심하고 노여워하며 왕위를 손자에게 물려주었다. 하투실리 1세는 점토판에 구구절절 자신이 어떻게 속국을 정복했는지 써두었는데, 내친 김에 아들처럼 생각한 손자에게 주색을 멀리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신을 잘 섬기라는 훈계도 남겼다. 각각 〈하투실리 1세의 연대기〉와 〈하투실리 1세의 정치적 유언〉으로 남은 이 점토판 문서들은 초기 히타이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돌에 반영구적으로 남은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보며 살았을 손자 무르실리 1세의 심정은 어땠을지 궁금하다. 그래도 조언을 흘려 듣진 않았는지 히타이트의 3대 왕 무르실리 1세는 바빌로니아로 원정을 떠나 바빌론 제1왕조를 멸망시킨 주역이 된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랄까.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하투실리 1세의 잔소리 이후 몇 번의 왕이 바뀌는 동안 히타이트 왕실은 사료를 많이 남기지 않았다. 무려 여덟 번째에 이르러서야 자기 업적을 후대에 남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힌 왕이 나타나 건국 이래의 역사를 정리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히타이트인들은 연대를 남기는 데는 더 인색했다. 그래서 전쟁 같은 주요 사건이 언제 벌어졌는지, 왕들의 재위 시기는 어떠했는지 알아내려면 주변 문명의 사료를 참고해야 했다. 연대가 확실히 밝혀진 이집트의 점토판에서 히타이트 왕의 이름을 찾아내 그가 기원전 몇 년에 생존했는지 알아내는 식이었다.


아무튼 기록의 즐거움에 눈 뜨고 내정에도 힘을 쏟은 8대 왕 텔레피누 재위까지를 ‘초기 히타이트(히타이트 고왕국 시대)’라고 구분한다. 혼돈 그 자체였던 왕권 찬탈전만 제외하면 대체로 원정과 승리를 반복하며 국가의 덩치를 기운 시기였다. 비로소 아나톨리아 반도 최초의 거대 국가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히타이트 민족이 직계 조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튀르키예가 히타이트의 유적을 발굴하고 널리 알리는 데 힘써 온 이유도 발 디딘 땅에 축적된 두터운 역사를 튀르키예의 정체성에 흡수하고자 함이다.


4864560fc5f47.jpg석조물의 홀에 보관된 히타이트 시대 전후의 부조들


실제로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은 히타이트 당대 유적뿐만 아니라 구석기부터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아나톨리아 반도에 존재했던 여러 문명을 아우른다. 석기 시대 아나톨리아 사람들이 어떤 집을 짓고 어떤 음식을 먹었으며 사냥과 제의, 일상에서는 어떤 도구들을 썼는지 체계적으로 정리해 두었다. 그래서 히타이트 제국의 전후, 그러니까 히타이트가 어떤 문화를 계승했고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대략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예컨대 무덤이 그렇다. 아나톨리아 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어머니의 뱃속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담아 시신을 자궁 속 아기와 비슷한 자세로 매장했다. 커다란 독이나 항아리에 시신을 넣고 매장(옹관묘甕棺墓)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항아리가 곧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하는 셈이다. 히타이트 유적은 여전히 발굴 중인데, 히타이트 왕들의 무덤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히타이트 초기에 만들어진 일반 시민의 묘지는 찾았으며 거기서도 옹관묘가 나왔다. 이를 통해 오랜 매장 풍습이 히타이트로도 이어졌으며, 왕이나 왕족은 과연 어떻게 묻혀 있을지 추측해 볼 수도 있겠다. 어머니의 뱃속으로 돌아간다는 메시지에서 그들이 죽음을 바라보던 관점까지 엿볼 수 있고.


20c1dfcf84599.jpg차탈회위크 신석시 시대 주거지를 재현한 풍경. 집안에 유골을 묻는 풍습이 있었다.


하지만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이것이 히타이트로군!” 할 만한 유물을 구별해 내기는 쉽지 않았다.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토기이거나 점토판에 쐐기문자를 새긴 문서들로, 박물관이 섭렵하는 몇 천 년 역사의 한 챕터 정도로 인식될 뿐이었다. 흔히 ‘히타이트 태양 원반’이라 불리는 제의에 쓴 장신구는 모양새부터 남달라 보이긴 했는데, 오랫동안 앙카라의 도시 상징으로 사용됐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히타이트 때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그 이전 시대 유적인 알라자회윅(Alaca Höyük)에서 발견된 유물이었다.


8f3c6601c6bd5.jpg앙카라의 도시 상징으로도 활약했던 히타이트 태양 원반


솔직히 박물관 지하에 전시된 고대 로마의 조각과 장신구, 오스만 제국이 남긴 화사한 파란색 문양이 눈에는 더 달콤했다. ‘철의 제국’치고는 유물이 너무 흙과 돌밖에 없어서 그런가. 그러고 보면 옛날 국사 시간에도 시대적으로 달라지는 토기의 모양과 무늬를 구별하는 데 고달플 정도로 젬병이었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프리기아 시대의 금관 장식, 셀주크 시대의 화려한 문양이 돋보이는 타일


나의 빈약한 지식과 눈썰미를 탓하며 박물관을 나서자마자 단체로 수학여행을 온 튀르키예 고등학생들과 맞닥트렸다. 학생들은 자기네 나라에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유물이 나왔다는 사실이 아주 자연스러운 듯 목이 날아간 석상 앞에서 단체 셀카를 찍기도 했다. 몇몇 친구들은 대부분 한국인으로 구성된 우리 일행에게도 관심을 보였는데, 말 그대로 ‘한국인’이라는 이유였다. 드센 한류 열풍 덕이겠지만, 역사적으로도 한국을 형제 국가(물론 튀르키예 쪽이 형이라고 말한다)로 여긴다는 튀르키예 사람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아침나절부터 박물관을 찾은 것치고 히타이트에 관해 깊이 알게 되진 않았다는 데 겸연쩍기도 했다. 히타이트를 보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본격적으로 유적을 봐야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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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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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를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litt.ly/ecrire_lire_vi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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