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타이트 제국의 흔적을 좇아서 #3
히타이트의 수도였던 하투샤의 유적은 보아즈칼레(Boğazkale)라는 작은 도시 인근에 있다. 앙카라에서 보아즈칼레까지는 차로 2시간 30분. 불그스름한 산과 평원이 줄기차게 흘러갔다. 철분이 많아 저렇게 붉다고, 나는 잠깐씩, 하지만 자주 화성을 떠올렸다. 곳곳에 자란 앙상하고 짤따란 초목은 당장이라도 회전초처럼 굴러다닐 것 같았다. 아무도 살지 않아 허물어진 집이 갑작스레 나타나자 차도 변에 세워진 나무들이 황급히 가림막을 쳤다. 이어서 양 몇 마리가 또 갑자기 나타나 방금 본 장면을 무마하려 애썼다. 양떼를 보면 화성도 사막도 사라지고 동화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저 앙상한 풀에도 씹을 거리가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나름 분주하게 재미를 느끼다 보니 어느새 거대한 바위산 앞이었다.
하투샤로 가는 길
하투샤는 손자에게 불변의 잔소리를 남긴 하투실리 1세가 천도한 이후로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줄곧 히타이트의 수도였다. 왜 이곳을 수도로 정했는지는 가만히 서서 한 바퀴 둘러보기만 해도 이해가 된다. 바위산이 곧 천연 요새이기 때문이다.
히타이트 초기에는 지대가 낮은 북쪽에만 도시를 틀었다. 그러다가 국력이 강해지고,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서 받아들인 신들이 늘어나면서 제법 산세가 있는 남쪽으로 수도를 확장했다. 이왕 산 위에 나라를 세웠으니 성벽도 그럴싸하게 쌓아야겠지. 히타이트인들은 돌과 점토와 목재를 섞어서 성벽을 세웠는데, 전체 둘레가 6km에서 7km 정도였다고 한다.


하투샤 유적
하투샤 유적 입구 앞에는 크고 노란 성벽이 세워져 있다. 히타이트인들이 세웠던 성벽은 모두 허물어져 사라졌고, 현대에 와서 당시와 같은 재료에 같은 공법으로 복원한 건축물이다. 높이 7~8m, 길이는 65m인 복원 성벽을 짓는 데 햇수로 3년이 걸렸다. 날씨가 궂으면 점토가 마르지 않아 공사가 지연되어 그렇게 오래 걸렸다고는 하지만, 그 옛날에 저런 성벽을 7km나, 그것도 산 위에 세웠다니 놀라운 일이다.

복원한 하투샤 성벽
하투샤가 워낙 넓고(180ha) 지대가 높아 유적 내에서도 차로 이동한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입구에서 멀지 않은 대신전 터였다. 히타이트는 이른바 ‘천 신(千神)’을 모시던 선대 국가 하티의 종교관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하티의 신, 하티를 지배한 이들이 믿던 신, 우방국이나 전쟁을 통해 정복한 민족의 신 등 히타이트 신들의 명부는 계속해서 길어졌다. 편입생 이름을 어디 점토판에 끼적이고 만 것도 아니고, 좀 중요하다 싶은 신은 작은 신전이라도 하나 세워서 섬기고 달래주기도 했다. 수도를 확장한 이유 중 하나도 편입생들을 위한 새 신전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래서야 신만 있고 사람 자리가 없는 건 아닌가 싶지만, 각 신전을 담당하는 신관에 예능인, 기술인까지 고용 창출 효과도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대신전 뒤에는 곡물 창고 터도 남아 있는데, 사람 많은 수도답게 그 규모가 광활하다.
대신전이 있던 자리와 곡물 창고 터
대신전은 하투샤의 수많은 신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히타이트인들이 가장 높이 섬겼던 두 신, 공교롭게도 부부라고 하는데, 태양 여신과 날씨를 관장하는 풍우신(기후의 신)을 모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전은 히타이트의 여타 신전과 달리 신에게 예배를 하는 지성소가 두 군데였다. 태양 여신과 풍우신 입장에서는 신혼집을 제대로 차려 받은 셈이다.
한편 대신전과 그곳에서 행해진 제례 의식은 지금 보면 비실용적일 만큼 중요하게 여겨진 행사였다. 저 먼 땅까지 원정을 떠난 왕이 제사를 지내려고 허둥지둥 수도로 돌아와야 할 정도였다. 덕분에 히타이트로부터 살아남은 약소국에게는 그야 말로 신의 축복이었겠지만.
그렇게 중요한 장소였어도 3천 년이 넘게 흐른 지금 남은 건 돌 바닥과 기단 정도다. 솔직히 제국의 대신전을 보러 간다고 해서 고대 그리스 신전의 절반 정도는 볼 수 있겠거니 기대했는데 너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삼 면을 둘러싼 거대한 돌 봉우리더러 신전이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남은 것은 거대한 바위뿐
그때, 아주 거대한 초록색 돌덩어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꼭 입방체 주사위처럼 생겼다. 누군가 자른 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성된 본래의 형상이라고 한다. 표면은 굉장히 반들반들하고 햇살을 머금어 따스했다. 우리를 안내해 준 하투샤의 젊은 고고학자는 이 돌을 고대 이집트의 ‘네임드’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에 보내준 선물이라고 설명했다. 도대체 이 크고 무거운 것을 이집트에서 아나톨리아 중부까지 어떻게 가져왔나 의아했지만, 아차, 이집트는 피라미드까지 세운 나라 아닌가. 이 정도 돌덩어리 옮기는 거야 일도 아니었겠지.
아무튼 갑자기 이집트의 유명 인사가 튀어나와 당황스럽지만, 실제로 전성기의 히타이트는 고대 이집트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다. 하늘 아래 두 영웅은 있을 수 없다고 자연스레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라이벌 관계가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두 국가는 현재의 시리아 지역을 두고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전력이 너무 팽팽한 나머지 누구 하나 완전한 승리를 이루진 못했고, 머지않아 소모전을 계속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두 나라는 세계 최초의 평화 조약을 맺어 은판에 새기고는 한 부씩 나누어 가진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데시 평화 협정’이다. 이 평화 협정 이후로 히타이트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 간의 혼인도 가능해지는 등 두 나라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신비한 녹색 돌
카데시 평화 협정은 지금도 그 복제품을 UN 본부 내에 전시하여 세계 평화를 소원할 만큼 인류사에서 상징적인 이벤트였다. 그런데 이 문서는 히타이트 연구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히타이트 측이 소유한 협정문의 점토판 사본이 발견됨으로써 이곳이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라는 사실도 함께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서를 보관한 곳은 수도일 수밖에 없다는 추론이다.)
이 거대한 녹색 바위는 람세스 2세가 평화 조약을 맺은 이후 보내온 듯하다. 누가 봐도 신비한 인상이라 오랫동안 ‘성스러운 바위’로 여겨졌는데, 왼손을 얹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있단다. 그래서 하투샤 유적에 와서 아이가 생기길 기원하거나 아니면 일단 결혼이라도 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비는 튀르키예 사람들이 많단다. 젊은 학자의 권유에 우리 일행도 돌 위에 손을 얹었다. 다들 무슨 바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따 먹을 늦은 점심이 맛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원 하나 빌었는데, 그 소원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만큼 영험한 돌이었으니 누군가 마음속에서 세계 평화를 외운 사람도 있었기를.
하투샤 주변의 산세
하투샤의 문
이제 지대가 높은 남쪽으로 올라간다. 볼거리 측면에서 하투샤 유적의 하이라이트는 문(門)이다.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에서부터 계속 돌만 보고 있는데 문설주도 돌인 문을 보러 간다는 말을 듣고 이제는 그러려니 싶다.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하투샤의 서쪽, 남쪽, 동쪽에는 각각 사자의 문, 스핑크스의 문, 왕의 문이 있다. 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히타이트인들의 돌 쪼는 솜씨가 아낌없이 발휘된 석상을 볼 수 있다는 의미였다.
미니 밴의 엔진이 나지막한 신음을 내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어느덧 해발 1,200m. 풍경이 더 깊어진 자리에서 나무로 만들어졌던 하투샤의 서쪽 성문은 사라졌고, 사자상 두 채만 남아 있었다. 정면을 바라보고 왼쪽의 사자는 방금 정을 뗀 것처럼 생생한 형상이고 오른쪽 사자는 세월의 풍파를 많이 맞은 형색이었다. 이어서 볼 스핑크스상도 그렇지만, 전쟁까지 벌인 사이일지언정 히타이트가 이집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자의 문
히타이트인들은 다른 민족의 문화와 기술을 도입하면서도 그들만의 오리지널티를 잊지 않았다. ‘철의 제국’이 아니라 ‘석공의 제국’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돌을 다루는 데 탁월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차례 했다. 그리고 그 결정판이 문 주변의 돌벽이었다. 히타이트의 건축 기술 중에 키클로피안(Cyclopean) 공법이 있다. 키클로피안 공법은 자연에 있는 돌을 가져와 모르타르 같은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정교하게 맞춰 벽을 쌓는 기법이다. 제주의 돌담도 일종의 키클로피안 공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방이 바위산이니 재료 수급에는 부족함이 없었겠지만, 퍼즐처럼 서로 가장 잘 들어맞는 돌을 찾아내서 몇 m씩 쌓아 올리는 일은 노동을 넘어 예술에 가까운 일이다. 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박아 넣어 흔들림을 없애고 일부 가장자리는 정교하게 잘라내 일정한 유격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기온에 따른 돌의 팽창과 수축, 돌 사이에 흐르는 물의 양이나 물이 얼었다 녹으며 생기는 부피의 변화 등을 고려한 것이다. 돌 말고는 다른 재료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성벽의 수명은 돌이 얼마나 빨리 풍화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최소한 지난 3,500년 간 불어온 바람은 히타이트의 방패를 무너트리기에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키클로피안 공법으로 쌓은 벽
지대가 가장 높은 남쪽에는 스핑크스의 문이 있다. 말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이것도 진짜 스핑크스네? ‘스핑크스=이집트’라는 공식이 너무 강렬하게 머리에 박혀 있어서 그런지 튀르키예 땅에서 보니 신선하다. 그런데 사자를 같은 사이즈로 보면 위용 있어 보이지만, 스핑크스가 이 크기가 되면 좀 귀여워진다. 옛날엔 보석이 박혀 있었는지 눈이 뻥 뚫려 있었다. 그 반짝이는 눈이 한밤중 월담을 도모하던 침입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겠지.
스핑크스의 문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시설이 있다. 지하 통로다. ‘땅의 문’이라는 의미에서 ‘예르카프’로 불리는 이 통로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성 안팎을 연결하는 길고 좁은 지하도이며 성 안쪽이 고도가 높다. 그래서 성벽을 통해 집입하기를 포기한 침입자가 이 경사로를 택하면, 올라오는 순간 성 안쪽 히타이트군에게 하나하나 베여 쓰러졌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통로 벽을 잘 훑어보면 당시 히타이트 사람들이 그려 놓은 사자나 멧돼지 그림도 찾을 수 있다.
스핑크스의 문
지하 통로를 내려가 히타이트 성 바깥으로 나오면 꽤 가파른 경사로 쌓인 돌 언덕, 피라미드가 하투샤 성벽의 일부를 둘러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영향을 받은 구조물인데, 어쩐지 한강의 제방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에 이집트에서 오리지널을 본 사람들의 헛웃음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원본을 본 적 없는 나로서는 퍽 인상적으로 보였다. 이 돌산 속에 자리 잡은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찾아온 적군들은 시커먼 통로와 가파른 피라미드, 어느 쪽을 침투로로 선택하며 자신의 명운을 걸었을까? 그러다가 마침내 침략의 목적을 달성한 이들은 또 누구였을까?
지하통로 예르카프와 하투샤의 피라미드
마지막으로 찾은 왕의 문에는 허리에 천만 걸치고 소뿔 투구와 도끼를 뜬 인물(전사 혹은 신)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히타이트의 왕이 다른 나라로 원정을 떠나거나 마치고 돌아올 때 이 문을 지났기 때문에 ‘왕의 문’이라 불린다. 히타이트는 건국 초기와 제국 규모로 성장한 후기에 적극적으로 원정을 나섰다. 전차에 올라 왕의 문을 나서던 히타이트의 왕들은 그들이 영원히 승리할 줄로만 믿었을 것이다. 왕의 문에 새겨진 남자의 부조만 봐도 매부리코에 앙 다문 입이 한 치 망설임도 없는 영웅의 인상이다. 그러나 이집트와 자웅을 겨룰 만큼 부강했던 히타이트는 평화 협정을 맺은 후 몇 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멸망했다. 속국의 독립, 외세의 침략, 길고 긴 가뭄. 지금도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 모든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 제국을 돌 더미로 돌려놓았을 거라고 여겨진다. 어쩌면 누군가는 왕의 문을 나설 때 산골짜기에 자욱하게 낀 안개를 보며 불길한 기운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가진 모든 배경이 이를 애써 외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왕의 문
기단만 남은 유적을 걸어다니며 상상력을 동원해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다 보면 감정이입이 되기도 한다. 거대한 신전, 돌에 새겨 기념한 국력과 위업, 영광을 지키기 위한 방벽을 차례차례 마주하면서 이국에 존재하는 남의 제국에 알 수 없는 자부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걸어서 오르고 있는 돌산처럼 영원할 것 같아 보이던 문명도 결국 돌무지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투샤의 남쪽, 저수지 성벽에 지어진 사당에는 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수필룰리우마 2세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왕과 왕족만 읽을 수 있는 상형문자로 남긴 수필룰리우마 2세가 정복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수필루리우마 2세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히타이트의 마지막 왕이다. 황혼이 히타이트 왕가에 내려앉고 있었다. 수필룰리우마 2세가 정복 전쟁을 일으킨 것도 지독한 가뭄 때문에 곡물을 수입할 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영광이 아닌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다.

수필룰리우마 2세의 비문
수필룰리우마 2세의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소를 치는 남자를 만났다. 소들은 풀이 말라버린 늦가을 땅에서도 용케 먹을 걸 찾아내고 있었다. 하투샤로 오면서 보았던 양떼도 그랬지. 이 맑은 눈의 동물들도 온순했고, 주어진 상황에 자족하는 듯 보였으며, 아주 오래전 이 땅에 누가 있었는지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들을 몰고 온 늙은 목동도 마찬가지였다. 하투샤 유적지 내에서는 가축을 방목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런 권고사항 역시 누구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때맞춰 산 아래 마을에서 아잔 소리가 울렸다. 이토록 높은 곳까지 올라오는 외침이 사라진 제국을 위한 진혼곡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결국 감정이입일 뿐이다. 바람이 아잔 소리를 멀리 실어간 자리에 맑은 워낭소리만 남았다.
소를 치는 남자
히타이트로 기억될 땅
하투샤 유적에서 북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야즐르카야(Yazılıkaya)가 있다. 야즐르카야에는 거대한 암벽들이 통로와 방처럼 세워져 있으며, 히타이트인들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이 신비로운 장소를 신전이자 선대 왕을 기리는 사당으로 사용했다. 미로처럼 이어진 바위 사잇길을 지나면 지붕이 없는 두 개의 전실(Chamber)이 차례로 나타나고, 암석에는 히타이트의 신들이 새겨져 있다. 신들의 행렬 그 끝 어딘가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왕의 무덤이 있을지도 모른다.
야즐르카야
머리 위가 열려 있는데도 꼭 동굴에 들어온 것 같았다. 소리 대신 정적이 들려오는 듯한 그 느낌이 여기에도 있었다. 손을 대도 되겠다 싶은 자리를 골라 거대한 바위벽을 만져 보았다. 몇 천 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았을 감촉이었다. 문득, 돌의 신전이라니, 돌에서 시작했던 히타이트의 흔적을 좇는 여정의 종착지로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즐르카야 바위에 새겨진 신의 부조들
우리 모두가 그러고 있듯 히타이트도 그들의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살았다. 영원이라. 그때나 지금이나, 너에게나 나에게나 변함없는 착각이자 누구도 지켜줄 수 없는 약속이다. 그래도 그 오해가 돌에 남긴 수많은 흔적이 긴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를 만나게 해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튀르키예는 이스탄불일 줄 알았다. 하지만 나를 먼저 불러준 건 히타이트인들이었다. 여전히 그들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동안 튀르키예라는 나라가 히타이트로 기억될 거라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했다.

글·사진 | 신태진

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를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litt.ly/ecrire_lire_vivre
히타이트 제국의 흔적을 좇아서 #3
히타이트의 수도였던 하투샤의 유적은 보아즈칼레(Boğazkale)라는 작은 도시 인근에 있다. 앙카라에서 보아즈칼레까지는 차로 2시간 30분. 불그스름한 산과 평원이 줄기차게 흘러갔다. 철분이 많아 저렇게 붉다고, 나는 잠깐씩, 하지만 자주 화성을 떠올렸다. 곳곳에 자란 앙상하고 짤따란 초목은 당장이라도 회전초처럼 굴러다닐 것 같았다. 아무도 살지 않아 허물어진 집이 갑작스레 나타나자 차도 변에 세워진 나무들이 황급히 가림막을 쳤다. 이어서 양 몇 마리가 또 갑자기 나타나 방금 본 장면을 무마하려 애썼다. 양떼를 보면 화성도 사막도 사라지고 동화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저 앙상한 풀에도 씹을 거리가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나름 분주하게 재미를 느끼다 보니 어느새 거대한 바위산 앞이었다.
하투샤는 손자에게 불변의 잔소리를 남긴 하투실리 1세가 천도한 이후로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줄곧 히타이트의 수도였다. 왜 이곳을 수도로 정했는지는 가만히 서서 한 바퀴 둘러보기만 해도 이해가 된다. 바위산이 곧 천연 요새이기 때문이다.
히타이트 초기에는 지대가 낮은 북쪽에만 도시를 틀었다. 그러다가 국력이 강해지고,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서 받아들인 신들이 늘어나면서 제법 산세가 있는 남쪽으로 수도를 확장했다. 이왕 산 위에 나라를 세웠으니 성벽도 그럴싸하게 쌓아야겠지. 히타이트인들은 돌과 점토와 목재를 섞어서 성벽을 세웠는데, 전체 둘레가 6km에서 7km 정도였다고 한다.
하투샤 유적
하투샤 유적 입구 앞에는 크고 노란 성벽이 세워져 있다. 히타이트인들이 세웠던 성벽은 모두 허물어져 사라졌고, 현대에 와서 당시와 같은 재료에 같은 공법으로 복원한 건축물이다. 높이 7~8m, 길이는 65m인 복원 성벽을 짓는 데 햇수로 3년이 걸렸다. 날씨가 궂으면 점토가 마르지 않아 공사가 지연되어 그렇게 오래 걸렸다고는 하지만, 그 옛날에 저런 성벽을 7km나, 그것도 산 위에 세웠다니 놀라운 일이다.
복원한 하투샤 성벽
하투샤가 워낙 넓고(180ha) 지대가 높아 유적 내에서도 차로 이동한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입구에서 멀지 않은 대신전 터였다. 히타이트는 이른바 ‘천 신(千神)’을 모시던 선대 국가 하티의 종교관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하티의 신, 하티를 지배한 이들이 믿던 신, 우방국이나 전쟁을 통해 정복한 민족의 신 등 히타이트 신들의 명부는 계속해서 길어졌다. 편입생 이름을 어디 점토판에 끼적이고 만 것도 아니고, 좀 중요하다 싶은 신은 작은 신전이라도 하나 세워서 섬기고 달래주기도 했다. 수도를 확장한 이유 중 하나도 편입생들을 위한 새 신전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래서야 신만 있고 사람 자리가 없는 건 아닌가 싶지만, 각 신전을 담당하는 신관에 예능인, 기술인까지 고용 창출 효과도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대신전 뒤에는 곡물 창고 터도 남아 있는데, 사람 많은 수도답게 그 규모가 광활하다.
대신전이 있던 자리와 곡물 창고 터
대신전은 하투샤의 수많은 신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히타이트인들이 가장 높이 섬겼던 두 신, 공교롭게도 부부라고 하는데, 태양 여신과 날씨를 관장하는 풍우신(기후의 신)을 모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전은 히타이트의 여타 신전과 달리 신에게 예배를 하는 지성소가 두 군데였다. 태양 여신과 풍우신 입장에서는 신혼집을 제대로 차려 받은 셈이다.
한편 대신전과 그곳에서 행해진 제례 의식은 지금 보면 비실용적일 만큼 중요하게 여겨진 행사였다. 저 먼 땅까지 원정을 떠난 왕이 제사를 지내려고 허둥지둥 수도로 돌아와야 할 정도였다. 덕분에 히타이트로부터 살아남은 약소국에게는 그야 말로 신의 축복이었겠지만.
그렇게 중요한 장소였어도 3천 년이 넘게 흐른 지금 남은 건 돌 바닥과 기단 정도다. 솔직히 제국의 대신전을 보러 간다고 해서 고대 그리스 신전의 절반 정도는 볼 수 있겠거니 기대했는데 너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삼 면을 둘러싼 거대한 돌 봉우리더러 신전이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때, 아주 거대한 초록색 돌덩어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꼭 입방체 주사위처럼 생겼다. 누군가 자른 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성된 본래의 형상이라고 한다. 표면은 굉장히 반들반들하고 햇살을 머금어 따스했다. 우리를 안내해 준 하투샤의 젊은 고고학자는 이 돌을 고대 이집트의 ‘네임드’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에 보내준 선물이라고 설명했다. 도대체 이 크고 무거운 것을 이집트에서 아나톨리아 중부까지 어떻게 가져왔나 의아했지만, 아차, 이집트는 피라미드까지 세운 나라 아닌가. 이 정도 돌덩어리 옮기는 거야 일도 아니었겠지.
아무튼 갑자기 이집트의 유명 인사가 튀어나와 당황스럽지만, 실제로 전성기의 히타이트는 고대 이집트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다. 하늘 아래 두 영웅은 있을 수 없다고 자연스레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라이벌 관계가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두 국가는 현재의 시리아 지역을 두고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전력이 너무 팽팽한 나머지 누구 하나 완전한 승리를 이루진 못했고, 머지않아 소모전을 계속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두 나라는 세계 최초의 평화 조약을 맺어 은판에 새기고는 한 부씩 나누어 가진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데시 평화 협정’이다. 이 평화 협정 이후로 히타이트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 간의 혼인도 가능해지는 등 두 나라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카데시 평화 협정은 지금도 그 복제품을 UN 본부 내에 전시하여 세계 평화를 소원할 만큼 인류사에서 상징적인 이벤트였다. 그런데 이 문서는 히타이트 연구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히타이트 측이 소유한 협정문의 점토판 사본이 발견됨으로써 이곳이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라는 사실도 함께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서를 보관한 곳은 수도일 수밖에 없다는 추론이다.)
이 거대한 녹색 바위는 람세스 2세가 평화 조약을 맺은 이후 보내온 듯하다. 누가 봐도 신비한 인상이라 오랫동안 ‘성스러운 바위’로 여겨졌는데, 왼손을 얹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있단다. 그래서 하투샤 유적에 와서 아이가 생기길 기원하거나 아니면 일단 결혼이라도 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비는 튀르키예 사람들이 많단다. 젊은 학자의 권유에 우리 일행도 돌 위에 손을 얹었다. 다들 무슨 바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따 먹을 늦은 점심이 맛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원 하나 빌었는데, 그 소원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만큼 영험한 돌이었으니 누군가 마음속에서 세계 평화를 외운 사람도 있었기를.
하투샤의 문
이제 지대가 높은 남쪽으로 올라간다. 볼거리 측면에서 하투샤 유적의 하이라이트는 문(門)이다.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에서부터 계속 돌만 보고 있는데 문설주도 돌인 문을 보러 간다는 말을 듣고 이제는 그러려니 싶다.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하투샤의 서쪽, 남쪽, 동쪽에는 각각 사자의 문, 스핑크스의 문, 왕의 문이 있다. 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히타이트인들의 돌 쪼는 솜씨가 아낌없이 발휘된 석상을 볼 수 있다는 의미였다.
미니 밴의 엔진이 나지막한 신음을 내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어느덧 해발 1,200m. 풍경이 더 깊어진 자리에서 나무로 만들어졌던 하투샤의 서쪽 성문은 사라졌고, 사자상 두 채만 남아 있었다. 정면을 바라보고 왼쪽의 사자는 방금 정을 뗀 것처럼 생생한 형상이고 오른쪽 사자는 세월의 풍파를 많이 맞은 형색이었다. 이어서 볼 스핑크스상도 그렇지만, 전쟁까지 벌인 사이일지언정 히타이트가 이집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히타이트인들은 다른 민족의 문화와 기술을 도입하면서도 그들만의 오리지널티를 잊지 않았다. ‘철의 제국’이 아니라 ‘석공의 제국’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돌을 다루는 데 탁월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차례 했다. 그리고 그 결정판이 문 주변의 돌벽이었다. 히타이트의 건축 기술 중에 키클로피안(Cyclopean) 공법이 있다. 키클로피안 공법은 자연에 있는 돌을 가져와 모르타르 같은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정교하게 맞춰 벽을 쌓는 기법이다. 제주의 돌담도 일종의 키클로피안 공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방이 바위산이니 재료 수급에는 부족함이 없었겠지만, 퍼즐처럼 서로 가장 잘 들어맞는 돌을 찾아내서 몇 m씩 쌓아 올리는 일은 노동을 넘어 예술에 가까운 일이다. 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박아 넣어 흔들림을 없애고 일부 가장자리는 정교하게 잘라내 일정한 유격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기온에 따른 돌의 팽창과 수축, 돌 사이에 흐르는 물의 양이나 물이 얼었다 녹으며 생기는 부피의 변화 등을 고려한 것이다. 돌 말고는 다른 재료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성벽의 수명은 돌이 얼마나 빨리 풍화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최소한 지난 3,500년 간 불어온 바람은 히타이트의 방패를 무너트리기에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대가 가장 높은 남쪽에는 스핑크스의 문이 있다. 말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이것도 진짜 스핑크스네? ‘스핑크스=이집트’라는 공식이 너무 강렬하게 머리에 박혀 있어서 그런지 튀르키예 땅에서 보니 신선하다. 그런데 사자를 같은 사이즈로 보면 위용 있어 보이지만, 스핑크스가 이 크기가 되면 좀 귀여워진다. 옛날엔 보석이 박혀 있었는지 눈이 뻥 뚫려 있었다. 그 반짝이는 눈이 한밤중 월담을 도모하던 침입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겠지.
스핑크스의 문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시설이 있다. 지하 통로다. ‘땅의 문’이라는 의미에서 ‘예르카프’로 불리는 이 통로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성 안팎을 연결하는 길고 좁은 지하도이며 성 안쪽이 고도가 높다. 그래서 성벽을 통해 집입하기를 포기한 침입자가 이 경사로를 택하면, 올라오는 순간 성 안쪽 히타이트군에게 하나하나 베여 쓰러졌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통로 벽을 잘 훑어보면 당시 히타이트 사람들이 그려 놓은 사자나 멧돼지 그림도 찾을 수 있다.
지하 통로를 내려가 히타이트 성 바깥으로 나오면 꽤 가파른 경사로 쌓인 돌 언덕, 피라미드가 하투샤 성벽의 일부를 둘러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영향을 받은 구조물인데, 어쩐지 한강의 제방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에 이집트에서 오리지널을 본 사람들의 헛웃음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원본을 본 적 없는 나로서는 퍽 인상적으로 보였다. 이 돌산 속에 자리 잡은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찾아온 적군들은 시커먼 통로와 가파른 피라미드, 어느 쪽을 침투로로 선택하며 자신의 명운을 걸었을까? 그러다가 마침내 침략의 목적을 달성한 이들은 또 누구였을까?
지하통로 예르카프와 하투샤의 피라미드
마지막으로 찾은 왕의 문에는 허리에 천만 걸치고 소뿔 투구와 도끼를 뜬 인물(전사 혹은 신)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히타이트의 왕이 다른 나라로 원정을 떠나거나 마치고 돌아올 때 이 문을 지났기 때문에 ‘왕의 문’이라 불린다. 히타이트는 건국 초기와 제국 규모로 성장한 후기에 적극적으로 원정을 나섰다. 전차에 올라 왕의 문을 나서던 히타이트의 왕들은 그들이 영원히 승리할 줄로만 믿었을 것이다. 왕의 문에 새겨진 남자의 부조만 봐도 매부리코에 앙 다문 입이 한 치 망설임도 없는 영웅의 인상이다. 그러나 이집트와 자웅을 겨룰 만큼 부강했던 히타이트는 평화 협정을 맺은 후 몇 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멸망했다. 속국의 독립, 외세의 침략, 길고 긴 가뭄. 지금도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 모든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 제국을 돌 더미로 돌려놓았을 거라고 여겨진다. 어쩌면 누군가는 왕의 문을 나설 때 산골짜기에 자욱하게 낀 안개를 보며 불길한 기운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가진 모든 배경이 이를 애써 외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기단만 남은 유적을 걸어다니며 상상력을 동원해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다 보면 감정이입이 되기도 한다. 거대한 신전, 돌에 새겨 기념한 국력과 위업, 영광을 지키기 위한 방벽을 차례차례 마주하면서 이국에 존재하는 남의 제국에 알 수 없는 자부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걸어서 오르고 있는 돌산처럼 영원할 것 같아 보이던 문명도 결국 돌무지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투샤의 남쪽, 저수지 성벽에 지어진 사당에는 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수필룰리우마 2세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왕과 왕족만 읽을 수 있는 상형문자로 남긴 수필룰리우마 2세가 정복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수필루리우마 2세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히타이트의 마지막 왕이다. 황혼이 히타이트 왕가에 내려앉고 있었다. 수필룰리우마 2세가 정복 전쟁을 일으킨 것도 지독한 가뭄 때문에 곡물을 수입할 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영광이 아닌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다.
수필룰리우마 2세의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소를 치는 남자를 만났다. 소들은 풀이 말라버린 늦가을 땅에서도 용케 먹을 걸 찾아내고 있었다. 하투샤로 오면서 보았던 양떼도 그랬지. 이 맑은 눈의 동물들도 온순했고, 주어진 상황에 자족하는 듯 보였으며, 아주 오래전 이 땅에 누가 있었는지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들을 몰고 온 늙은 목동도 마찬가지였다. 하투샤 유적지 내에서는 가축을 방목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런 권고사항 역시 누구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때맞춰 산 아래 마을에서 아잔 소리가 울렸다. 이토록 높은 곳까지 올라오는 외침이 사라진 제국을 위한 진혼곡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결국 감정이입일 뿐이다. 바람이 아잔 소리를 멀리 실어간 자리에 맑은 워낭소리만 남았다.
히타이트로 기억될 땅
하투샤 유적에서 북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야즐르카야(Yazılıkaya)가 있다. 야즐르카야에는 거대한 암벽들이 통로와 방처럼 세워져 있으며, 히타이트인들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이 신비로운 장소를 신전이자 선대 왕을 기리는 사당으로 사용했다. 미로처럼 이어진 바위 사잇길을 지나면 지붕이 없는 두 개의 전실(Chamber)이 차례로 나타나고, 암석에는 히타이트의 신들이 새겨져 있다. 신들의 행렬 그 끝 어딘가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왕의 무덤이 있을지도 모른다.
야즐르카야
머리 위가 열려 있는데도 꼭 동굴에 들어온 것 같았다. 소리 대신 정적이 들려오는 듯한 그 느낌이 여기에도 있었다. 손을 대도 되겠다 싶은 자리를 골라 거대한 바위벽을 만져 보았다. 몇 천 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았을 감촉이었다. 문득, 돌의 신전이라니, 돌에서 시작했던 히타이트의 흔적을 좇는 여정의 종착지로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즐르카야 바위에 새겨진 신의 부조들
우리 모두가 그러고 있듯 히타이트도 그들의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살았다. 영원이라. 그때나 지금이나, 너에게나 나에게나 변함없는 착각이자 누구도 지켜줄 수 없는 약속이다. 그래도 그 오해가 돌에 남긴 수많은 흔적이 긴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를 만나게 해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튀르키예는 이스탄불일 줄 알았다. 하지만 나를 먼저 불러준 건 히타이트인들이었다. 여전히 그들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동안 튀르키예라는 나라가 히타이트로 기억될 거라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했다.
글·사진 | 신태진
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를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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