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오월의 숲길, 경의선 와우교 구간을 거닐며

2024-05-30

/ 오월의 숲길, 상처 위에 돋는 새살처럼 /



연남동에서 경의중앙선 홍대입구역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푸른 잎사귀가 무성한 숲길. 흐드러지게 핀 분홍 장미가 벚꽃이 남긴 꿈같은 여운을 지우는 5시를 넘긴 시각, 해가 서서히 저무는 무렵 나는 오선지에 쓰인 메뉴를 넘겨보고 있었다.



테킬라 사워(Tequila Sour)는 이름과 달리 달달하고 청량했다. 멕시코 증류주를 베이스로 한 칵테일을 마시고, 눅진한 치즈케이크를 포크로 뜨며 홍대 문화를 이룩한 1세대 예술가와 학생들이 남긴 고민을 넘겨받은 포즈를 취한다. 커피 바의 턴테이블을 거꾸로 돌리면 차단기 내려지던 경보음 소리 울리며 건널목으로 전철이 다가올 것 같다. 땡땡땡… 맑은 종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그 종소리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오늘도 무사히 넘겼음을 감사하지만
그 종소리를 울면서 듣고 있는 것들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버러지며 풀 따위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
하지만 소중한 생명을 지닌 것들이
종소리를 들으면서 울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신경림, 「종소리 - 안동의 동화작가 권정생 씨에게」 중에서


테킬라 사워는 오월 같은 맛이 났다. 무르익게 되면 어떤 맛을 낼지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오월의 신록이 물씬 풍기는 풋내에서 쌉싸름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시인의 부고는 종이비행기의 코가 벽에 푹 처박히듯 날아들었다. 신경림 시인 이전에는 최정례 시인의 궂긴 소식이 그렇게 왔다. 한때 그들이 울렸던 종소리는 자취 없이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땅에 척추처럼 박힌 철길을 나란히 걸었고, 간간이 놓아 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식민지 역사의 시작과 함께 부설되어 분단의 상흔마저 간직하게 된 철도는 부조리함에서 탄생하여 부조리함과 평행을 이루며 걷는, 사는 일과 닮아있다. 산업이 고도화되고 유통망이 발달하며 경의선의 쓰임새는 점차 퇴색되었다. 쉴 새 없이 달리는 운명으로부터 탈선한 경의선. 동선을 단절하여 주민 생활을 저해하는 철길이 사람 사이를 잇는 숲길이 되었다.


쓰임이 다해서 상징이 되는 일은 수반된 고통만큼이나 신비롭다.


오월은 내게 사랑을 알게 했고
달 뜨는 밤의 설레임을 알게 했다
뻐꾹새 소리의 기쁨을 알게 했고
돌아오는 길의 외로움에 익게 했다
다시 오월은 내게 두려움을 가르쳤다…

- 신경림, 「오월은 내게」 중에서



즐겁고 아름다운 삶을 마다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즐거운 삶과 아름다운 삶,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이 둘 간의 극복될 수 없는 간극은 고통의 존재 유무에 있다. 고통이 끼어 들 틈을 주지 않는 즐거운 삶과 달리 아름다운 삶은 고통 앞에서 ‘나’와 ‘타자’라는 구분을 허문다. 그리하여 마음을 기울이고 헤아리는 대상에 대해 나 자신과 같이 아끼지 않을 것이 없기에, 나는 결국 아름답기를 택하기로 한다.



하늘로 끝없이 키를 높이는 메타세쿼이아. 마주 보며 선 나무들 사이로 서행하는 열차처럼 거닐었다. 나무 기둥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풀밭에, 계단에, 식당 의자에 앉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이 스쳐간다. 끝을 알 수 없는 인생행로의 어디쯤을 지나며 서로가 잠시 정차할 수 있는 간이역이 되어 주는 모습이 아름답다. 아릿한 추억으로 궤도를 이어 갈 경의선 숲길, 붉은 장미가 담장을 넘고 있었다.


- 고(故) 신경림 시인을 기립니다.



+ 경의선 숲길, 와우교 구간

용산역에서부터 가좌역에 이르는 구간에 조성된 경의선 숲길. 원래는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철도로 부설된 경의선의 지선인 용산선이었다. 경의선의 출발지가 서울역에서 용산으로 바뀐 뒤 지하화 사업으로 지상의 철도는 상권 형성의 어려움과 동네를 낙후하는 요인이 지목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버려진 철길에 선형 공원인 경의선 숲길을 조성하였다. 현재는 거리와 골목이 활기로 가득한 주민 생활권이 형성되어 찾아오는 이들에게 낭만을 선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신경림, 『길 - 신경림 기행시집』, 창비시선 83, 창작과비평사, 1990. 11
신경림, 『 가난한 사랑노래』 , 실천문학의 시집 50, 실천문학사, 1988. 5




글·사진 | 화이트 웨일

숫기는 없지만 장난치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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