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춘 봉별기 - 봄, 작가들의 집에서

단편 기획 기사



환한 봄날이다. 고인을 만나러 간다. 한성역 6번 출구를 등지고 걷는다. 



어제, 상허 이태준이 살던 수연산방(壽硯山房)이 전통찻집이란 정보를 알고 고민했다. 식당에서 혼자 반주하는 일은 매우 익숙한데 전통차를 놓고 내 그림자와 독대하는 모습은 꽤 어색하다. 다가올 찻집 안의 장면이 그려지지 않았다. 여차하면 사진만 찍고 돌아서리라, 이건 또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산만했다.



수연산방으로 이어진 성북동 길까지 고민이 따라온다. 햇볕은 푸지고 거리는 눈부시다. 소박한 대문에 들어서자 고민이 사라진다.



나는 낙화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꽃이 열릴 나뭇가지는 자주 손질을 하였으나 꽃이 떨어질 자리는 한 번도 보살펴 주지 못했다. 이제 그들의 놓일 자리가 거칠음을 볼 때 적지 않은 죄송함과 ‘나도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하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누를 수 없다.

- 이태준, 「낙화의 적막」 중에서


「옆집의 ‘냄새’ 업」, 「성」 등 상허의 수필에는 수연산방 생활에서 비롯된 생각들이 담겨 있다. 수연산방에서 그의 마음을 되새겨보리라,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안채 섬돌에는 벗어놓은 신발들이 어지럽고 바깥채와 모던한 정자, 담벼락 구석 파라솔에도 자리가 없다. 손님들이 가득한 방 안에 들어가 상허의 생활 공간을 들여다보겠다는 호기심은 툇마루조차 올라서지 못한다. 아기자기한 꽃들과 점점 짙어지는 나뭇잎들 사이에서 내 그림자가 쓸쓸해 보인다. 서둘러 사진 몇 장 찍고 대문을 나선다.



*   *   *


상허가 아침마다 안마당에서 칫솔질을 하며 바라본 성벽이 도로 맞은편에 나타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덕에 자리한 심우장이 눈에 띈다. 보도엔 만해 한용운의 청동상이 결기 가득한 표정으로 봄볕을 쬐고 있다. 살아생전 해방을 못 봤다는 분기 따위는 조금도 비치지 않는다.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온전히 마음과 몸을 바친 이의 모습이 이럴까. 



보도로 이어진 목계단을 오르면 좁은 골목이 나온다. 담장 너머 고개를 내민 꽃들이 반긴다. 골목의 주인은 평온한 그늘과 따스한 고요다. 도로가의 번잡한 생활이 여기까지는 방문하지 않는 모양이다. 대문으로 들어서니 깨끗한 마당에 볕이 가득하다. 그리고 아담한 네 칸짜리 집. 죄다 열어 놓은 방문에서 퍼져 나오는 맑은 기운에 칙칙한 마음이 환해진다. 비로소 내 그림자에 생기가 돈다.



집 사방을 여유롭게 둘러본다. 방 안 여기저기를 살펴본다. 뒤꼍 툇마루에도 앉아본다. 무척 한가하다. 지금 이 순간엔 과거와 미래가 없다. 온전히 지금만 존재한다. 그런데 차와 마주할 내 그림자 따위 같은 헛된 짐작으로 채워진 미래의 일로 고민했던 모습이 우스워 실소가 나온다. 다가올 일, 지나간 시간이 ‘만약’이라는 가정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오염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앞으로도 그러리라. 



나는 마음이 아프고 쓰린 때에 주머니에 수를 놓으려면 나의 마음은 수놓는 금실을 따라서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러고 아직 이 세상에는 그 주머니에 넣을 만한 무슨 보물이 없습니다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는 것입니다
- 한용운, 「수의 비밀」 중에서


만해는 시에서 암담한 시대와 자신의 마음을 아름답고 쓸쓸하게 표현했다. 화자가 수를 완성하는 일을 자꾸 미루는 심정에 댈 수는 없지만 이곳을 떠나야 하는 내 처지도 딱하다. 오래오래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을 마당 구석에서 견실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향나무 아래 남겨놓고 대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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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공원, 성균관대 후문, 삼청공원 순환산책길, 청와대길, 통인시장을 거쳐 이상의 집에 다다르는 한 시간 남짓 여정은 집을 나서기 전 지레짐작에 비해 가뿐하다.



이상의 집 앞 보도블록에는 한글 자모음이 새겨 있다. 전신주에도 ‘글 길’이란 글자가 문패마냥 적혀 있다.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고독과 싸우면서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있습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제야(除夜)입니다. 빈자떡, 수정과, 약주, 너비아니, 이 모든 기갈의 향수가 저를 못살게 굽니다. 생리적입니다. 이길 수가 없습니다.
- 이상, 「H형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이상의 집 안은 어둡다. 문은 닫혀 있다. 이상이 동경에서 소설가 안회남에게 편지를 쓰던 설날 전날 밤처럼 캄캄하다. 그해 4월 17일, 그는 가난과 고독과 병으로부터, ‘만약’이란 가정이 없는 곳으로 떠난다. 겨우 27년도 채우지 못한 삶이다. 그의 집 앞이어서인지 ‘만약 그랬다면’과 ‘만약 그러면’이란 허욕과 허약의 지배를 받는 나의 ‘지금’은 겁쟁이처럼 보인다.


골목 한쪽에서 이상의 집을 한참 바라본다. 전신주에 매달린 전선들이 어지럽다. 땀이 흐르는지 겨드랑이가 가렵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날개」 중에서





글/사진 박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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