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고 그림책을 보러 떠납니다. 우리가 도착할 곳은 완주군 삼례읍과 전주시 팔복동 두 곳입니다. 둘 다 귀에 익은 동네는 아니네요.
1. 완주 삼례 그림책 미술관
삼례는 호남평야를 이루는 만경평야 한가운데서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교통 요지였습니다. 지금의 삼례교는 서울을 떠나 전주로 들어가는 양반들이 하인들의 등에 업혀 만경강을 건넜다 해서 양반다리라 불렀다고 해요. 그래서 이곳에 호남에서 거둬들인 쌀과 물품들을 모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습니다.

1892년 10월 동학교도들은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고 포교의 자유를 달라며 이곳 삼례에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었습니다. 충청도 교도들도 모이려면 삼례가 가장 적당했던 거지요. 전봉준 장군을 위시한 동학교도들은 삼례에서 전라감사에 항의 글을 보낸 뒤 직접 한양으로 올라가 광화문 앞에서 상소를 올립니다.
그리고 대망의 1894년 탐악한 정부 관료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낸 동학 1차 봉기를 마치고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다시 삼례에 모이지요. 전봉군 장군은 각지 농민군에 편지를 보내 이곳에 집결하게 하고 싸울 무기와 군량미를 모읍니다. 물론 농민군을 기다리던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공주 우금치 고개에 설치된 일본군 기관총이었지요. 대나무 창으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일제강점기가 되면 삼례에 전북 지역에서 거둬온 쌀을 모아두는 대규모 양곡창고가 지어집니다. 삼례에 모인 쌀은 삼례역에서 군산항으로 이동하고 거기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실려 갔습니다. 삼례역은 일제가 쌀을 빼앗아 가기 위해 만든 선로였던 거지요. 1920년대 지어졌던 창고들은 2010년까지 곡식 저장고로 쓰이다 이후 기능을 잃고 방치되게 됩니다.
비어 있던 양곡창고는 평생 책을 만들고 모아 온 박대기 이사장을 만나 2017년 책마을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는 1999년 영월에서 개관했던 책 박물관을 삼례로 옮겨오고, 완주군과 협력하여 책공방, 책 박물관, 헌책방, 북카페, 그림책 박물관이 모인 책마을을 완성하게 되지요.

전시장에는 쐐기문자부터 타자기에 이르는 인류 문자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으로 가득한 헌책방에는 빛바랜 종이 냄새가 한 가득입니다.

삼례 그림책 미술관에서
그림책미술관은 아주 오래 전 고급스런 장정으로 만든 그림책과 원화를 전시하는 곳입니다. 동화책 표지를 펼쳐지듯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나무 기차와 미끄럼틀, 숲속 작은 오두막이 우리가 그림책 속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합니다. 머리 위에는 요정이 날고 있고, 책 읽는 소녀를 지나 2층에 오르면 1800년대 후반 활동하던 월터 크레인, 랜돌프 칼테곳, 케이트 그린어웨이의 그림책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피리 부는 사나이』 같은 그림도 보이고요.
책마을 내 '문자의 바다' 전시에서
2. 전주 팔복동 이팝나무 그림책 도서관
삼례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전주역에 내려 택시로 15분. 공장 기계 소리가 멈춘 지 오래인 팔복동 전주산업단지에 도착합니다. 팔복동은 전주역을 가운데 두고 한옥마을과 정반대 방향에 있습니다. 조선 시대 여덟 선비가 함께 공부하고 함께 급제했다 하여 팔복동이지만, 1969년 전주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삼양사, 코카콜라, BYC, 문화연필, 썬전자 등 7,80년대 경제성장기 시절 전주 경제의 최전선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산업열차가 다니던 기찻길. 팔복예술공장이라 쓰인 굴뚝 같은 커다란 기둥이 보입니다. 이곳은 1979년부터 13년 동안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하던 ‘쏘렉스’ 공장이 있던 곳입니다. 한때 400명 넘는 직원들이 일하며 아시아 여러 나라로 수출을 했다고 하는데, 1992년 기술 발전에 따라 사라진 테이프와 함께 추억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팔복예술공장은 2017년 개관한 복합 문화예술 공간입니다. 1층에는 열 명 안팎의 작가들이 작업을 하는 레지던시 공간과 카페가 있고, 그 위층은 전시공간입니다.


그림책 미술관은 바로 옆 동에 있습니다. 5월이면 도서관 앞 도로에 이팝나무가 활짝 피어 이름도 ‘이팝나무 그림책 도서관’입니다. 작은 놀이터 옆 계단을 올라 그림책 도서관으로 들어갑니다. 지금은 ‘새, 나무에 앉다’라는 주제로 김선남, 이승원 작가의 그림책과 원화가 함께 전시되고 있습니다. 올해 말까지 계속될 거라고 하네요. 전시되는 책 말고도 읽고 싶은 그림책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림책 두 권을 꺼내 도서관 안쪽 나무 계단에 앉습니다. 두 아이가 옆에서 소곤소곤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팝나무 그림책 도서관에서
농업시대의 삼례, 공업시대의 팔복. 한 시대의 활기는 다음 시대의 적막이 되기 마련이지만, 그 적막함은 우주를 떠다니는 유성 같은 침묵이 아니라 다음 시대 벌어질 새로운 활기를 준비하는 다부진 침묵이었나 봅니다. 산업시대를 지나 폐어가 되었던 공장, 창고들은 문화예술의 시대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몇 세대가 지난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우리의 마음, 동심이 놓여 있습니다.

레지던시 작가들의 전시
의도된 것일까요, 너무 자연스러워 그렇게 되고 만 것일까요? 삼례, 팔복 이름도 낯선 공간, 동화책이 있는 마을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전주역 앞에 있는 여행자도서관에서 커다란 팝업북을 펼쳐 놓고 기차가 오길 기다립니다. 이제는 낯선 기억이 되어 버린 우리의 동심을 만나러 삼례, 팔복을 찾아가보는 건 어떨까요?


전주역 앞 여행자도서관에서
글/사진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 『노자가 사는 집』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
기차를 타고 그림책을 보러 떠납니다. 우리가 도착할 곳은 완주군 삼례읍과 전주시 팔복동 두 곳입니다. 둘 다 귀에 익은 동네는 아니네요.
1. 완주 삼례 그림책 미술관
삼례는 호남평야를 이루는 만경평야 한가운데서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교통 요지였습니다. 지금의 삼례교는 서울을 떠나 전주로 들어가는 양반들이 하인들의 등에 업혀 만경강을 건넜다 해서 양반다리라 불렀다고 해요. 그래서 이곳에 호남에서 거둬들인 쌀과 물품들을 모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습니다.
1892년 10월 동학교도들은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고 포교의 자유를 달라며 이곳 삼례에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었습니다. 충청도 교도들도 모이려면 삼례가 가장 적당했던 거지요. 전봉준 장군을 위시한 동학교도들은 삼례에서 전라감사에 항의 글을 보낸 뒤 직접 한양으로 올라가 광화문 앞에서 상소를 올립니다.
그리고 대망의 1894년 탐악한 정부 관료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낸 동학 1차 봉기를 마치고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다시 삼례에 모이지요. 전봉군 장군은 각지 농민군에 편지를 보내 이곳에 집결하게 하고 싸울 무기와 군량미를 모읍니다. 물론 농민군을 기다리던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공주 우금치 고개에 설치된 일본군 기관총이었지요. 대나무 창으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일제강점기가 되면 삼례에 전북 지역에서 거둬온 쌀을 모아두는 대규모 양곡창고가 지어집니다. 삼례에 모인 쌀은 삼례역에서 군산항으로 이동하고 거기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실려 갔습니다. 삼례역은 일제가 쌀을 빼앗아 가기 위해 만든 선로였던 거지요. 1920년대 지어졌던 창고들은 2010년까지 곡식 저장고로 쓰이다 이후 기능을 잃고 방치되게 됩니다.
비어 있던 양곡창고는 평생 책을 만들고 모아 온 박대기 이사장을 만나 2017년 책마을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는 1999년 영월에서 개관했던 책 박물관을 삼례로 옮겨오고, 완주군과 협력하여 책공방, 책 박물관, 헌책방, 북카페, 그림책 박물관이 모인 책마을을 완성하게 되지요.
전시장에는 쐐기문자부터 타자기에 이르는 인류 문자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으로 가득한 헌책방에는 빛바랜 종이 냄새가 한 가득입니다.
삼례 그림책 미술관에서
그림책미술관은 아주 오래 전 고급스런 장정으로 만든 그림책과 원화를 전시하는 곳입니다. 동화책 표지를 펼쳐지듯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나무 기차와 미끄럼틀, 숲속 작은 오두막이 우리가 그림책 속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합니다. 머리 위에는 요정이 날고 있고, 책 읽는 소녀를 지나 2층에 오르면 1800년대 후반 활동하던 월터 크레인, 랜돌프 칼테곳, 케이트 그린어웨이의 그림책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피리 부는 사나이』 같은 그림도 보이고요.
2. 전주 팔복동 이팝나무 그림책 도서관
삼례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전주역에 내려 택시로 15분. 공장 기계 소리가 멈춘 지 오래인 팔복동 전주산업단지에 도착합니다. 팔복동은 전주역을 가운데 두고 한옥마을과 정반대 방향에 있습니다. 조선 시대 여덟 선비가 함께 공부하고 함께 급제했다 하여 팔복동이지만, 1969년 전주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삼양사, 코카콜라, BYC, 문화연필, 썬전자 등 7,80년대 경제성장기 시절 전주 경제의 최전선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산업열차가 다니던 기찻길. 팔복예술공장이라 쓰인 굴뚝 같은 커다란 기둥이 보입니다. 이곳은 1979년부터 13년 동안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하던 ‘쏘렉스’ 공장이 있던 곳입니다. 한때 400명 넘는 직원들이 일하며 아시아 여러 나라로 수출을 했다고 하는데, 1992년 기술 발전에 따라 사라진 테이프와 함께 추억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팔복예술공장은 2017년 개관한 복합 문화예술 공간입니다. 1층에는 열 명 안팎의 작가들이 작업을 하는 레지던시 공간과 카페가 있고, 그 위층은 전시공간입니다.
그림책 미술관은 바로 옆 동에 있습니다. 5월이면 도서관 앞 도로에 이팝나무가 활짝 피어 이름도 ‘이팝나무 그림책 도서관’입니다. 작은 놀이터 옆 계단을 올라 그림책 도서관으로 들어갑니다. 지금은 ‘새, 나무에 앉다’라는 주제로 김선남, 이승원 작가의 그림책과 원화가 함께 전시되고 있습니다. 올해 말까지 계속될 거라고 하네요. 전시되는 책 말고도 읽고 싶은 그림책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림책 두 권을 꺼내 도서관 안쪽 나무 계단에 앉습니다. 두 아이가 옆에서 소곤소곤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팝나무 그림책 도서관에서
농업시대의 삼례, 공업시대의 팔복. 한 시대의 활기는 다음 시대의 적막이 되기 마련이지만, 그 적막함은 우주를 떠다니는 유성 같은 침묵이 아니라 다음 시대 벌어질 새로운 활기를 준비하는 다부진 침묵이었나 봅니다. 산업시대를 지나 폐어가 되었던 공장, 창고들은 문화예술의 시대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몇 세대가 지난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우리의 마음, 동심이 놓여 있습니다.
레지던시 작가들의 전시
의도된 것일까요, 너무 자연스러워 그렇게 되고 만 것일까요? 삼례, 팔복 이름도 낯선 공간, 동화책이 있는 마을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전주역 앞에 있는 여행자도서관에서 커다란 팝업북을 펼쳐 놓고 기차가 오길 기다립니다. 이제는 낯선 기억이 되어 버린 우리의 동심을 만나러 삼례, 팔복을 찾아가보는 건 어떨까요?
전주역 앞 여행자도서관에서
글/사진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 『노자가 사는 집』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