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그 높은 곳에 새겨진 억새 풍경

계절 풍경이 있습니다. 지금 이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 개나리, 진달래, 무성한 초록, 단풍, 억새, 눈꽃. 여기서 억새는 멀고 높은 곳을 향해 체력과 열정을 쏟아야 닿을 수 있는 풍경입니다. 정선 민둥산, 울주 간월산. 다들 왜 그리 높은 곳에 평온한 풍경을 숨겨 두었을까요? 바닥을 드러낸 체력이 헉헉대는 푸념과 자연의 경이 앞에 터져 나오는 탄성이 한몸에 공존합니다.


간월재 억새 평원


서울역에서 울산역까지 두 시간, 울산역에서 간월산 입구까지 택시로 10분. 복합웰컴센터라는 등산로 입구에서 간월산 억새 평원까지는 두 시간 예상입니다. 전국 억새 군락지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기 때문에 해 뜨는 시간에 맞춰서 간월재를 오르기로 합니다. 전날 간월산 온천에서 미리 몸을 풀었습니다. 일어나는 시간은 새벽 4시, 가방에 두툼한 점퍼와 물 1리터를 넣고 등산로를 따라 걷습니다.

 

간월산이 포함된 영남알프스 일대는 조선 시대 호랑이 출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대대적인 토벌로 사라지고 마지막 표범이 1960년에 잡혔다고 하네요. 한국전쟁 전후로는 비정규 유격대 파르티잔, 한국식으로는 빨치산 활동 지역이 됩니다. 이념에 경도되어 빨치산이 된 사람도 있는가 하면 미 군정과 친일세력에 반발하여 산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간월재 억새 평원

1940년대 말부터 50년대 중반까지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이 벌어지는데 빨치산 부대는 토벌을 피해 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듭니다. 그런데 아이러니라 할까요? 빨치산이 숨어드는 산에는 대개 화전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웰컴 투 동막골〉 같은 상황은 아니었나 봅니다. 노동자 해방을 위해 일어선 사람들이 영세민 중에서도 가장 영세한 화전민에 기대 살아가는 상황이라니, 인간 삶이란 게 참 뜻대로 안 됩니다.

 

화전민은 평균 6년에 한 번 자리를 옮겨 다니며 산에 불을 지르고 밭을 일궈 먹고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영세한 농가 수익이 연평균 5만 원 정도였는데, 화전민은 10분의 1수준인 5천 원이었다 합니다. 평지에서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어 산에 기대 살아가지만, 그 결과 이들이 지나간 숲은 모두 황무지가 되고 맙니다. 특히 능선같이 일조량 많고 바람 많이 부는 건조한 지역에선 이전의 식생이 자생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수분 이용 효율이 매우 높은 억새만 살아남게 됩니다. 억새의 생명력은 불이나 낫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화전민이 지나간 산 정상 능선부가 억새 평원이 되는 건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딱 그만큼 인위적이기도 했고요.

 

간월재 억새 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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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이 토벌되고 얼마 되지 않아 화전민들도 정리 대상이 됩니다. 1973년부터 산림 복구, 농경지 정리, 고속도로 건설을 목적으로 본격적인 화전민 정리 사업이 시작됩니다. 가장 모범적이라 해야 할까요, 아니면 강압적이라 해야 할까요. 화전민 대다수가 살던 강원도가 실적이 가장 높았습니다. 화전민들은 그 자리에 정착하거나 도시로 강제 이주하게 되는데, 정착지는 자신들이 놓은 불로 산사태, 홍수에 취약했고, 지력이 다해 농사가 어려웠습니다. 도시 이주민들에게는 이주 보상금이 너무 적었고, 축사를 지으면 소를 준다고 했으나 하루 벌이 도시 빈민이 축사 딸린 집에서 살 수는 없었지요.

 

정선군 민둥산의 억새 평원은 화전민이 살던 지역은 아닙니다. 대신 지역 주민들이 산나물이 잘 자라게 하려고 일이 년에 한 번 불을 놓았다고 합니다. 방화 금지 이후 20년이 지나자 참억새 군락이 자생했고, 1996년부터는 정선군에서 억새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생태계가 회복되며 억새 군락이 좁아지는 형세라 오히려 억새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식물들을 제거하는 사업을 벌일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란 참 오묘하면서도 쉴 틈이 없습니다.

 

민둥산 억새 평원


청량리역에서 민둥산 역까지 무궁화호로 3시간, 역에서 민둥산 정상까지 2시간. 여기에 하산과 돌아오는 기차 시간까지 포함하면 아침 9시에 출발하여 저녁 8시에 도착하는 알차고 고된 하루입니다.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되는 속도는 간월산의 두 배 정도 됩니다. 하지만 빠르게 탕진한 상태에서 억새 평원이 눈에 들어오면 또 급속도로 충전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지요.

 

민둥산 억새 평원

민둥산 역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면 화암약수가 나옵니다. 화암면은 화암동굴, 화암약수, 몰운대, 광대곡, 외경심 느껴지는 풍경 가득한 곳이지만, 억새를 보고 오겠다는 작은 마음으로 시작한 여정이라면 시도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강원도 산길에선 항상 호랑이 안 만나도 죽는 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민둥산 억새 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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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와 지초 향기 같은 사이라는 지란지교(芝蘭之交)라는 말이 있지요. 난초와 지초의 섬, 난지도는 조선 시대 ‘꽃섬’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1978년까지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해 쓰레기 매립장이 되면서 난지도는 하루 평균 8톤 트럭 3,000대가 쓰레기를 부리는 쓰레기 산이 됩니다. 80년대 영화를 보면 난지도 쓰레기 산에서 고물을 주워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대도시 서울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다시 말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난지도였습니다. 1993년 매립이 끝나지만 쓰레기 산은 썩어가고, 침출수는 한강을 오염시키고, 유해 가스는 망원동, 성산동 민가를 위협하고 있었지요.

 

하늘공원 억새 평원


침출수를 막고 흙으로 쓰레기 산을 덮은 뒤 가스 처리 시설을 만듭니다. 그 위에 나무를 심고 잔디를 심고 억새를 심었습니다. 상암동 하늘공원은 인간 삶 역사가 그대로 산이 된 곳입니다. 그리고 그 평평한 꼭대기는 줄을 서서 오르는 억새 평원이 되었고요. 이 가을 가장 아름다운 자연 풍경들 어느 하나 인간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풍경 그대로를 긍정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하늘공원 억새 평원

하지만 억새 풍경이 자연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도 자연이니까요. 열정적으로 끓어오르던 한 시기가 지나가고 이제 좀 평안해지는 시기, 그런 가을, 혹은 나이 듦. 가을 설악의 도도한 풍광을 두고 억새같이 느닷없고 밋밋한 풍경에서 마음이 누그러지는 건 여름이 지난 10월의 자연스러운 행로인지도 모릅니다.


하늘공원 억새 평원




글 이주호 / 사진 김문, 이주호, 신태진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 『노자가 사는 집』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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