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서울에서 찾는 백제의 흔적 #1 - 몽촌토성

서울에서 역사 산책을 하려면 종로로 가라 하지요. 경복궁을 위시한 여러 궁궐에 고요함과 엄숙함이 공존하는 종묘까지. 역사의 현장에서 몇 발자국만 걸어 나오면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시가지가 에워싸며 서울의 만화경 같은 얼굴이 펼쳐집니다. 서울을 산책할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에게도, 올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종로는 최선의 선택지입니다.


하지만 시계를 훨씬 뒤로 돌리면 어떨까요? 서울은 조선과 대한민국의 수도였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서울은 무려 기원전부터 백제의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백제? 공주와 부여가 기반 아니었나? 사실 백제가 공주와 부여를 수도로 삼았던 기간은 합하여 185년. BC 18년 건국부터 475년 고구려의 침공에 밀려 공주로 천도하기까지 거의 5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백제는 서울, 정확히 말하면 한강 유역에 뿌리를 두었습니다. 서울에도 백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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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 중 백제는 이미지가 좀 옅습니다. 천하를 호령했던 고구려, 최후의 승자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 그런데 백제는? 의자왕과 있지도 않았던 삼천 궁녀 때문에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나라로 오인되는 경향도 있지만, 백제가 고급문화를 일찍 발달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한강 유역에 터를 잡은 덕분이었지요. 농사가 잘 되니 식량 걱정 없이 부를 쌓을 수 있었고, 서해와 남해까지 장악하며 해상 무역으로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또, 그렇게 받아들인 고급 문물을 지방 세력은 물론 신라, 가야, 왜 등 주변국에 전파하여 위상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한강 유역에 있던 백제의 첫 왕성은 ‘위례성’이었고, 이후 위례성이 발전해 ‘한성’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한성은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으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하며 당시 많은 성이 그랬듯 흙으로 지은 ‘토성’이었습니다. 오늘 찾아갈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몽촌토성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올림픽공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각각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에 있습니다. 1980년대 이 지역이 개발되며 두 토성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데요, 풍납토성에는 빌라와 주택이 대거 들어서고 몽촌토성은 올림픽공원 안에 보존됩니다. 당시에는 몽촌토성이 더 중요하다고, 그러니까 한성백제의 첫 왕성인 위례성이 몽촌토성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재개발을 하며 말 그대로 땅의 ‘뚜껑을 열어 보니’ 이미 주택가가 된 풍납토성에서 훨씬 더 많은 백제의 유물이 나왔습니다. 풍납토성이야말로 위례성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고 하네요.


실제로 풍납토성은 1세기부터 지어져 세 번의 증축을 거듭해 3세기 중반에서 4세기 초반에 완공되었습니다. 몽촌토성은 그보다 늦은 4세기 중반에 완성되었고요. 또, 몽촌토성은 높은 지대에 세워져 주변을 내려다보며 감시할 수 있는, 군사적 목적이 강했다고 합니다. 한성에는 북성과 남성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풍납토성이 궁궐이 있던 북성, 몽촌토성이 별궁이 있던 남성이었습니다.


한성백제박물관


서울 백제 여행의 시작은 한성백제박물관입니다. 2012년 개관한 한성백제박물관은 백제를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 다루는 고대문화 전문 박물관입니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는데요, 풍납토성의 실제 성벽이 마치 거대한 입체화처럼 로비 벽에 붙어 있습니다. 높이가 거의 10m에 달했다는 풍납토성의 규모가 실감이 됩니다. 역사적으로도, 장식적으로도 기대감을 부풀리기에 충분한 전시물입니다.


한성백제박물관 로비에서 볼 수 있는 실제 풍납토성의 단면


한성백제박물관에는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실제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지방 주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편이고, 이곳에서는 주로 그 복제품들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옛 모습을 복원한 디오라마입니다. 정교한 디오라마로 두 토성의 위치와 규모, 형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몽촌토성, 풍납토성을 재현한 디오라마


디오라마를 유심히 관찰하면 다붓다붓 모인 집 대부분이 초가집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민가는 구덩이를 파고 집을 짓는 수혈식이 많았고, 바닥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우는 지상식 건물은 관청이나 신전 등 소수 건물뿐이었다고 합니다. 지붕도 주요 건물에 한하여 기와와 초가를 함께 사용했지요. 박물관에는 한성백제 시대의 사당도 복원해 두었는데, 여기에도 기와와 초가를 같이 얹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당은 나중에 가게 될 ‘경당역사문화공원’에서 그 터를 볼 수 있습니다. 왕이 지내던 왕궁만큼은 지붕 전체에 기와를 얹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 왕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기와와 초가를 같이 얹은 지붕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백제를 수식하는 형용사는 ‘세련되다’, ‘우아하다’ 같은 말들인데요, 의복에 있어서도 장신구에 있어서도 그들의 미감을 잘 드러냈습니다. 그 결정체가 복제품으로 전시된 금동왕관과 금동신발, 그리고 금동대향로입니다. 금관 하면 신라가 떠오르지요? 동시대로 보면 백제의 세공 기술이 더 뛰어났다고 합니다. 동판에 용과 같은 상상의 동물을 작게 새겨 넣은 기술은 지금도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특히 국보로도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언젠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실물을 꼭 만나보시면 좋겠습니다.


복제품으로 전시된 금동대향로, 금동왕관, 금동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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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박물관을 나서면 이제 몽촌토성을 오를 차례입니다. 올림픽공원에 자주 가신다면 이미 몽촌토성을 밟아보신 셈입니다. 높은 언덕, 혹은 나지막한 산이라고만 생각했던 올림픽공원의 경사가 바로 몽촌토성의 성벽이니까요. 초봄, 쌀쌀한 바람이 아직 잠이 든 노란 잔디 위로 미끄러집니다. 바람이 잠잠해질 때마다 얼굴에 닿는 포근한 기운은 곧 본격적인 봄이 올 것이라고 말해 주네요. 언덕을 오르기에 적당한 날씨입니다.



공원의 남서쪽부터 반원형으로 길게 이어지는 몽촌호수는 한때 몽촌토성을 지켜주던 해자였습니다. 출사 장소로도 잘 알려진 ‘나 홀로 나무’가 있는 북서쪽 최정상부는 공원 주변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책 코스의 절정이고요. 적군의 침입을 감시하고 방어한다는 몽촌토성의 축조 배경을 실감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도심 속 휴식 장소로 이만한 곳이 또 없겠다는 생각만 드네요.


몽촌토성 주변을 둘러싼 해자를 복원한 몽촌호수


올림픽공원 내에는 한성백제의 집터를 전시한 ‘백제집자리전시관’과 몽촌토성의 역사를 집중 조명한 ‘몽촌역사관’도 있습니다. 특히 몽촌역사관에는 아이들이 체험할 거리가 많으니 가족과 함께라면 꼭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역시 올림픽공원 내 있는 백제집자리전시관과 몽촌역사관


여러 박물관과 전시관이 아니었으면 이곳에 거의 2천 년 전에 쌓은 토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만큼 올림픽공원 내에서 육안으로 몽촌토성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제 방문할 풍납토성은 상황이 더 복잡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점이 오히려 이번 서울 백제 산책길에 양감을 더할지도 모르지만요.


공원이자 산책로가 된 몽촌토성


 

※ 서울에서 찾는 백제의 흔적: 풍납토성 보기




글/사진 신태진

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www.instagram.com/ecrire_lire_vivr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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