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릭스에서 떠나다
독립문을 사이에 두고 인왕산과 마주보는 안산자락에서 발원한 만초천(蔓草川)을 따라 걷습니다. 한강을 타고 들어온 배들이 만초천 물길을 따라 도성 가장 가까운 서소문 근방에 이르러 곡식, 생선, 짐을 부리고 시장을 벌였습니다. 왕명을 받은 조선 관료들이 남대문을 나와 만초천 배다리를 건너 청파역참에서 남부 지역 각지로 흩어져 가기도 했고요.
청파 배다리터를 알리는 표지석 / 『청파·서계; 서울역 뒷동네』(2017), 24쪽
독립문에서 종로 방향으로 길을 건너 교남 파출소 앞에 이르면, 이 근방 어딘가 만초천 상류 첫 번째 다리 석교(石橋)가 있었다고 합니다. 길을 따라 스위스 대사관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경교장(京橋莊)에 이릅니다. 상해를 떠나 미군정의 온갖 홀대, 방해를 받으며 서울에 도착한 김구 선생이 건물주 최창학에게 기부 받아 4년 가까이 머물던 곳입니다.
경교장
그런데 이 건물의 원래 이름은 다케조에 소오(竹添莊)였습니다. 그 지역 이름이 전 일본공사 다케조에의 이름을 딴 다케조에 마치였고, 최창학에게는 그 이름이 적당했겠지요. 경교장은 김구 선생이 만초천 두 번째 다리 경교(京橋)에서 이름을 따 붙인 새 이름입니다.
서대문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 이화여고 앞 담벼락을 따라 걷습니다. 이화여고는 조선 첫 열차 노선인 경인선의 종착역 서대문 정거장이 있던 곳입니다. 경부선이 개통하고 남대문 정거장, 경성역이 차례로 만들어지며 사라지게 되었지요.
정동길에서
줄곧 만초천을 따라 걷고는 있지만 아쉽게도 물길은 흔적도 없습니다. 조선 한성부의 경계이기도 했던 중랑천과 홍제천이 아직 서울 생활 곁에서 생생하게 흐르고 있고, 청계천이 현대 정치 한가운데 굵은 물줄기를 새겨 놓고 있는 것과 달리 아주 오랫동안 한성의 삶을 굽이치던 만초천은 완전히 잊혔습니다. 수산은 노량진으로, 농산 과일은 가락동으로 옮겨가기 직전 중림동 시장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만초천 물길도 기억하실 수 있겠네요.
1966년, 만초천 복개 공사 장면 / 국가기록원 제공
드라마 〈나의 아저씨〉 팬이라면 이런 대사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네요. “이 건물 위치 원래 하천이야. 물길 따라 지어가지고 이렇게 휘었잖아. 복개천 위에 지어가지고 재건축도 못하고, 그냥 이렇게 있다가 수명 다하면 없어지는 거야. 터를 잘못 잡았어. 그것도 나랑 같아.” 이선균 배우의 목소리가 들리나요? 그가 말하는 아파트는 서소문아파트, 물길은 바로 만초천입니다. 1972년 완공해 올해로 딱 50년을 채운 서소문아파트는 개천 위에 지어졌기에 땅 소유권 대신 오히려 하천 이용료를 내야 하는 곳이지요. 하지만 ‘아저씨’의 나긋한 자조와 다르게 서소문아파트 재개발이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서소문아파트
건물이 물길을 따라 휜 것과 달리 만초천 물길은 인간 거주의 역사에 따라 직선화를 거듭하다 1967년 남영동 굴다리에서 삼각지에 이르는 구간이 복개되며 완전히 사라집니다. 한강의 역류로 홍수가 거듭되고, 서울 인구가 불어나며 오염이 심각해졌고, 결정적으로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선로와 겹치기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요. 한강둔치 원효대교 아래에 서면 만초천 합류 지점이 보이긴 합니다.
서대문 경찰서 앞에서 열차 건널목을 지나 서소문 역사공원에 이르면 만초천의 역사가 아주 참혹해집니다. 서소문 밖은 풍수지리에 따라, 혹 점잖게는 ‘사직단 서쪽’이라는 중국 옛 문헌에 따라 처형장이 들어섭니다. 시구문이라 해서 광희문과 서소문은 시체가 나오는 문이었는데, 서소문은 시체가 되러 나오는 문이기도 했지요.
만초천 모래사장은 전국 각지에서 잡아들인 반란자들이 머리를 내놓는 곳이었습니다. 시장이 서는 곳이라 구경꾼이 많았고, 그만큼 사람들에게 경각심, 공포심을 주기에 알맞은 곳이었지요. 서소문역사공원 북쪽 어딘가 만초천 네 번째 다리 이교坭橋(진흙다리) 근처에는 망나니가 칼을 씻었다는 망나니우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해방 직후 제작된 서울의 지도에 '욱천'이라는 일제가 지은 이름으로 남아 있는 만초천
조선의 개혁가라는 수식보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 시청역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군기시(병기를 제조하는 관청) 앞에서 처형됐다는 기록이 더 신빙성 있긴 합니다. 1811년 지역차별, 세도정치를 비판하면서 난을 일으켰던 홍경래의 동지들, 1882년 급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다 급기야 나라를 가족 기업으로 취급했던 민 씨 일가에 대한 투쟁으로까지 번졌던 임오군란의 하급 군인들, 최초의 근대식 개혁을 시도했던 갑신정변의 혁명가들, 인간존엄 세상을 꿈꿨던 동학혁명의 지도자들이 모두 이곳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서소문공원 지하 서소문성지박물관은 정조가 죽은 이듬해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김대건 신부가 처형됐던 1846년 병오박해, 병인양요의 시발이 되었던 1866의 병인박해에 이르는 기간 동안 수없이 처형된 천주교도들을 추모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당고개 성지, 새남터 성지, 양화진 성지와 다르게 이곳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단순히 종교적 희생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한국의 천주교 박해는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 노론 정권이 이가환, 정약용 등 정조가 총애하던 남인 인재들의 싹수를 말리기 위한 정치 학살이었습니다. 그들이 내세웠던 죄목도 주자학에 위배되는 학문, 사학邪學을 했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서소문성지박물관은 인간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든 그로서 차별 받거나 박해 받지 않아야 한다는 분명한 사상적 목표를 내세웁니다. 흔한 종교 성지가 아니라 이 나라 유일한 인권 성지입니다. 이곳을 채우는 회화, 조각, 미디어아트, 공간 구성 모두가 종교적 영성이 아닌 뭉클한 인간적 감동, 존엄, 존중을 일깨웁니다. 이곳에서 가장 종교적 색체가 짙은 예배당은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정약종은 배교 회유를 거절하고 1801년 만초천변에서 큰아들 정철상과 함께 목이 잘렸습니다. 정하상은 사제가 없는 한국 천주교를 이끌며 외국인 신부를 데려오는 데 성공합니다. 그 결과가 김대건이라는 최초의 조선인 신부를 길러낸 데까지 이르지요. 하지만 결국엔 아버지와 형이 간 길을 따라 이곳 서소문 형장에서 사형을 당합니다.
이들의 처절한 죽음을 처연히 내려다보는 약현 언덕 꼭대기에 1893년 완공된 한국 최초의 성당 약현 성당이 있습니다. 갈현동 쌍굴다리까지 걸어가 만초천의 굽의 물길을 바라봐도 좋겠지만, 만초천 하루 산책으로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약현성당 바로 아래에는 1971년 성직자들의 주거를 위해 약현성당에서 발주해 지어진 성요셉 아파트가 있습니다.
약현성당
중림시장 영세 상인들이 비탈길을 따라 합판 덧대 만든 창고를 헐고 새로 지은 중림창고와 함께 뜻밖이지만 매우 아름다운 산책로를 만들어 냅니다. 책방 여기서울 149쪽, 커피방앗간, 진짜 방앗간, 오르락내리락 둘러 볼 곳도 많습니다. 행여 힘이 남았다면 7017서울로를 넘어 남대문시장으로 가보는 것도 좋겠네요.
글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 『노자가 사는 집』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
브릭스에서 떠나다
독립문을 사이에 두고 인왕산과 마주보는 안산자락에서 발원한 만초천(蔓草川)을 따라 걷습니다. 한강을 타고 들어온 배들이 만초천 물길을 따라 도성 가장 가까운 서소문 근방에 이르러 곡식, 생선, 짐을 부리고 시장을 벌였습니다. 왕명을 받은 조선 관료들이 남대문을 나와 만초천 배다리를 건너 청파역참에서 남부 지역 각지로 흩어져 가기도 했고요.
청파 배다리터를 알리는 표지석 / 『청파·서계; 서울역 뒷동네』(2017), 24쪽
독립문에서 종로 방향으로 길을 건너 교남 파출소 앞에 이르면, 이 근방 어딘가 만초천 상류 첫 번째 다리 석교(石橋)가 있었다고 합니다. 길을 따라 스위스 대사관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경교장(京橋莊)에 이릅니다. 상해를 떠나 미군정의 온갖 홀대, 방해를 받으며 서울에 도착한 김구 선생이 건물주 최창학에게 기부 받아 4년 가까이 머물던 곳입니다.
경교장
그런데 이 건물의 원래 이름은 다케조에 소오(竹添莊)였습니다. 그 지역 이름이 전 일본공사 다케조에의 이름을 딴 다케조에 마치였고, 최창학에게는 그 이름이 적당했겠지요. 경교장은 김구 선생이 만초천 두 번째 다리 경교(京橋)에서 이름을 따 붙인 새 이름입니다.
서대문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 이화여고 앞 담벼락을 따라 걷습니다. 이화여고는 조선 첫 열차 노선인 경인선의 종착역 서대문 정거장이 있던 곳입니다. 경부선이 개통하고 남대문 정거장, 경성역이 차례로 만들어지며 사라지게 되었지요.
정동길에서
줄곧 만초천을 따라 걷고는 있지만 아쉽게도 물길은 흔적도 없습니다. 조선 한성부의 경계이기도 했던 중랑천과 홍제천이 아직 서울 생활 곁에서 생생하게 흐르고 있고, 청계천이 현대 정치 한가운데 굵은 물줄기를 새겨 놓고 있는 것과 달리 아주 오랫동안 한성의 삶을 굽이치던 만초천은 완전히 잊혔습니다. 수산은 노량진으로, 농산 과일은 가락동으로 옮겨가기 직전 중림동 시장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만초천 물길도 기억하실 수 있겠네요.
1966년, 만초천 복개 공사 장면 / 국가기록원 제공
드라마 〈나의 아저씨〉 팬이라면 이런 대사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네요. “이 건물 위치 원래 하천이야. 물길 따라 지어가지고 이렇게 휘었잖아. 복개천 위에 지어가지고 재건축도 못하고, 그냥 이렇게 있다가 수명 다하면 없어지는 거야. 터를 잘못 잡았어. 그것도 나랑 같아.” 이선균 배우의 목소리가 들리나요? 그가 말하는 아파트는 서소문아파트, 물길은 바로 만초천입니다. 1972년 완공해 올해로 딱 50년을 채운 서소문아파트는 개천 위에 지어졌기에 땅 소유권 대신 오히려 하천 이용료를 내야 하는 곳이지요. 하지만 ‘아저씨’의 나긋한 자조와 다르게 서소문아파트 재개발이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서소문아파트
건물이 물길을 따라 휜 것과 달리 만초천 물길은 인간 거주의 역사에 따라 직선화를 거듭하다 1967년 남영동 굴다리에서 삼각지에 이르는 구간이 복개되며 완전히 사라집니다. 한강의 역류로 홍수가 거듭되고, 서울 인구가 불어나며 오염이 심각해졌고, 결정적으로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선로와 겹치기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요. 한강둔치 원효대교 아래에 서면 만초천 합류 지점이 보이긴 합니다.
서대문 경찰서 앞에서 열차 건널목을 지나 서소문 역사공원에 이르면 만초천의 역사가 아주 참혹해집니다. 서소문 밖은 풍수지리에 따라, 혹 점잖게는 ‘사직단 서쪽’이라는 중국 옛 문헌에 따라 처형장이 들어섭니다. 시구문이라 해서 광희문과 서소문은 시체가 나오는 문이었는데, 서소문은 시체가 되러 나오는 문이기도 했지요.
만초천 모래사장은 전국 각지에서 잡아들인 반란자들이 머리를 내놓는 곳이었습니다. 시장이 서는 곳이라 구경꾼이 많았고, 그만큼 사람들에게 경각심, 공포심을 주기에 알맞은 곳이었지요. 서소문역사공원 북쪽 어딘가 만초천 네 번째 다리 이교坭橋(진흙다리) 근처에는 망나니가 칼을 씻었다는 망나니우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해방 직후 제작된 서울의 지도에 '욱천'이라는 일제가 지은 이름으로 남아 있는 만초천
조선의 개혁가라는 수식보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 시청역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군기시(병기를 제조하는 관청) 앞에서 처형됐다는 기록이 더 신빙성 있긴 합니다. 1811년 지역차별, 세도정치를 비판하면서 난을 일으켰던 홍경래의 동지들, 1882년 급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다 급기야 나라를 가족 기업으로 취급했던 민 씨 일가에 대한 투쟁으로까지 번졌던 임오군란의 하급 군인들, 최초의 근대식 개혁을 시도했던 갑신정변의 혁명가들, 인간존엄 세상을 꿈꿨던 동학혁명의 지도자들이 모두 이곳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서소문공원 지하 서소문성지박물관은 정조가 죽은 이듬해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김대건 신부가 처형됐던 1846년 병오박해, 병인양요의 시발이 되었던 1866의 병인박해에 이르는 기간 동안 수없이 처형된 천주교도들을 추모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당고개 성지, 새남터 성지, 양화진 성지와 다르게 이곳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단순히 종교적 희생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한국의 천주교 박해는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 노론 정권이 이가환, 정약용 등 정조가 총애하던 남인 인재들의 싹수를 말리기 위한 정치 학살이었습니다. 그들이 내세웠던 죄목도 주자학에 위배되는 학문, 사학邪學을 했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서소문성지박물관은 인간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든 그로서 차별 받거나 박해 받지 않아야 한다는 분명한 사상적 목표를 내세웁니다. 흔한 종교 성지가 아니라 이 나라 유일한 인권 성지입니다. 이곳을 채우는 회화, 조각, 미디어아트, 공간 구성 모두가 종교적 영성이 아닌 뭉클한 인간적 감동, 존엄, 존중을 일깨웁니다. 이곳에서 가장 종교적 색체가 짙은 예배당은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정약종은 배교 회유를 거절하고 1801년 만초천변에서 큰아들 정철상과 함께 목이 잘렸습니다. 정하상은 사제가 없는 한국 천주교를 이끌며 외국인 신부를 데려오는 데 성공합니다. 그 결과가 김대건이라는 최초의 조선인 신부를 길러낸 데까지 이르지요. 하지만 결국엔 아버지와 형이 간 길을 따라 이곳 서소문 형장에서 사형을 당합니다.
이들의 처절한 죽음을 처연히 내려다보는 약현 언덕 꼭대기에 1893년 완공된 한국 최초의 성당 약현 성당이 있습니다. 갈현동 쌍굴다리까지 걸어가 만초천의 굽의 물길을 바라봐도 좋겠지만, 만초천 하루 산책으로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약현성당 바로 아래에는 1971년 성직자들의 주거를 위해 약현성당에서 발주해 지어진 성요셉 아파트가 있습니다.
약현성당
중림시장 영세 상인들이 비탈길을 따라 합판 덧대 만든 창고를 헐고 새로 지은 중림창고와 함께 뜻밖이지만 매우 아름다운 산책로를 만들어 냅니다. 책방 여기서울 149쪽, 커피방앗간, 진짜 방앗간, 오르락내리락 둘러 볼 곳도 많습니다. 행여 힘이 남았다면 7017서울로를 넘어 남대문시장으로 가보는 것도 좋겠네요.
글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 『노자가 사는 집』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