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기획 기사
보니는 오랫동안 자고 있었다. 보니는 5년여 전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고자 구입한 1인용 텐트다. 보니와 함께라면 어디에서든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날씨만 춥지 않다면. 정처 없이 자유롭게, 걱정 없이 안전하게, 어느 때, 어디서든 보니와 함께라면 행복하리라 믿었다. 4년 전 무척 무덥던 여름날, 연립 옥상에서 딱 한 번 보니를 펼쳤다. 그게 전부였다. 보니는 주인을 잘못 만나 텐트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짐이 된 듯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보니처럼 내 삶도 정체성과 방향성 없이 하루하루 늙어갈 무렵, 기회가 찾아왔다. 울주 간월산. 지인은 그곳에 올라 사진만 찍어 오면 된다고 했다. 간월산을 시작으로 보니와 단 둘이 원 없이 영남알프스를 걸을 수 있는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셈이었다.

가을의 영남알프스 ⓒ하이트레일나인피크 박현우
집을 나서기 전까지, 전날에도, 전전날에도 수없이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수한 별이 내려다보는 고요한 밤 산정에 보니와 함께 있는 맑은 이미지는 점점 어두워져 갔다. 대신 질문이 기웃거렸다. ‘과연 보니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산길을 세 시간만 걸어도 무릎이 삐걱거리던 무렵이었다. 두려웠다. 산 어디쯤에서 보니를 증오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확신처럼 다가왔다.
보니를 두고 온 선택은 정말 탁월했다. 7월 말 오전 10시쯤, 햇살은 아스콘을 녹일 기세로 맹렬하게 쏟아졌다. 보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보다 미워하는 경험이 내게 절실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따가운 볕 속에서 그런 생각은 금세 시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나무 그늘로 피하고 싶었다. 들머리는 산악문화관 옆으로 잡았다. 초행길이라 신불산험로를 피해 3.9킬로미터 너머에 있는 간월산으로 향했다. 계곡물 소리가 멎자 본격적으로 오르막이 시작됐다. 오르막, 또 오르막, 다시 오르막. 회색 반바지가 보기 흉할 정도로 젖었다. 산객을 만나면 오해받을 정도로 얼룩져 있었다. 나뭇잎이 우거져 볕이 들지 않았지만 바람이 없었다. 한 시간이 채 안 된 듯싶은데 임도가 나타났다. 산에서는 계단만큼이나 싫은 게 시멘트 길인데, 아무래도 간월재까지 이어질 듯싶었다.

굽이굽이 돌아 나 있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비슷한 풍경이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커트 보니것의 『갈라파고스』에서 후렴구처럼 반복되던 말이 떠올랐다. “에이, 할 수 없지 뭐… 어쨌든 레온(소설 속 화자)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작곡할 재목은 아니었잖아.” 사람이 죽을 때마다 농담처럼 이어지는 말인데, 보통 사람으로 살아온 내겐 묘하게 다가오는 의미였다. 나도 그것의 리듬에 따라 임도의 지루함을 멋대로 변용했다. “에이, 할 수 없지 뭐, 어쨌든 간월산은 진짜 알프스가 아니잖아.” 들머리에서 잠시 머뭇거렸던 신불산 험로 이정표가 임도 모퉁이를 돌 때마다 떠올랐다. 나무 그늘이 사라질 때마다 후회가 밀려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임도 너머로 탁 트인 전망이 나타나고 목적지 부근이라 짐작되는 곳에 기암괴석이 보이자 우중충한 마음에 환한 빛이 출렁거렸다.

발걸음이 경쾌하면서도 여유로워졌다.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좀 더 천천히 걷고 싶은데도 모퉁이를 돌면 다른 얼굴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발걸음은 제멋대로였다. 그랬다. 설렘이 거기에 있었다. 어두운 방구석에 누워 있는 보니를 볼 때마다 내 인생에서 설렘이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마음을 눌렀다. 그런데 모처럼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설렘이 간월재 가는 임도에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바람. 우측 멀리 간월재 휴게소와 기암괴석이 나타나자 바람이 불었다. 20미터쯤 될까. 어귓담처럼 놓여 있는 간월재 입구에서 시원한 바람이 넘실댔다. 바람은 어귓담 너머 펼쳐져 있을 풍경을 마음껏 상상해 보라며 나를 멈춰 세웠다. 더 이상 발을 내딛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오래, 그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싶었다.

어귓담 안에는 아무것도 거칠 게 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임도만 따라 걷던 눈길은 방향을 잃었다. 사방이 탁 트인 풍경 앞에서 보니도, 교향곡 9번도 생각나지 않았다. 간월산의 바람은 죄다 간월재에 모여 있는 듯했다. 시원한 바람에 하아, 하는 짧은 탄성이 먼저 튀어나왔던가.(사진2741)

커트 보니것은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알렉스 삼촌이 무엇보다 개탄한 것은 사람들이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촌은 행복할 때마다 그 순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셨습니다. 한여름에 사과나무 아래서 레모네이드를 마실 때면 삼촌은 이야기를 끊고 불쑥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외치고 싶었다. 기쁨과 감동이 메아리로 돌아와 가슴을 두드릴 수 있도록 큰 소리로 고백하고 싶었다. 보니의 무게를 걱정하는 틈에 늙은 무릎쯤은 잊고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경이로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어리석고 가난한 마음으로 얼마나 오래 살아왔던가. “에이, 할 수 없지, 뭐. 어쨌든 걔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작곡할 재목은 아니었잖아.” 내가 죽은 후 누군가 나의 이력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농담에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느끼게 되는 절망과 위로가 손을 맞잡고 있었다. 죽음의 무게를 덜어준다고나 할까. 그래서 베토벤보다는 좀 더 자유롭고 재밌게 살 필요가 있다는 역설적인 충고 같다고나 할까. 베토벤은 멋진 곡들을 만들었지만 나는 간월재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했다. 베토벤도 경험하지 못한 순간을 오선지 한 줄도 채울 만한 재목이 아닌 내가, 느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작곡할 재목이 아닌 인생으로 계속 숨을 쉬어도 사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만 있다면 멋진 시간을 보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평범한 인생의 혜택을 깨달으며 간월산 정상으로 향했다. 얼마 오르지 않아 안내판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규화목.

오랜 시간 물속에 잠겨 식물의 성질이 전부 분해되고 광물로 몸이 바뀐 나무 아닌 나무. 나무가 화석이 되는 까마득한 시간을 평범한 인생이 떠올릴 수 있을까. 바로 눈앞에 돌이 된 나무가 있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내게는 그저 중생대, 화석, 시간 따위의 언어로 구성된 관념에 불과했다. 어지러웠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만장굴을 걸을 때 그랬다. 수락산 바위들을 지나칠 때도 그랬다. 어느 봄날엔 바위취 꽃 모양과 색깔에 아득해지기도 했다. 조금만 밖을 들여다봐도 나의 언어와 이성으로는 불가해한 존재들이 천지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무지한 채로 살아가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듯싶었다. 나는 베토벤이 아니니까.
드디어 정상. 산객 몇이 이미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간월재에서 받은 감흥이 너무 컸던 탓인지 정상에서의 느낌은 별로 없었다. 산객들이 기념 촬영을 마치고 정상 표지석에서 멀어지기를 기다린 후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정상 표지석 옆에 배내봉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쉽게 눈에 띄었는데, 산객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는 듯 다들 간월재로 돌아갔다. 배내봉까지 2.8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하고 큰 소리로 외쳐도, 노래를 불러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 순간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 * *
해가 지기 전 석남사에 닿아야 했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속도를 내며 걷고 있는데 기이한 형태로 자란 나무가 앞을 가로막았다. 와불? 그랬다. 누워 있는 소나무의 첫인상은 꼭 와불 같았다. 분명 오래전 큰 비에 쓰러졌던 것 같은데, 여전히 살아 있다. 고꾸라지면서도 흙을 움켜잡고 끝까지 버틴 모양이었다. 수직으로 뻗은 굵은 줄기만 보면 여느 나무처럼 평범했다. 그런데 수평으로 자라는 줄기는 원래의 모습을 상기시켜주며 농담처럼 말을 건네는 듯했다. “어때, 괜찮아 보여? 나무처럼 꼿꼿이 살면 재미없잖아. 이 맛에 사는 거지.” 밑동은 산객들의 발에 밟혀 수피가 닳아 형체가 사라졌는데도 와불은 마주치는 이에게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모습 앞에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오솔길 밖에서는 야트막한 산들이 느리고 게으르게 나를 따라왔다. 탁 트인 전망과 인적 없는 산길, 모든 게 평온했다, 그것이 나타나기 전까지. 선짐이질등을 지나자 나무나 풀, 바위 색과는 전혀 다른 뭔가가 느껴졌는데, 그것의 실체를 두 눈으로 또렷이 확인하자 순간, 소름이 돋았다. 흑염소가 바위 위에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흑염소가? 산은 하늘과 나무와 풀, 그리고 바람이 머무는 곳이라 생각했다. 공포는 의외성에서 비롯됐다. 어쩌면 흑염소는 그곳이 집보다 편안한 장소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흑염소의 입장에서 침입자가 틀림없었다. 상대성에 익숙했더라면, 타성과 선입견, 자기중심적 사고로부터 자유로웠더라면 공포보다는 호기심이나 반가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무릎만 늙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마음도 이미 쪼그라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흑염소의 첫인상은 무서웠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놀라면서도 자기반성은 하잖아.”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절벽과 가까운 오솔길을 걷는 동안 흑염소가 한두 마리씩 불쑥불쑥 나타났다. 어느 순간부터는 실체를 보기도 전에 느낄 수 있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바람이 잘 드나드는 골짜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료수를 두어 모금 들이켰을 때 흑염소가 지척에 나타났으리라 짐작했다. 놈의 체취는 지독했다. 도대체 산을 얼마나 오르내렸기에 이런 냄새를 풍기는 걸까. 몸체도 지금까지 만난 녀석들과는 달랐다. 수염도 길고 풍성했다. 사람에게 익숙한지, 사람을 불쾌하게 여기는지 모르지만 녀석은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 시위를 하는 듯했다. 더 이상 무서워하면 안 될 것 같아, 짐짓 녀석에게 반갑게 말을 건넸다. 지금까지 만났던 녀석들은 죄다 슬렁슬렁 도망가는 척했는데,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흑염소도 자기 고집이 있지 않겠어?” 가야 할 방향을 막고 있는 놈을 설득해야만 할 것 같았다.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도 놈은 그대로였다. 그늘 없는 바윗길로 햇살이 내리쬐는 터라 맨발이 따가울 법한데도 꿈쩍하지 않았다. 한동안 식물들이 내뿜는 맑은 공기 속에서 놈의 체취가 더 지독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수분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전에 내가 물을 마실 때 놈이 입맛을 다신 것 같기도 했다. 바위 홈에 물을 찔끔 따랐다. 간월재에서 물을 보충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녀석이 길을 내주리라 기대하며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다행히 뿔에 찔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우리는 각자 할 일을 위해 평화롭게 헤어졌다. 나는 사방이 보이는 오솔길을 독차지했다.

가장 위풍당당하던 그 흑염소는 아니지만
배내봉도 얼마 안 남았고 흑염소의 체취도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어느 순간에 모습을 감춘 감각이 불쑥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쪼그라들어 삶의 기쁨들이 점점 작아진다는 생각만 반복되던 불안한 시절이었다. 냉소와 무관심, 방관, 체념이 일상의 뼈대를 이루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잦던 나날이었다. 너무 욕심이 컸던 걸까. 그 욕심의 몸집에 비해 계획과 실천이 터무니없이 빈약했던 게 틀림없다. 문득, 보니가 그리웠다. 5년이 흐르는 동안 겨우 옥상밖에 구경을 못 한 보니. 지금 이 기분이라면 보니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중에 보니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어설픈 짐작도 더는 내 무릎을 보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릎을 아끼는 동안 내 영혼은 충분히 비루해졌다.
배내봉에 이르자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망설이는 동어반복의 무의미한 시간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다. 사방에서 출렁이는 산들이 손짓을 했다. 어서 오라고, 날거나 뛸 필요 없이 그저 너의 속도로 걸어오면 된다고. 신발 끈을 묶고 집 현관문만 열면 금방 아니냐고. 그랬다. 실천은 대부분 현관문에 가로막혔다. 어쩌다 문손잡이를 돌리면 대개는 뜻한 대로 목적지에 다다랐다. 겨우 철문 하나로 감금된 자유라니, 그것도 열쇠를 손에 쥔 채. 납득할 수 없는 모순에 생각하고 자책하고, 반성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지긋지긋한 제자리걸음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는 내 손에 있고, 그것의 구체적인 이름은 실천이었다. 이토록 간명한 진리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재깍재깍 실천할 수 없었던 변명을 대자면 이렇다. 베토벤은 아니니까.
배내고개로 내려가는 길에는 목계단이 즐비했다. 수평이 맞지 않는 낡은 목계단은 경고를 보내는 듯했다. 불길했다. 오금이 시근시근했다. 가급적 계단을 피해 경사를 줄이며 길 가장자리를 밟았다. 얼마쯤 내려갔을까. 약수가 눈에 띄었다. 젠장, 흑염소에게 물을 듬뿍 주고 올걸, 하는 미안함이 샘솟았다.


배내고개엔 펜션인 듯한 건물 몇 동과 방갈로처럼 보이는 가건물이 공터 가장자리에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대여섯 명의 라이더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다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땡볕에 온몸을 가린 행색인데 웃음소리는 꽤나 정겨웠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한다는 것은 저런 풍경일까. 너무 오래된 일이고 어쩌면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외로웠다. 베토벤도 그랬을까.
능동산으로 이어진 오르막길이 펼쳐지자 슬슬 오금이 걱정됐다. 무릎의 징후에 예민한 터라 배내고개로 내려오는 동안 쉽게 알 수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될 내리막길에서는 오금이 시큰시큰 인상을 쓰리라는 사실을. 보니만 있었다면 이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무게만 계산하느라 좀 더 멀리 놓여 있는 행복들을 많이 놓쳤을지도 모른다. 보니가 곁에 있으면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겠지만 천천히 더 많은 것들을 보거나 생각하며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베토벤이 긍정의 의미에서 콧소리로 화음을 넣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능동산과 석남터널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런, 초장부터 계단으로 된 내리막길이었다. 몸에 대한 예감, 특히 산에서 무릎에 대한 징후는 92.13퍼센트(설마 누군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작곡할 재목도 아니면서 이 숫자의 의미에 골몰하는 건 아니겠지) 들어맞았다. 왼쪽은 멀쩡한데, 오른쪽 오금은 한 계단을 내려설 때마다 시큰거렸다. 석남사까지는 대략 7킬로미터, 갈 수 있을까. 터널에서 택시를 불러야 할까. 계단참에 놓인 의자에 앉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길은 지루했다. 뱀이나 멧돼지도 마중 나오지 않았다. 다람쥐나 청설모도 없었다. 오직 길을 내려다보는 재미로 걸었다. 한 몸인데, 어떤 곳은 자갈이었다가, 또 어느 순간엔 낙엽이 뿌려져 있고, 느닷없이 푹신한 흙길이 펼쳐졌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길의 변화를 느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석남터널과 가지산 갈림길에 이르렀다. 그동안 평지의 도움을 받은 터라 오른쪽 다리오금이 기적처럼 재생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망설임 없이 가지산 방향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계단 몇 개를 내려서자 통증이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 좀 더 걸으니 석남사주차장과 가지산 갈림길이 나타났다.이정표의 한쪽은 밀양을 가리키고 있었다. 밀양, 한 번도 머물러 보지 못한 곳. 왠지 아주 먼 곳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순간, 너무 쉽게 늙어가는 게 아닐까,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밀양으로 내려갈 수 없는 마음은 생각만 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나만의 행복을 놓친 게 아닐까 하는 자괴감으로 이어졌다. 객기로 가지산 방향으로 치고 올라갔다. 오르막길에서 오금은 말썽을 부리지 않았으니 더 올라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런데 오를수록 더 길거나 급하게 내려가야 한다는 자명한 진리가 떠올랐다. 50미터쯤 가다 도로 내려와 석남사주차장으로 향했다. 난 베토벤이 아니니까.
살다 보면 늘 반전이 있기 마련이었다. 안전한 하산길을 택한다고 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마이클 조던의 농구화 치수쯤 되는 길이 펼쳐졌다. 한쪽은 낭떠러지처럼 경사가 급한 골짜기로 이어졌다. 발을 헛디디거나 흙이 무너지면 골짜기에 처박혀 천국에서 베토벤이 직접 지휘하는 9번 교향곡을 들을 수도 있겠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코스인지 흙길이 너무 물러 금세 무너졌다.

계곡 안쪽엔 비로 인해 흙속에 박혔던 돌들이 흘러내린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흙길에서 공포를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뾰족뾰족한 바윗길보다 말랑말랑한 흙길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 의외성이 숨긴 총에 대비하려면 다양성을 인정하고 될수록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충고를 명심하고 명심할 것.
조릿대로 휩싸인 희미한 길들이 몇 차례 이어졌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맨살이 가끔 따끔거렸다. 야생 진드기에 물려 베토벤을 직접 만날 뻔했다던 지인의 말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풀이 없는 평지가 계속 이어지자 발걸음이 느려졌다. 경사가 없는 곳에서 무릎은 아직 쓸 만했다. 그래서인지 좀 더 숲길을 거닐고 싶었다. 석남사주차장까지 나 있는 0.6킬로미터 길은 양옆에 키 큰 활엽수들이 즐비했다.

아스팔트로 나가기 전 공터 바위에 앉아 물을 마시다 어딘가 달라진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쿨토시를 걷어 올리자 손목에 반듯한 금이 그어져 있었다. 분명 베토벤에게는 없었을, 햇볕이 짜준 갈색 장갑이 손에 끼워져 있었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장갑의 색이 바래기 전에 보니와 별을 보러 떠날 수 있을까? 또다시 오래 묵은 질문이 찾아왔다. 남은 생도 지금까지 그랬듯 망설임과 후회, 질문 틈에서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해탈을 꿈꾸는 이들이 모여 사는 석남사로 가는 발걸음은 가볍디가벼웠다. 베토벤은 아니니까.



글/사진 박범서
단편 기획 기사
보니는 오랫동안 자고 있었다. 보니는 5년여 전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고자 구입한 1인용 텐트다. 보니와 함께라면 어디에서든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날씨만 춥지 않다면. 정처 없이 자유롭게, 걱정 없이 안전하게, 어느 때, 어디서든 보니와 함께라면 행복하리라 믿었다. 4년 전 무척 무덥던 여름날, 연립 옥상에서 딱 한 번 보니를 펼쳤다. 그게 전부였다. 보니는 주인을 잘못 만나 텐트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짐이 된 듯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보니처럼 내 삶도 정체성과 방향성 없이 하루하루 늙어갈 무렵, 기회가 찾아왔다. 울주 간월산. 지인은 그곳에 올라 사진만 찍어 오면 된다고 했다. 간월산을 시작으로 보니와 단 둘이 원 없이 영남알프스를 걸을 수 있는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셈이었다.
가을의 영남알프스 ⓒ하이트레일나인피크 박현우
집을 나서기 전까지, 전날에도, 전전날에도 수없이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수한 별이 내려다보는 고요한 밤 산정에 보니와 함께 있는 맑은 이미지는 점점 어두워져 갔다. 대신 질문이 기웃거렸다. ‘과연 보니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산길을 세 시간만 걸어도 무릎이 삐걱거리던 무렵이었다. 두려웠다. 산 어디쯤에서 보니를 증오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확신처럼 다가왔다.
보니를 두고 온 선택은 정말 탁월했다. 7월 말 오전 10시쯤, 햇살은 아스콘을 녹일 기세로 맹렬하게 쏟아졌다. 보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보다 미워하는 경험이 내게 절실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따가운 볕 속에서 그런 생각은 금세 시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나무 그늘로 피하고 싶었다. 들머리는 산악문화관 옆으로 잡았다. 초행길이라 신불산험로를 피해 3.9킬로미터 너머에 있는 간월산으로 향했다. 계곡물 소리가 멎자 본격적으로 오르막이 시작됐다. 오르막, 또 오르막, 다시 오르막. 회색 반바지가 보기 흉할 정도로 젖었다. 산객을 만나면 오해받을 정도로 얼룩져 있었다. 나뭇잎이 우거져 볕이 들지 않았지만 바람이 없었다. 한 시간이 채 안 된 듯싶은데 임도가 나타났다. 산에서는 계단만큼이나 싫은 게 시멘트 길인데, 아무래도 간월재까지 이어질 듯싶었다.
굽이굽이 돌아 나 있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비슷한 풍경이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커트 보니것의 『갈라파고스』에서 후렴구처럼 반복되던 말이 떠올랐다. “에이, 할 수 없지 뭐… 어쨌든 레온(소설 속 화자)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작곡할 재목은 아니었잖아.” 사람이 죽을 때마다 농담처럼 이어지는 말인데, 보통 사람으로 살아온 내겐 묘하게 다가오는 의미였다. 나도 그것의 리듬에 따라 임도의 지루함을 멋대로 변용했다. “에이, 할 수 없지 뭐, 어쨌든 간월산은 진짜 알프스가 아니잖아.” 들머리에서 잠시 머뭇거렸던 신불산 험로 이정표가 임도 모퉁이를 돌 때마다 떠올랐다. 나무 그늘이 사라질 때마다 후회가 밀려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임도 너머로 탁 트인 전망이 나타나고 목적지 부근이라 짐작되는 곳에 기암괴석이 보이자 우중충한 마음에 환한 빛이 출렁거렸다.
발걸음이 경쾌하면서도 여유로워졌다.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좀 더 천천히 걷고 싶은데도 모퉁이를 돌면 다른 얼굴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발걸음은 제멋대로였다. 그랬다. 설렘이 거기에 있었다. 어두운 방구석에 누워 있는 보니를 볼 때마다 내 인생에서 설렘이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마음을 눌렀다. 그런데 모처럼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설렘이 간월재 가는 임도에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바람. 우측 멀리 간월재 휴게소와 기암괴석이 나타나자 바람이 불었다. 20미터쯤 될까. 어귓담처럼 놓여 있는 간월재 입구에서 시원한 바람이 넘실댔다. 바람은 어귓담 너머 펼쳐져 있을 풍경을 마음껏 상상해 보라며 나를 멈춰 세웠다. 더 이상 발을 내딛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오래, 그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싶었다.
어귓담 안에는 아무것도 거칠 게 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임도만 따라 걷던 눈길은 방향을 잃었다. 사방이 탁 트인 풍경 앞에서 보니도, 교향곡 9번도 생각나지 않았다. 간월산의 바람은 죄다 간월재에 모여 있는 듯했다. 시원한 바람에 하아, 하는 짧은 탄성이 먼저 튀어나왔던가.(사진2741)
커트 보니것은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외치고 싶었다. 기쁨과 감동이 메아리로 돌아와 가슴을 두드릴 수 있도록 큰 소리로 고백하고 싶었다. 보니의 무게를 걱정하는 틈에 늙은 무릎쯤은 잊고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경이로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어리석고 가난한 마음으로 얼마나 오래 살아왔던가. “에이, 할 수 없지, 뭐. 어쨌든 걔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작곡할 재목은 아니었잖아.” 내가 죽은 후 누군가 나의 이력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농담에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느끼게 되는 절망과 위로가 손을 맞잡고 있었다. 죽음의 무게를 덜어준다고나 할까. 그래서 베토벤보다는 좀 더 자유롭고 재밌게 살 필요가 있다는 역설적인 충고 같다고나 할까. 베토벤은 멋진 곡들을 만들었지만 나는 간월재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했다. 베토벤도 경험하지 못한 순간을 오선지 한 줄도 채울 만한 재목이 아닌 내가, 느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작곡할 재목이 아닌 인생으로 계속 숨을 쉬어도 사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만 있다면 멋진 시간을 보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평범한 인생의 혜택을 깨달으며 간월산 정상으로 향했다. 얼마 오르지 않아 안내판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규화목.
오랜 시간 물속에 잠겨 식물의 성질이 전부 분해되고 광물로 몸이 바뀐 나무 아닌 나무. 나무가 화석이 되는 까마득한 시간을 평범한 인생이 떠올릴 수 있을까. 바로 눈앞에 돌이 된 나무가 있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내게는 그저 중생대, 화석, 시간 따위의 언어로 구성된 관념에 불과했다. 어지러웠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만장굴을 걸을 때 그랬다. 수락산 바위들을 지나칠 때도 그랬다. 어느 봄날엔 바위취 꽃 모양과 색깔에 아득해지기도 했다. 조금만 밖을 들여다봐도 나의 언어와 이성으로는 불가해한 존재들이 천지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무지한 채로 살아가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듯싶었다. 나는 베토벤이 아니니까.
드디어 정상. 산객 몇이 이미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간월재에서 받은 감흥이 너무 컸던 탓인지 정상에서의 느낌은 별로 없었다. 산객들이 기념 촬영을 마치고 정상 표지석에서 멀어지기를 기다린 후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정상 표지석 옆에 배내봉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쉽게 눈에 띄었는데, 산객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는 듯 다들 간월재로 돌아갔다. 배내봉까지 2.8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하고 큰 소리로 외쳐도, 노래를 불러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 순간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 * *
해가 지기 전 석남사에 닿아야 했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속도를 내며 걷고 있는데 기이한 형태로 자란 나무가 앞을 가로막았다. 와불? 그랬다. 누워 있는 소나무의 첫인상은 꼭 와불 같았다. 분명 오래전 큰 비에 쓰러졌던 것 같은데, 여전히 살아 있다. 고꾸라지면서도 흙을 움켜잡고 끝까지 버틴 모양이었다. 수직으로 뻗은 굵은 줄기만 보면 여느 나무처럼 평범했다. 그런데 수평으로 자라는 줄기는 원래의 모습을 상기시켜주며 농담처럼 말을 건네는 듯했다. “어때, 괜찮아 보여? 나무처럼 꼿꼿이 살면 재미없잖아. 이 맛에 사는 거지.” 밑동은 산객들의 발에 밟혀 수피가 닳아 형체가 사라졌는데도 와불은 마주치는 이에게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모습 앞에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오솔길 밖에서는 야트막한 산들이 느리고 게으르게 나를 따라왔다. 탁 트인 전망과 인적 없는 산길, 모든 게 평온했다, 그것이 나타나기 전까지. 선짐이질등을 지나자 나무나 풀, 바위 색과는 전혀 다른 뭔가가 느껴졌는데, 그것의 실체를 두 눈으로 또렷이 확인하자 순간, 소름이 돋았다. 흑염소가 바위 위에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흑염소가? 산은 하늘과 나무와 풀, 그리고 바람이 머무는 곳이라 생각했다. 공포는 의외성에서 비롯됐다. 어쩌면 흑염소는 그곳이 집보다 편안한 장소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흑염소의 입장에서 침입자가 틀림없었다. 상대성에 익숙했더라면, 타성과 선입견, 자기중심적 사고로부터 자유로웠더라면 공포보다는 호기심이나 반가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무릎만 늙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마음도 이미 쪼그라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흑염소의 첫인상은 무서웠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놀라면서도 자기반성은 하잖아.”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절벽과 가까운 오솔길을 걷는 동안 흑염소가 한두 마리씩 불쑥불쑥 나타났다. 어느 순간부터는 실체를 보기도 전에 느낄 수 있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바람이 잘 드나드는 골짜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료수를 두어 모금 들이켰을 때 흑염소가 지척에 나타났으리라 짐작했다. 놈의 체취는 지독했다. 도대체 산을 얼마나 오르내렸기에 이런 냄새를 풍기는 걸까. 몸체도 지금까지 만난 녀석들과는 달랐다. 수염도 길고 풍성했다. 사람에게 익숙한지, 사람을 불쾌하게 여기는지 모르지만 녀석은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 시위를 하는 듯했다. 더 이상 무서워하면 안 될 것 같아, 짐짓 녀석에게 반갑게 말을 건넸다. 지금까지 만났던 녀석들은 죄다 슬렁슬렁 도망가는 척했는데,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흑염소도 자기 고집이 있지 않겠어?” 가야 할 방향을 막고 있는 놈을 설득해야만 할 것 같았다.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도 놈은 그대로였다. 그늘 없는 바윗길로 햇살이 내리쬐는 터라 맨발이 따가울 법한데도 꿈쩍하지 않았다. 한동안 식물들이 내뿜는 맑은 공기 속에서 놈의 체취가 더 지독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수분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전에 내가 물을 마실 때 놈이 입맛을 다신 것 같기도 했다. 바위 홈에 물을 찔끔 따랐다. 간월재에서 물을 보충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녀석이 길을 내주리라 기대하며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다행히 뿔에 찔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우리는 각자 할 일을 위해 평화롭게 헤어졌다. 나는 사방이 보이는 오솔길을 독차지했다.
가장 위풍당당하던 그 흑염소는 아니지만
배내봉도 얼마 안 남았고 흑염소의 체취도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어느 순간에 모습을 감춘 감각이 불쑥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쪼그라들어 삶의 기쁨들이 점점 작아진다는 생각만 반복되던 불안한 시절이었다. 냉소와 무관심, 방관, 체념이 일상의 뼈대를 이루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잦던 나날이었다. 너무 욕심이 컸던 걸까. 그 욕심의 몸집에 비해 계획과 실천이 터무니없이 빈약했던 게 틀림없다. 문득, 보니가 그리웠다. 5년이 흐르는 동안 겨우 옥상밖에 구경을 못 한 보니. 지금 이 기분이라면 보니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중에 보니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어설픈 짐작도 더는 내 무릎을 보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릎을 아끼는 동안 내 영혼은 충분히 비루해졌다.
배내봉에 이르자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망설이는 동어반복의 무의미한 시간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다. 사방에서 출렁이는 산들이 손짓을 했다. 어서 오라고, 날거나 뛸 필요 없이 그저 너의 속도로 걸어오면 된다고. 신발 끈을 묶고 집 현관문만 열면 금방 아니냐고. 그랬다. 실천은 대부분 현관문에 가로막혔다. 어쩌다 문손잡이를 돌리면 대개는 뜻한 대로 목적지에 다다랐다. 겨우 철문 하나로 감금된 자유라니, 그것도 열쇠를 손에 쥔 채. 납득할 수 없는 모순에 생각하고 자책하고, 반성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지긋지긋한 제자리걸음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는 내 손에 있고, 그것의 구체적인 이름은 실천이었다. 이토록 간명한 진리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재깍재깍 실천할 수 없었던 변명을 대자면 이렇다. 베토벤은 아니니까.
배내고개로 내려가는 길에는 목계단이 즐비했다. 수평이 맞지 않는 낡은 목계단은 경고를 보내는 듯했다. 불길했다. 오금이 시근시근했다. 가급적 계단을 피해 경사를 줄이며 길 가장자리를 밟았다. 얼마쯤 내려갔을까. 약수가 눈에 띄었다. 젠장, 흑염소에게 물을 듬뿍 주고 올걸, 하는 미안함이 샘솟았다.
배내고개엔 펜션인 듯한 건물 몇 동과 방갈로처럼 보이는 가건물이 공터 가장자리에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대여섯 명의 라이더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다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땡볕에 온몸을 가린 행색인데 웃음소리는 꽤나 정겨웠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한다는 것은 저런 풍경일까. 너무 오래된 일이고 어쩌면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외로웠다. 베토벤도 그랬을까.
능동산으로 이어진 오르막길이 펼쳐지자 슬슬 오금이 걱정됐다. 무릎의 징후에 예민한 터라 배내고개로 내려오는 동안 쉽게 알 수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될 내리막길에서는 오금이 시큰시큰 인상을 쓰리라는 사실을. 보니만 있었다면 이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무게만 계산하느라 좀 더 멀리 놓여 있는 행복들을 많이 놓쳤을지도 모른다. 보니가 곁에 있으면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겠지만 천천히 더 많은 것들을 보거나 생각하며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베토벤이 긍정의 의미에서 콧소리로 화음을 넣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능동산과 석남터널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런, 초장부터 계단으로 된 내리막길이었다. 몸에 대한 예감, 특히 산에서 무릎에 대한 징후는 92.13퍼센트(설마 누군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작곡할 재목도 아니면서 이 숫자의 의미에 골몰하는 건 아니겠지) 들어맞았다. 왼쪽은 멀쩡한데, 오른쪽 오금은 한 계단을 내려설 때마다 시큰거렸다. 석남사까지는 대략 7킬로미터, 갈 수 있을까. 터널에서 택시를 불러야 할까. 계단참에 놓인 의자에 앉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길은 지루했다. 뱀이나 멧돼지도 마중 나오지 않았다. 다람쥐나 청설모도 없었다. 오직 길을 내려다보는 재미로 걸었다. 한 몸인데, 어떤 곳은 자갈이었다가, 또 어느 순간엔 낙엽이 뿌려져 있고, 느닷없이 푹신한 흙길이 펼쳐졌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길의 변화를 느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석남터널과 가지산 갈림길에 이르렀다. 그동안 평지의 도움을 받은 터라 오른쪽 다리오금이 기적처럼 재생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망설임 없이 가지산 방향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계단 몇 개를 내려서자 통증이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 좀 더 걸으니 석남사주차장과 가지산 갈림길이 나타났다.이정표의 한쪽은 밀양을 가리키고 있었다. 밀양, 한 번도 머물러 보지 못한 곳. 왠지 아주 먼 곳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순간, 너무 쉽게 늙어가는 게 아닐까,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밀양으로 내려갈 수 없는 마음은 생각만 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나만의 행복을 놓친 게 아닐까 하는 자괴감으로 이어졌다. 객기로 가지산 방향으로 치고 올라갔다. 오르막길에서 오금은 말썽을 부리지 않았으니 더 올라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런데 오를수록 더 길거나 급하게 내려가야 한다는 자명한 진리가 떠올랐다. 50미터쯤 가다 도로 내려와 석남사주차장으로 향했다. 난 베토벤이 아니니까.
살다 보면 늘 반전이 있기 마련이었다. 안전한 하산길을 택한다고 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마이클 조던의 농구화 치수쯤 되는 길이 펼쳐졌다. 한쪽은 낭떠러지처럼 경사가 급한 골짜기로 이어졌다. 발을 헛디디거나 흙이 무너지면 골짜기에 처박혀 천국에서 베토벤이 직접 지휘하는 9번 교향곡을 들을 수도 있겠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코스인지 흙길이 너무 물러 금세 무너졌다.
계곡 안쪽엔 비로 인해 흙속에 박혔던 돌들이 흘러내린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흙길에서 공포를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뾰족뾰족한 바윗길보다 말랑말랑한 흙길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 의외성이 숨긴 총에 대비하려면 다양성을 인정하고 될수록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충고를 명심하고 명심할 것.
조릿대로 휩싸인 희미한 길들이 몇 차례 이어졌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맨살이 가끔 따끔거렸다. 야생 진드기에 물려 베토벤을 직접 만날 뻔했다던 지인의 말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풀이 없는 평지가 계속 이어지자 발걸음이 느려졌다. 경사가 없는 곳에서 무릎은 아직 쓸 만했다. 그래서인지 좀 더 숲길을 거닐고 싶었다. 석남사주차장까지 나 있는 0.6킬로미터 길은 양옆에 키 큰 활엽수들이 즐비했다.
아스팔트로 나가기 전 공터 바위에 앉아 물을 마시다 어딘가 달라진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쿨토시를 걷어 올리자 손목에 반듯한 금이 그어져 있었다. 분명 베토벤에게는 없었을, 햇볕이 짜준 갈색 장갑이 손에 끼워져 있었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장갑의 색이 바래기 전에 보니와 별을 보러 떠날 수 있을까? 또다시 오래 묵은 질문이 찾아왔다. 남은 생도 지금까지 그랬듯 망설임과 후회, 질문 틈에서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해탈을 꿈꾸는 이들이 모여 사는 석남사로 가는 발걸음은 가볍디가벼웠다. 베토벤은 아니니까.
글/사진 박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