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미야]단쓴단쓴 츤데레의 매력

카페 미야 #14



'츤데레'의 매력은 무엇일까?

아마도 '반전'이 주는 극적 효과이지 않을까. 나에게 차갑고 무뚝뚝하게 행동하던 사람에게서 뜻하지 않게 따뜻한 모습과 배려를 발견할 때의 기쁨. 무르익지 않은 인간관계에서 발견하게 되는 이 매력은 어쩌면 풋풋함, 서투름에 대한 동경일 수도 있겠다.



여행지에서 맞닥뜨리는 고난은 종종 최고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럴 때면 현지인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구해야 하는데, 늘 기대보다 더 큰 도움을 받았다. 아무리 돌아 다녀도 도통 발전이 없는 길 찾기 능력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를 길바닥에 뱅글뱅글 돌렸다. 나라는 인간이 한탄스럽게 느껴질 즈음, 콧바람 흥흥 대며 세차를 하던 아주머니는 한 시간 째 자기 집 앞 골목을 쑤시고 다니는 나를 그냥 넘기지 않으셨다. 내 숙소 이름을 묻고, 전화를 걸어 직원과 러시아어로 한참을 통화하더니, 집안에 있는 남편을 불러냈다. 아저씨는 고개를 끄떡하며 내 캐리어 손잡이를 확 낚아채고는 앞서셨다. 땅이 움푹 파여 웅덩이가 된 곳에서는 가방 상하면 안 된다며 굳이 들어 옮기시기까지 하셨다. 알고 보니 숙소는 아예 다른 블록에 있는 꽤 먼 곳이었다. 이 정도까지 길치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너무 창피해 귀까지 새빨개졌다. 아저씨는 끝까지 데려다 주시며 직원에게 나를 인수인계 해주셨다. 고맙고도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내게, 본인이 한국에 가더라도 너처럼 몰라서 헤맬 테니 미안해 할 것 없다 하시며 츤데레 매력 한껏 발산 후 총총 사라지셨다.



이런 정도의 친절은 처음도 아닌데 나는 왜 필요 이상으로 감동을 받는가. 친절도 일종의 관습과 같아 드러나는 모습이 제각각이다. 친절하기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두 나라, 영국과 일본 또한 친절의 모습은 아주 다르다. 거리 한복판에 서서 두리번거리기만 해도 “May I help you?”, 무거운 가방을 끌고 버스에 오를라 치면 피우던 담배도 던져버리고 “May I help you?” 하며 다가오는, 병적일 정도로 집착적인 영국 사람들의 친절. 과자를 한 봉지 사더라도 두 손으로 카드를 받고, 돌돌 말리지 않도록 가운데를 살짝 접은 영수증을 눈썹 높이로 들어 올려 공손하게 돌려주는, 정중함이 더 옳은 표현인 듯한 일본 사람들의 친절.


그런데 영국의 ‘캐주얼한 친절’은 언제부터인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어, 기대했던 수준이 아닐 때에는 기분이 나빠지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일본의 ‘포멀한 친절’은 거리감이 느껴져 부담스러운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한발 앞선 친절의 이면에는 무례한 인간은 이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으니 때로는 친절이 강압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런데 러시아의 ‘츤데레 친절’은 그런 중압감도 없으며 질리지도 않으니, 반전의 힘이란 이리도 대단한가보다.



내가 러시아에 사람들에게 츤데레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단지 평소 이들이 낯선 사람에게 살갑게 웃지 않는 데 이유를 둔 것은 아니다. 전쟁과 혁명, 쿠데타의 그늘은 도시 깊숙한 곳까지 드리워져 여행 중인 나에게도 끊임없이 기운을 뻗쳐왔다. 푸른 공원 안에도, 아름다운 미술관 앞에도, 비둘기 날아드는 드넓은 광장에도 군복 코트 휘날리는 전쟁 영웅의 조각과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격렬한 투쟁 속에 목숨을 잃은 병사들은 꺼지지 않는 혼불이 되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24시간 타오르고 있었다. 드넓은 벽, 커다란 훈장 아래 빼곡히 새겨진 이름. 이를 읽어 내리는 러시아 사람들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파란만장했던 격동의 시대를 지나오며, 그토록 염원하였던 인간다운 삶을 향한 투쟁의 역사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었다. 이러한 엄숙함이 어쩌면 이들을 츤데레로 오해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      *      *  


‘하바롭스크’라는 지명을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만큼 관광지로 내세울 만한 것이 딱히 없다. 박물관 한 개, 미술관 한 개, 그 외 해질녘 유람선 정도랄까? 이런 곳에 닷새나 머무르게 되었으니 게으름 피우기 딱 좋다. 내가 무료하게 이 도시에서 어슬렁대는 만큼이나 이곳 사람들이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도시를 감싸며 유유히 흐르는 아무르 강 때문이었다. 끝없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이기도 하지만, 거기엔 압도적인 면이 있어 광활함이 공포로 다가올 때도 있다. 하지만 강은 언제까지고 포근한 마음만 든다. Mother nature - 대자연에서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은 이처럼 늘 곁에 있어주는 따스함 때문이었나 보다. 이름마저도 ‘사랑’인 아무르 강을 바라보니, 하바롭스크 사람들은 소박하나마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들 같았다.



실제로도 아무르 강은 이곳 사람들의 충실한 쉼터였다. 강가에 앉아 낚싯줄을 드리운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강태공들, 그네 벤치에 앉아 적당히 발을 구르며 흔들흔들 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벤치를 그네로 만들 생각은 누가 했을까. 강을 따라 길게 늘어선 공원 안에는 세련되지는 않아도 없는 것이 없었다. 주말에는 이 동네 모든 사람들이 아무르 강의 곁으로 모여드는 듯 했다. 아름드리나무가 넉넉하게 내려뜨린 그늘 아래 누워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씽씽 가로지르는 사람들에게 여유로움이 넘쳤다. 월미도만큼이나 촌스러운 놀이기구를 타고 꺅꺅 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덩달아 스릴을 느끼다, 천천히 흐르는 대관람차에 올라 아무르 강의 끝이 어딘지 가늠해보기도 했다. 공원 내에 즐비한 포장마차에서 샤슬릭, 크레페, 옥수수 구이, 감자 구이 냄새가 솔솔 유혹하니 언제나 두 볼 가득, 배가 고플 새가 없었다.



아무르 강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해질녘이었다. 황금빛, 주홍빛, 푸른빛이 층층이 내려 앉아 저 너머 끝까지 좇고 싶은 마음이 일렁이기도 했다. 유람선을 타고 노을의 자취를 따르는 길, 연인과 함께, 아기와 함께 온 사람들은 유람선이 출발하자 휘익휘익 휘파람를 불거나 손뼉을 쳤다. 강 건너 산책로의 가로등이 하나 둘 불 들어오고, 대관람차는 색색의 빛을 내뿜었다.


밤이 내려앉자, 사람들은 테니스장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펜스를 스크린 삼아 야외 영화관이 꾸려졌다. 돗자리를 깔고 앉아 무릎 담요를 덮고 과자를 오물거리며 영화에 빠져들어 갔다. 오늘의 영화는 「500일의 썸머」. 썸머와 폴의 달달한 첫키스 장면에선 다들 숨을 죽였다.



이 모든 것에 촌스러운 맛이 배어있는 와중, 노래하는 분수(Musical fountain Khabarovsk)는 의외로 훌륭했다. 웅장한 음악에 맞춰 색색의 조명과 신나게 위로 쏘아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것이 질리지도 않았다. 특별할 것 없는 하바롭스크의 주말은 이렇게 흐르고 있었다. 소박한 사람들, 매서운 겨울이 당도하지 않은 이곳이 너무 사랑스러워 꼭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으니, 나는 카페에서나마 간접 체험을 한다. 나는 아무리 여행 기간이 짧아도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꼭 단골 카페를 만든다. 그들에게 나는 뜨내기일지라도, 카페 직원을 알아보고, 나를 알아보는 그 눈빛에 화답하여 눈인사를 하며 이런저런 말을 붙이고, 콘센트가 어디 있는지 알고, 화장실을 물어보지도 않고 찾는 순간만큼은 그 카페를 사랑하는 동네 사람이 된다. 아침마다 단골 카페를 찾아 커피 한잔에 오늘은 어디 가볼지 지도를 훑고, 밀린 일기를 쓰고, 일상 속에 잊고 지냈던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며 엽서를 쓰고, 멍하니 사람 구경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 시간. 호텔 조식과는 절대 바꾸고 싶지 않은 여행 중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하바롭스크 도착 첫날, 무라예바 거리(Ulitsa Murav'yeva-Amurskogo)를 걷다 흠뻑 반한 건물이 있었다. 홀린 듯 문을 열고 들어선 그 곳은 ‘극동 도서관(Far Eastern State Research Library)’이었다. 정돈된 타일 바닥, 샹들리에가 멋스러운 로비 한 쪽에 나무로 짠 작은 카페가 있었다. 카페라고 해봐야 테이블 하나와 소파가 다였다. 도서관이 주는 아늑함과 과묵한 사장님이 좋아 나는 매일 아침 이곳을 찾았다. 별다른 말씀은 없으시지만, 커피를 내려주실 때만큼은 어떤 맛을 원하는지 세세히 물으셨다. 드립 포트를 뱅뱅 돌리며 정성스레 커피를 내리는 모습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카페 사장님은 고려인이셨다. 커피를 조심스레 테이블에 내려놓고 서툰 한국어로 “맛있게 드세요”하시면, 향긋한 커피향은 로비 전체를 물들이는 듯 했다.
혀끝에 맴도는 쌉쌀한 커피 한 모금에 머리가 아찔.


긴 숨 내쉬며 소파 깊숙이 등을 파묻으면 이보다 여유로운 하루의 시작은 없을 것 같았다. 아침마다 이곳에 출근하다시피 하니, 사장님은 커피와 함께 러시아 특산물인 천연 꿀도 함께 주셨다. 쌉쌀한 커피 한 모금, 정직하게 달콤한 꿀 한 스푼의 ‘단쓴단쓴’의 헤어날 수 없는 매력. 꼭 이곳 사람들과 닮았다.



관람객이 없는 미술관, 전시실에 들어서면 한발 앞서 불을 켜주시고,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 발길을 멈추고 서있으면 조용히 다가와 설명을 해주시던 미술관의 할머니들(당연히 러시아어로 설명을 해주시지만 신기하게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만 같다), 서투른 영어를 미안해하며(미안해 할 일이 전혀 아니다) 5일이나 이곳에 머문다고 하니 구석구석 갈만한 곳을 찾아내 설명 해주던 관광 안내소의 아가씨, 얼마 안 되는 팁에 보조개 쏙 팬 미소를 보이시던 택시 기사 아저씨…….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온기가 느껴지는 사람들의 매력에 빠져, 나는 하바롭스크를 여행하는 내내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Far Eastern State Research Library
Address: Ulitsa Murav'yeva-Amurskogo, 1, Khabarovsk, Khabarovskiy kray, 러시아 680000
Phone : +7 421 232-72-20
Open: AM 9:30~ PM 19:30, 주말 18:00  (금요일 휴무)




글/사진 miya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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